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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01화 (101/375)

〈 101화 〉 귀환 #1

* * *

[087] 귀환 #1

“....으윽.”

몸을 일으켰다.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해온다.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추스르자 툭, 천 쪼가리가 흘러내렸다.

재빨리 소지품을 확인했다.

“없다...”

두려움이 치밀었다.

투구도, 검도, 단검도, 심지어 속옷도 없다.

완연한 전라.

“젠장...”

우선 이 장소가 어딘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나뭇단을 걷어내자.

“여긴...”

푸른 녹음.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오른 침엽수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발치에서는 이끼 덮인 고목과 자잘한 식생이 잔뜩 돋아나 암녹색 융단을 드리웠고, 바늘같이 빼곡한 전나무 이파리 사이로 어두컴컴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

숨을 들이쉬자 침엽수림 특유의 휘발성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등 뒤, 내가 방금 나온 곳을 돌아보자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피난처가 보였다. 입구 근처에는 따스한 모닥불이 타닥 타오르며 몸을 녹여주었다.

“납치된 건 아닌가...”

비록 알몸이긴 하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두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희미하게 연고 냄새가 풍기는 걸로 보아 누군가가 돌봐준 모양. 어깨의 큰 상처에는 천 조각을 찢어 만든 붕대까지 둘려져 있다.

­휘이이잉...

“으으... 추워...”

돌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팔뚝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뼛속으로 스며드는 한기와 곳곳에서 반짝이는 적설로 보아 여전히 7계층인 건 확실한 듯한데...

“...내가 어쩌다가 이 장소에 오게 됐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몽롱하다.

심장 한구석이 허전하다.

가슴에 들이치는 찬바람 때문일까.

“난 분명...”

­달그락.

별안간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단도가 내 발치에 나타났다.

검은 칼자루를 보자 모든 게 기억났다.

“......”

늑대.

마지막까지 나를 원망하지 않았던.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었던.

친구.

“진짜 가버린 거구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녀석이 있었어야 할 옆구리로 서느란 냉기가 파고들었다.

­컹.

이맘때면 내 뼈다귀를 노리고 신경전을 펼치곤 했는데.

­컹!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며 해사하게 웃던 녀석이 그립다.

­컹...!

장난스럽게 짖어대던 그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리는 듯하다.

­크르르르!!

“.....?”

진짜로 들렸다.

“늑대야...!!!”

와락 껴안았다. 두꺼운 꼬리가 살갑게 흔들린다. 나는 경황도 없이 녀석을 부둥켜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매끈한 혓바닥이 내 뺨을 핥아주었다. 간지럽다.

­컹!

“누, 누가 울었다고 그래...!”

­크응...! 컹!

“돼, 됐거든...?! 그, 그보다 너 죽은 거 아니었어...?”

팔뚝으로 스며나오는 눈물을 북북 닦아내고 늑대를 둘러보았다. 의외로 녀석은 제법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내 기억 속의 다 죽어가던 모습에 비하면. 비록 붕대로 감싸진 옆구리에는 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한 상처가 삐져나와 있었지만, 새 살이 돋아나며 천천히 회복하는 중이었다.

­컹! 크르르르... 컹!!

“뭐...? 누군가가 구해줬다고? 잠깐...!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분명...”

“일어나셨어요?”

“....!!!”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판 위를 산들거리는 봄바람과도 같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몸은 좀 어떠...”

“꼬맹아!!!!!!!!!!!!!!!”

­와락!!!!

있는 힘껏 라디를 끌어안았다. 작고 소중한 몸을 으스러뜨릴 정도로 강렬하게. 그녀의 온기를 뇌리에 되새긴다.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도록...

붉은 후드 아래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운 차리신 것 같아서 다행...”

“보고 싶었어... 사랑해.”

“.....저도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도란님.”

우리는 한참 동안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운 체취가 내 몸에 흠뻑 배어들 무렵­.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여긴 또 어디고... 늑대는.. 분명....”

“하나씩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고 그 전에...”

녀석이 내 가슴팍에서 살짝 멀어지며 뺨을 붉혔다.

“일단 옷부터 좀 입으세요.”

아.

*

피신처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입었던 옷은 어디 가고 처음 보는 옷가지가 개어져 있었다. 가죽 재질의 의복. 기장이 꽤 짧긴 하지만 못 입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속옷은 너무 꽉 껴서 포기했다.

­바스락..

텐트를 나서자 라디는 모닥불을 들쑤시고 있었다. 새빨간 불똥이 튀어오르는 장작불에는 생소한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갔고, 늑대는 침을 줄줄 흘리며 살코기와 눈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라디가 귀를 쫑긋거리곤 손을 멈추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짙푸른 두 눈동자를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된다. 얼마나 이 광경을 꿈에 그려왔던가.

“사이즈는 맞으세요?”

“작긴 한데 입을 만해. 이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여기선 구할 수도 없을 텐데...”

“도적 사체에서 벗겨낸 거예요. 기억하시죠? 절벽 위에서 저희를 습격했던 남자요. 도란님 옷은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려서 붕대로 썼어요.”

“아...”

그 젠킨인가 자켄인가 했던 놈인가... 어쩐지 옷이 피투성이라더니...

“...그 새끼는 죽었어?”

“네, 멧돼지에게 들이받혔을 때 엄니에 안면을 꿰뚫린 모양이에요. 피 냄새가 좀 심하죠? 죄송해요. 일단 어떻게든 지워 보겠다고 노력은 해 봤는데...”

“아냐아냐, 사과할 것까진.... 그러고 보니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너 어떻게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한 거야...?

오랜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간 내 머릿속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의문. 분명 라디가 무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고된 추위에 마음이 약해질 때면 늘 걱정과 불안이 스멀스멀 뇌를 잠식했었다.

아무리 라디가 사낭 쥐 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멀쩡할 수는 없을 터. 하다못해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데도 없는 모양인데...

“아... 그건...”

라디는 잠시 뜸을 들이며 뒷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왜 저번에 던전 1층 터널에서 만났던 여자애 있죠? 유적까지 쫓아왔던.”

“여자애...? 그림자 괴물을 말하는 거야? 그 여왕?”

“여왕... 네. 그 애가 절 낭떠러지에서 구해줬어요. 여기까지 오면서 마물의 습격을 받고도 살아남았던 것도 전부 그 애 덕이고요. 덕분에 식량도 수월하게 구할 수 있었어요.”

“뭐라고...? 걔 그림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어?”

“네, 말도 하던데요?”

“그럴 수가...”

사실이라면 엄청 고마운 이야기다. 생명의 은인이라 불러 마땅한 정도니.

이제야 모든 게 납득이 갔다.

그간 이상하게 변했던 그림자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부터 정상으로 돌아온 것도, 설원에 도달하고 느꼈던 미묘한 감각도, 라디가 이곳 어딘가 살아있다고 직감했던 것도. 전부 그 녀석이 라디에게 붙어서 내게 귀띔했던 게 아닐까.

“그럼 지금도 여기 있는 거지? 그렇다면 나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일단 고맙다고 전하고 싶은데...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아... 그건....”

라디가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곁눈질하더니 이내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조금 힘들 거예요... 다친 늑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는데 기력을 다 써버려서... 실체로 현현하려면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모양이고요.”

“그래? 그렇다면 별 수 없고. 아 그래! 늑대!!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엄청난 중상이었는데...”

출혈로 의식을 잃기 전, 내가 보았던 늑대는 명백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고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을 줄줄 늘어뜨리고 있는 지금의 녀석을 보니 도무지 죽다 살아난 놈이라곤 믿을 수가 없다.

“늑대는 도적 시체에서 나온 회복 포션을 썼어요. 모험가에서 약탈한 물건을 몰래 숨겨뒀는지 수통 안에 포션이 들어있더라고요. 덕분에 추락에도 멀쩡할 수 있었지만... 워낙 비싼 물건이라 사용하길 주저했는데 도란님의 반응을 보니 쓰길 잘한 것 같네요.

“....잘했어.. 고마워... 정말로...”

괜스레 또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나무를 응시하는 척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보지만, 라디는 다 눈치챘는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봐왔다.

“이전에 얼음 호수에서 이 애가 도란님을 구하는 장면을 봤었거든요. 얼마나 영리한지... 이 고기도 녀석이 사냥해 온 거예요.”

라디가 늑대를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그새 제법 친해졌는지 늑대는 얌전히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광경.

잠깐.

“호수...? 그렇다면 그토록 끈질기게 쫓아오던 추격자가...”

­.....컹.

내가 늑대를 빤히 쳐다보자 녀석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럼 그동안의 노력은 대체 다 뭐였냐고...”

허탈감이 몰려들었다. 그간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는데, 그게 다름이 아니라 라디였을 줄이야. 늑대가 두 명이라고 했던 건, 그 옆에 붙어있던 여왕을 감지하고 말한 거겠지.

허망하게 입가를 늘어뜨리며 놈을 바라보고 있자니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란님이 얼음 호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온 힘을 다해서 외쳤는데, 어찌나 급하던지 들을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오랜만에 봐서 엄청 반갑기도 하고, 늑대랑 엎치락거리며 네 발로 달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근데 그러다가 갑자기 얼음 아래로 푹 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

뭐, 그땐 당장 도망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도중에 빠질 걸 알면서도 알몸으로 살얼음 덮인 호수를 건널 정도로.

...알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그건...! 그.. 어쩔 수 없잖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저번에 저한테 하신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런 짓까지 해놓고선... 게다가 도란님이 기절해 있던 동안 간호까지 제가 직접 다 했다고요.”

내가 깨어났을 땐 온몸이 말끔해져 있었다. 전투의 상흔도, 피와 오물도. 그 말은...

“....여전하시던데요?”

“...!!!”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자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컹! 컹컹!!

늑대도 분위기를 읽고 얄궂게 짖어댔다.

수치심이 치밀어오른다.

아무리 볼 장 다 본 사이라고 할지라도 치부는 있는 법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이곳저곳 확인했을 라디를 생각하자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이 치욕은 반드시 조만간 배로 되갚아주고 마리라.

각오를 다지고 한숨을 내쉬며 나뭇단에 등을 기댔다. 한데, 빤히 늑대를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위화감이 치밀었다.

“어...? 그런데...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분명 내 기억으론 대형견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한 뼘 정도 더 커 보인다. 검은 털가죽에선 전에 없던 윤기마저 흘렀다.

라디가 대신 대답했다.

“아, 그건 아마 스노우 타이거 고기를 먹어서 그런 걸 거예요. 포션도 아예 만능은 아니라 잃어버린 혈액을 재생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리거든요. 혹시나 해서 심장을 던져줬더니 먹고 금세 회복하더라고요. 아마 몬스터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스노우 타이거...? 아, 그 백호 마물... 그놈은 어떻게 됐어? 숨통을 끊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마지막엔 워낙 겨를이 없었다. 늑대에 대한 걱정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기도 했고, 나 역시 출혈 때문에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음... 직접 보실래요?”

잠시 후,

라디의 손길에 이끌려 침엽수림을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널따란 원형 공간에는 습기를 머금은 이끼 대신 자그마한 들풀과 잔디가 돋아있었다. 나무들이 슬며시 빗겨 난 하늘에서는 황금빛 햇살이 기울어졌고, 그 중심을 올려다보자...

“...도란님이 자랑스러워요.”

“아...”

거대한 호랑이 모피가 드넓게 펼쳐진 채 아름답게 반짝였다.

햇빛을 반사해 놀라운 금빛으로 빛나는 털가죽. 강인한 백호의 회복력 덕분인지 긁힌 자국 하나 없이 온전하다. 흰 바탕 위에 오밀조밀하게 아로새겨진 검은 줄무늬를 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성취감이 들끓었다.

“...내가 정말 이런 놈을 잡았구나.”

아니, 늑대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다.

­컹!

늑대를 격하게 쓰다듬어주자 녀석이 내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도란님, 이건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일단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말리고 있긴 한데...”

라디가 맞잡은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물어왔다.

“당연히 가져가야지, 왜?”

“돌아가고 나면 어떻게 처분하실 거예요?”

“돌아가면...?”

“네, 스노우 타이거의 소재는 전부 비싸게 팔리거든요. 이 근방에선 워낙 희소하기도 하고 막강해서 어중간한 모험가들은 사냥할 꿈도 못 꾸는 몬스터에요. 개체에 따라서는 B랭크 상위부터 A랭크 하위까지도 분류되는 녀석이니... 이빨이랑 발톱도 갈무리했으니 내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음... 그러면 이빨이랑 발톱만 매각하는 걸로 하자.”

“네, 그럼 털가죽은요?”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올려다봤다. 나는 짐짓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털가죽은 우리가 쓸 거야. ...침대보로.”

“.....”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네.”

내 욕망을 읽은 라디가 뺨을 붉히며 수줍게 대답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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