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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00화 (100/375)

〈 100화 〉 동행 #9

* * *

[100] 동행 #9

눈송이가 흩날렸다.

바람을 가르고 나타난 한 형체.

놈이 커다란 이빨로 나와 코브라를 동시에 물어뜯으려는 찰나, 늑대가 뛰쳐나와 가로막았다.

검은 털가죽으로부터 찐득한 살점이 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음이 동굴에 울려퍼졌다.

“안 돼!!!!!!!!!!!”

순식간에 벌어진 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늑대가 내 목숨을 구했다.

또 한 번, 마지막으로.

­털썩.

검은 형체가 낙하하자 싸늘한 한기가 흩어졌다. 뒤늦게 후두둑 떨어진 핏덩이가 그 주변에 고여 웅덩이를 이루었다. 현실성 없는 광경.

나는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망연히 녀석에게로 향했다. 미약하게 떨리는 그 육신을 어루만지자 손이 붉게 물들었다.

“아, 아니야... 이럴 리 없어... 이런 건...”

­......

아직 숨이 끊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점점 꺼지기 시작한 생명의 불씨와 뿜어나오는 혈흔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천천히 눈꺼풀이 벌어지더니 노란 눈동자가 내게 힘없이 웃어보였다.

“너, 너...”

­쉬이잇...!

동굴 저편에서 두려움에 찬 쇳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급습으로부터 살아난 코브라가 몸을 움츠렸다. 새빨간 안구가 사태를 파악하고 재빨리 도주를 꾀했으나 모두 부질없었다.

하얀 짐승은 늑대에게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달려가 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직!!!

일격에 머리를 잃은 몸뚱어리가 땅에 떨어졌다.

압도(??).

그토록 완강했던 강적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반격다운 반격도 못 한 채.

하얀 마물은 흡족하게 사냥감을 내려다보더니, 우리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주저앉아 으적으적 뱀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지금은 배를 채우는 데 관심을 쏟고 있지만,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이쪽을 돌아볼 터.

나는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지금이 도망갈 기회라는 걸 직감했지만, 어떻게 떠나란 말인가. 이대로 내가 가버린다면 늑대는 홀로 남아 저 마물의 뱃속으로 사라질 텐데.

“늑대야... 늑대야... 기운 좀 차려봐 제발...”

­......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고 애원했지만, 축 늘어진 몸에선 기력이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옆구리의 뜯겨나간 살점에서는 울컥거리는 핏물 너머로 새하얀 뼈와 장기가 훤히 내비쳤다.

털가죽을 타고 흘러내린 선혈은 얼어붙은 바닥을 녹이고, 진창이 되어 바지를 적셨다.

회생 불가.

불온한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분명... 방법이....”

아직.

아직이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분명히 녀석을 살릴 방법이 있을 거다.

황급히 배낭을 뒤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매듭을 풀었다. 땔감으로 넣어둔 나무껍질에 피부가 쓸리고 가시가 손톱 밑을 파고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 내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일단 출혈을...! 그리고 버섯...!! 그래, 그 버섯이 있으면...!”

통증을 줄여 줄 수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버섯을 꺼내 길쭉한 주둥이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기력을 다한 입에선 음식물을 씹지 못하고 피 섞인 질척한 타액만 줄줄 늘어졌다. 손으로 녀석의 턱을 잡고 여닫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직접 버섯을 잘게 씹어 으깬 뒤 녀석의 목구멍 너머로 흘려넣었다.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필사적으로 상처를 지혈했다. 어느새 흘러나온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뿜어나오는 핏줄기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곧 역부족이란 걸 깨닫는다. 노란 눈동자가 살며시 열리며 내게 고했다.

‘도망쳐’ 라고.

“아, 안 돼..! 이런 건... 이런 결말은....”

­.....

녀석이 날 지긋이 응시했다. 슬픈 시선이 나를 마주했다. 그 눈길에 서린 따스함과 안타까움을 목도하자 가슴이 찢어졌다. 나를 원망할 법도 한데, 내가 없었더라면 이런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둥그스름한 눈동자엔 애정만이 가득했다.

아.

그리고 이 순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처음부터 마물과 인간에게 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초에 종족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적으로 만난 사이. 서로에게 이빨을 박아넣을 운명이었지만,

우린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지였고

한솥밥을 먹은 동료였으며

서로의 은인이자

친구였다.

“미안...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

숙인 고개에 희미한 숨결이 닿았다. 따스한 혓바닥이 내 뺨을 핥아주었다. 점차 총기를 잃어가는 눈동자가 내게 고했다. 자책하지 마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고마워.”

과거에 했던 각오가 떠올랐다.

나는 늑대를 바위에 눕혀두고 천천히 일어났다. 가슴에 칼날을 묻고, 주먹을 움켜쥐며.

­.....크르르...

적의를 읽은 맹수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만으로 상대를 압살하는 흉흉한 눈빛이 내 전신을 관통했다.

풍족한 사냥감에 만족한 걸까. 콧방귀를 뀌며 다시금 뱀 고기에 머리를 묻는 동작에선 지금이라면 나 하나쯤 도망가도 모른척해 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네가 보인 용기, 잊지 않을게.’

나는 절대로 두 번 다시 동료를 잃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단도를 거머쥔다.

*

중후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갈라진 천장의 틈새로 햇볕이 내리쬐어 아름다운 빙하 동굴의 자태를 망막에 새겨넣었다. 하지만 곳곳에 널브러진 산성 웅덩이와 녹아내린 진흙은 이곳에 큰 격돌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설호(雪虎).

눈 호랑이. 눈앞의 맹수를 부족한 내 어휘로 표현하자면 그랬다. 다만 그 수려한 외견은 동물원에서 목격했던 백색증 호랑이와는 궤를 달리했다. 윤기가 흐르는 흰 털 위를 흑요석처럼 새까만 줄무늬가 수놓았고, 비대하게 불거진 발톱과 송곳니는 이솝 우화 속에서 뛰쳐나온 것만 같았다.

허나 놈의 눈동자에는 따뜻한 동화 따위에 어울리지 않는 시퍼런 안광이 서려있었다.

“.....”

­스륵.

긴장으로 말미암은 식은땀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황소조차 한입에 삼켜버릴 저 덩치 앞에선, 누가 먹이사슬의 고리를 쥐고 있는지 자명했다.

­크르르르르르르...

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뱀 고기에서 고개를 들었다. 호랑이 특유의 낮고 굵은 음성. 마력 섞인 울음이 내 전신을 훑자, 등골이 서늘해지고 칼자루를 쥔 손아귀가 느슨해진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지가 전해져온다.

하지만­

­크르르르르르르­!!!!!!

내가 좀처럼 물러서지 않자 녀석이 거칠게 목청을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코브라의 육신이 툭 떨어졌다. 생소한 인간에 대한 탐색도 잠시, 놈이 서서히 앞발을 내디뎠다.

이로써 전투의 개막이 올랐다.

‘침착해 도란.’

놈이 지닌 능력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한다. 외견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이용한 육탄전, 심상치 않게 몰려드는 바람으로 말미암은 마법 정도.

한순간의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도래하는 바, 나는 놈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단도를 중단으로 치켜들었다.

이어 놈이 가소롭다는 듯이 앞발을 들어올리고, 온 세상의 소리가 낮게 가라앉은 순간.

내가 먼저 움직였다.

­콰직!!!!!

바닥을 밟고 질주했다. 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사선으로 달려나갔다. 오만하게 내 몸동작을 내려다보는 백호에게.

얼음덩어리를 박차고 도약하자 날카롭게 깨져나간 파편이 구석으로 흩어졌다. 상대는 아득할 경지의 강적. 단 일격이라도 허용하면 그대로 승패가 갈릴 수 있다. 나는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바닥을 기듯 내달려 단검을 휘둘렀다.

­크르르르르!!!!!

­콰드득!!!!!!

녀석이 앞발을 내리찍자 진흙이 터져나왔다. 솟구치는 흙의 장벽이 칼끝을 막아섰다. 이를 악물며 발을 빼자 날카로운 궤적이 쇄도해온다. 민첩하게 도약해 발톱을 회피하고 검날을 치켜올렸지만, 연이어 앞발이 짓쳐오는 탓에 공격을 단념하고 후방으로 물러나 위기를 모면했다.

숨 돌릴 틈은 없다.

재도약. 곧바로 다시 뛰어들었다. 확장된 동공으로 하여금 빛을 받아들여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쫓았다. 오른쪽 어깨에 힘이 실리자 왼쪽 팔꿈치로 파고들었다. 솟구치는 흙탕물이 시야를 가린 틈을 역이용해 근접한다.

이대로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순간...

ㅡ오싹.

등골을 저며내는 듯한 감각. 새파란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시선 앞에선 그 어떤 허실도 부질없었다.

­쿠구우우우우웅!!!!!!

돌연 발밑에서 바위가 솟구쳤다. 내 덩치를 뛰어넘는 거석. 어떠한 전조도 없이 구현된 마법에 나는 대처하지 못했고, 그대로 복부를 얻어맞으며 날아가 빙벽에 처박혔다.

“크으윽...!!”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핏물이 스며나왔다. 반사적으로 칼집을 들어 막지 않았더라면 내장이 터져나갔을 공격.

황급히 전방으로 시선을 향하자­

“.....!!”

­콰와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발톱이 덮쳐왔다. 빙하가 송두리째 무너지자 굉음이 울려퍼졌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들자 동굴 벽면을 갈라놓은 커다란 상흔이 보였다.

“젠.. 장...!!”

동굴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오고, 부산스럽게 진흙이 튀었다. 소용돌이치는 격류가 공기를 찢어발긴다. 두꺼운 팔뚝이 휘둘러질 때마다 놈의 발톱에서 바람으로 이루어진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공동을 뒤흔들었다.

압도적인 위력.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함.

일그러져 휘몰아치는 바람 칼날을 보자 등골이 오싹했다.

­쿠구구구궁!!!!!!!!

놈이 발을 구르자 지면이 폭발했다. 솟구친 토사류가 거대한 장벽이 되어 놈의 모습을 감추었다. 팔뚝으로 눈가를 가려 쇄도하는 파편을 틀어막고 전장을 주시했을 땐 이미 시퍼런 발톱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

­콰과과과과과과!!!!!!!

은빛 잔상이 빗발쳤다. 후방으로 물러나고자 했지만, 푹푹 빠지는 진창이 발길을 잡아챘다. 간신히 검집을 쥐고 방어해보지만, 다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하나둘씩 살가죽 위에 붉은 실선이 생겨나고, 바람 칼날에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찰나─

­──────────!!!!!!!!!!!

천둥.

우레와 같은 포효가 터져나왔다.

놈의 마력 섞인 외침을 듣자,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시야가 명멸하고 소리가 어지러진다.

최강의 맹수. 피식자를 굴복시키는 힘. 무형의 파동이 신형을 덮쳤다. 수많은 마물 위에 군림하는 자의 호령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이 있었다.

단도를 쥔 손가락이 헐거워지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경직된 어깨가 옅게 떨리자 두려움에 찬 폐는 가쁜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ㅡ

­크르르르...

“......”

내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위기와 고초를 겪으며 단련된 정신은 고작 이 정도로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고작 그거냐?”

­크르르르르르!!!!!!!

놈이 분개했다. 자세를 낮추고 으르렁거리며 안광을 불태웠다. 여태껏 그가 울부짖으면 모든 짐승이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을 터, 변변한 털가죽조차 없는 애송이가 제 포효를 듣고도 멀쩡하니 자존심이 상할 만하지.

나는 놈을 응시하며 단도를 거머쥐었다. 굳건하게 지면을 디뎠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올곧게 마주보았다.

놈의 정신 공격을 흘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뿐이다.

전세는 한없이 녀석에게 유리하다.

격돌하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단검에 베여봤자 작은 흉터밖에 남지 않는 녀석과는 달리, 나는 한 방만 허용해도 목숨이 위태롭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다간 곧 크게 데이고 말 거다.

만일 내가 놈을 쓰러뜨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키이잉..

칠흑빛 단도.

심해의 물결을 담은 도신이 옅게 떨리며 희미한 시동음을 자아냈다. 흑색 잔상을 퍼트리며 내게 공명했다.

그래.

속전속결(?戰??).

전황이 길어질수록 내게 불리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있을 편각(??)에 내 모든 걸 쏟아붓겠다.

“하아아아아아아압!!!!!!”

가속. 빙하의 푸른 광휘 아래를 질주했다. 끓어오르는 산성 웅덩이를 넘어 쇄도한다. 내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새카만 궤적이 검신을 타고 늘어졌다. 풍경이 매서운 속도로 스쳐지나간다.

­....!!!!

푸른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급격하게 빨라진 상대의 속도를 쫓아오지 못했다. 시퍼런 홍채가 내 육신을 놓친 순간, 나는 디딤발에 회전을 실어 배후로 파고들었다.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오른손의 단도를 내려찍는다.

­푸화아아악!!!!!

뜨듯한 선혈이 뺨에 튀었다. 하얀 털가죽이 붉게 물들어간다. 처음으로 발발한 유효타. 백호가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흉포하게 몸을 뒤흔들어 떨쳐내려 하지만, 나는 등허리에 칼날을 박아넣고 버텼다.

­콰드드드득!!!

백호가 거칠게 울부짖으며 바위 기둥에 몸을 처박자 살가죽이 갈려나갔다. 나는 고통을 인내하며 머리를 밟고 도약해 허공에서 상체를 뒤틀었다. 놈이 발을 구르자마자 사방에서 돌기둥이 솟아오지만, 칼집으로 중심을 잡아 흘려보냈다.

“......!!!!”

시간이 없다. 지면에 닿자마자 좌로 도약해 솟구치는 기둥을 피해낸다. 백호의 기척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땅을 굴러 발톱을 회피하고, 두 눈에 맹렬한 살기를 피워올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심장에 날붙이를 찔러넣기 위해.

­쿠구구구구구궁!!!!

머리 위에서 암반이 낙하해왔다. 내가 딛고 선 바닥이 융기하며 천장과 맞닿을 기세로 솟구쳤다. 나는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편승하며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사각에서 바람 칼날이 날아들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시커먼 돌조각이 덮쳐오자 피부가 찢겨나갔고, 이를 악물며 올려보니 커다란 앞발이 시야에 가득했다.

­콰아아아앙!!!!!!!!!

진흙더미 위로 미끄러져 회피했다. 지반이 함몰하며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토사류가 질척하게 늘어지자 나는 입안 가득 떫은맛을 뱉어내며 수평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녀석은 훌쩍 물러나 피한 뒤, 날렵하게 재도약해 송곳니로 내 머리통을 깨부수려 했지만­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재빨리 칼집을 박아넣어 응수했다. 강철 칼집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간다. 그 안에 담아두었던 숯 섞인 진흙이 터져나오며 감파란 눈동자를 뒤덮었다. 회심의 한 수. 놈이 고개를 뒤흔들며 내 기척을 쫓았지만, 나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여기다.”

­....!!!!!!!!

벽에 박아넣은 단도를 뽑으며 강하했다. 놈의 주의를 끌었다. 검은 단검에 흉흉한 기운이 일렁이고, 시꺼먼 연무가 스며나왔다. 녀석의 눈이 크게 뜨이며 함정이란 걸 깨달았을 땐ㅡ

“하나 가져간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포효가 공동에 메아리쳤다.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녀석의 오른쪽 눈에는 익숙한 은빛 칼날이 박혀있었다.

“아직.”

아직이다.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

반드시.

내 동료를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주마.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의 외침이 울려퍼지자 대기가 진동했다. 머리 위, 현저해진 햇살 사이 흘러드는 눈송이가 빛을 산란하며 시야를 현혹했다. 방정맞은 짐승의 울음과는 차원이 다른, 왕의 포효.

하지만, 내게는 사형수의 마지막 발악처럼 들렸다.

힘을 끌어모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검은 아지랑이가 짙어졌다. 탁하게 흔들리는 연기는 이내 점점 범위를 넓혀 동굴 전체를 뒤덮었고, 단도가 자아내는 기이한 시동음과 공조하며 심상치 않은 기류를 피어올렸다.

그래.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나는 귓가에 와닿는 그림자의 속삭임에 집중했고,

정수로 쥔 단검을 전방으로 내밀며,

외쳤다.

“자라나라!!!!!!!!!!!!!”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솟구치는 검은 기류. 격렬하게 요동치는 암흑. 죽음의 기운.

그림자가 내 부름에 응했다.

검은 넝쿨이 지표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놈은 크라켄이 선박을 뒤덮듯 내 발치를 맴돌며 자라났고, 뾰족한 끄트머리를 사방으로 기웃거리며 먹잇감의 기척을 쫓았다.

이어 잔털을 삐죽 세우고 긴장한 백호를 발견하자­

­콰드드드드득!!!!!!!!

­.....!!

맹렬하게 몸체를 드러내고 순식간에 치달았다.

“가라!!!!!!!!!”

단도를 치켜세우며 명령했다. 덩굴을 지표면을 깨부수며 동굴을 질주했다. 농후한 혈향을 맡자 별개의 의지를 지닌 생명체처럼 극도로 흥분하며 줄기를 부르르 떨었다.

­.....!!!!!!!

백호도 황급히 발을 내리찍어 응수했다. 바위기둥이 솟구치며 앞길을 막아서지만, 넝쿨은 아랑곳하지 않고 휘어들며 다각도로 놈에게 육박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고, 줄기의 끝부분이 착탄한 자리엔­

태산 같은 몸뚱이 곳곳에서 피를 뿜어대는 마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늑대의 원수를 갚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하아아아아아압!!!!!!!!!!!!!!!”

증속. 바람을 가르며 가속했다. 종아리에 힘을 실어 속도를 더했다. 덩굴을 밟으며 그림자들과 함께 산개한다.

내가 덩굴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앞으로 고작 몇십 초. 그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본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ㅡ

단검을 내질렀다. 하단에서 상단으로 선회. 다가오는 발톱을 덩굴로 방어. 부츠로 땅을 디디며 역습한다. 단도를 돌려 역수로 쥐고. 상체를 비틀며 우에서 좌로. 핏방울을 흩뿌리며 회전. 기세를 살려 올려베기.

­크르르르르릉!!!!!!!

마력에 휩싸인 앞발이 날아든다. 횡으로 도약해 회피했다. 발바닥과 교차하며 칼날을 박아넣었다. 터져나온 포효와 들썩이는 지면. 마법의 전조. 미세하게 달그락거리는 돌멩이를 보고 솟아오르는 암석 파편을 피해냈다. 즉각 반격해 화답한다.

­콰르르르르르륵!!!!!

무너지는 천장, 눈부시게 들이치는 광채. 명령했다. 덩굴이 내 몸을 감싸자 그 위를 바람 칼날이 난자했다. 진동이 멎은 즉시 나는 줄기를 비집고 질주했다. 회피 경로를 예측해 발톱이 엄습했지만, 살갗이 도려내지던 개의치 않았다.

“크아아아아아아!!!!!!!!!!!!!!”

시간이 없다. 짙게 응축된 그림자를 뻗었다. 적을 옥죄여가는 덩쿨과 협심해 날을 휘두른다. 발을 굴러 아지랑이 속으로 파고들고,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측면으로 도약했다.

정수로 단도를 쥐고 참격. 즉각 자리를 이탈하며 파열.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며 회피하고. 회전. 우에서 좌로 칼날을 바꿔 쥐며 난폭하게 호선을 그리고, 청색 외눈을 마주하며 진흙탕에 숨었다.

­투팍!!!!!!!!

놈의 발밑에서 솟구쳤다. 질척한 흙더미와 아지랑이를 안구에 때려박는다. 이빨이 덮쳐오지만, 그대로 뛰어넘어 회피했다. 덩굴을 세워 몰아닥치는 뒷발을 막아세운다. 놈이 날 돌아보자 드러난 가슴팍에 단도를 꽂아넣었다.

검은 칼날이 확실하게 털가죽을 비집고 들어간 순간­

“하아아아압!!!!!!!!!”

온 힘을 그러모아 허공으로 도약했다. 빠르게 회전하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시선을 놓지 않은 채로 칼자루를 차올리자 살점이 팍 터져나왔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발발하지만, 무시했다. 대장장이가 뜨거운 모루 위 철덩이를 단조하며 울려퍼지는 소리에 동정하지 않듯이.

이걸로 끝이다.

이대로 놈의 심장 깊숙이 칼날을 밀어 넣으려는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기가 파열했다.

서릿빛 파동이 퍼져나가며 검은 기운을 뿌리쳤다.

바람의 장벽. 놈의 발톱에 서린 힘이 폭사하며 나를 떨쳐냈다.

박살 난 얼음 파편 속에서 고개를 들자.

흙먼지 사이, 피투성이가 된 발을 딛고 선 백호가 보였다.

놈이 서늘한 검치를 드러내고 묵묵히 나를 노려보았다. 한쪽 눈에서 뚝뚝 핏줄기를 흘리며.

“......”

그래.

나는 전투의 종막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지속된 전투의 상흔으로 팔다리가 너덜거린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친다.

호흡을 내뱉자 피가 남실거렸다.

팽배했던 검은 기운은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잠시 후면 강대한 힘을 사용한 반동이 찾아온다.

내게 남은 건 오롯이 전투의 말미를 장식할 마지막 일격.

­콰득...!!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떨리는 몸을 채찍질했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눈두덩이로 적을 응시하고. 피고름 섞인 타액을 삼키며. 칼날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몬스터임에도 몇 번이나 내 생명을 구해주었던 늑대를 떠올렸다.

녀석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 순 없다.

생명의 불꽃을 쥐어짜낸다.

근원의 힘.

내 심장을 갉아먹어 비로소 온전해지는ㅡ

­......컹.

“...좀만 기다려. 곧 끝나니까.”

미안해 라디.

어쩌면 조금 늦을지도 몰라.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짙은 음영이 소용돌이쳤다. 빙하의 푸른 빛이 명멸하기 시작하자 창공의 밝은 광채도 숨죽여 지켜보기 시작했다. 원초적인, 생명을 연료 삼아 점화한 불꽃. 그건 몹시도 숭고하고, 장엄했다.

백호도 내 전신을 외눈에 담았다.

사냥감을 바라보던 눈길은 오래전에 저물었다. 지금 이것은 대등한 싸움. 결투. 놈도 전신을 타고 흐르는 풍압을 갈무리하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최후의 격돌.

우리는 휘몰아치는 흑백의 기운 속, 시선을 마주했고,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눈송이가 내려앉은 순간ㅡ

“하아아아아아아아!!!!!!!!!!!!!!!!”

­크르르르르르르르!!!!!!!!!!!!!!!

동굴이 터져나갔다.

*

­저벅저벅...

항량해진 공동에 공허한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검은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손에서 단도를 떨구자 날카로운 검명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푸른 빙하에 붉은 혈적을 남기며 걸어가 한 늑대 앞에 주저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이 곧 다가올 몬스터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도, 그간의 짧은 동행을 반추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서글픈 눈물을 흘리며 샛노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것도.

모두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늑대와의 유대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었으니­

­.....컹.

“그래... 나 여기 있어. 내 말 들려...?”

무너져내리는 동굴 안,

나는 녀석을 껴안았다.

­.....크응.

“미안... 널 두고 갈 순 없었어.”

늑대가 체중을 실어왔다. 여기서 계속 보고 있었던 걸까. 내가 백호와 격돌하는 모습을. 끝내 놈의 숨통을 끊으며 승리하는 모습을.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하지만, 이미 생명의 온기는 차츰 꺼져가기 시작했다.

늑대는 곧 죽는다.

녀석이 잠시 뒤면 내 곁을 영원히 떠나간다는 사실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도려내었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시야가 뿌옇게 번져나갔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내가 없었더라면 너는....”

­끄응...

차가운 혓바닥이 날 핥았다. 녀석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너른 설원을 달리고 있었을 늑대는, 끝끝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날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보같이 내 웃음을 흉내 내며 날 위로해주었다.

“.....”

나는 늑대를 끌어안았다. 무력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앞으로 조금.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며, 훗날 굉장한 친구를 사귀었노라고 지상에 전하기 위해.

나는 늑대를 끌어안았다.

그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죽여 울었다.

지금이라도 이 녀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텐데.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내할 텐데.

제발 누군가가ㅡ

“거 봐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잖아.”

[.....]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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