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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02화 (102/375)

〈 102화 〉 귀환 #2

* * *

[102] 귀환 #2

어느새 빛이 저물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맞잡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숲을 거닐었다. 울창한 침엽수 사이를 걷다 보니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다.

“.....”

추위에 살짝 상기된 콧망울. 어슴푸레한 조명이 가려한 옆얼굴에 기울었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이끼들은 밤이 되자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벚꽃색 입술이 벌어지며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왜요?”

“그냥... 예뻐서.”

“.....”

라디가 말없이 깍지를 꼈다. 초저녁 샛별처럼 서늘한 별빛이 잔잔하게 깔린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뺨에 난 문양만은 선연했다.

이어 자그마한 발뒤꿈치가 살포시 들리더니,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고 가라앉았다.

살짝 젖어 눈물이 아른거리기 시작한 눈망울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사실... 두려웠어요.”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다들 무사할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는 도란님을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한밤의 숲은 묘한 마력이 있다.

밤이 되고 재회의 기쁨이 여운으로 변모하자, 라디는 그간 내게 전하지 못했던 말을 토해냈다.

“그때, 도란님이 이곳으로 뛰어내렸다는 말을 전해 듣고 솔직히 기뻤어요. 나를 구하러 와줬구나. 그만큼 사랑받고 있었구나... 그리고 동시에 너무 슬프고 화났어요. 도란님을 이런 곳에 말려들게 했다는 게, 그 소식을 듣고 순수하게 기뻐했던 제 모습에.”

사파이어를 빼다 박은 듯 푸른 색채가 일렁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나는 말려든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이 장소까지 온 거니까.

이제 라디가 없는 삶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니 이건 전부 나를 위한 것.

내 마음과 육신 모두 눈앞의 이 여자를 위해 쓰기로 다짐했다.

애정을 담아 라디를 마주하자 물기 어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살며시 체중을 기대자 온기가 전해져왔다.

새의 깃털을 닮은 속눈썹이 천천히 감기고, 가까워지던 찰나ㅡ

­컹!

“.....”

­컹! 컹!!

“이 자식이... 뭐가 문제야 대체.”

늑대가 훼방을 놓았다. 녀석이 잡아끄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다 꺼져가는 잔불이 보였다. 벌써 캠프에 도착한 모양.

“그래 알았어.”

하는 수 없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땔감을 더 집어넣었다. 머잖아 불씨가 다시 살아나며 따뜻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깊은 야밤의 산속, 야트막한 오두막 앞에 앉아 적적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고 있자니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피어났다.

­컹!

“옳지 옳지... 착하다...”

제 덩치보다도 큰 늑대를 쓰다듬는 라디를 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한다.

숲에서 구한 허브로 차를 만들어 마시며 아늑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못다 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야? 7계층은 맞는 것 같은데... 그걸 안 물어봤네.”

라디가 늑대에게서 눈을 떼며 대답했다.

“얼음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요. 그 위가 바로 이 산림이었거든요. 다행히 이곳에는 강한 마물도 별로 안 나오는 모양이고... 기억 안 나시죠?”

“그야 계속 잠들어 있었으니...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꼬박 사흘이요.”

“...오래도 잤네.. 고마워.”

“천만에요. 덕분에 재밌는 구경도 한 걸요?”

“.....”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떨어졌다는 건 그 여자애...? 한테 들어서 그렇다고는 쳐도 정확한 위치까지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가뜩이나 미로처럼 복잡한 동굴에 있어서 찾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중간중간 사슴 내장을 써서 냄새를 교란하기도 했었고.”

“아, 그건 이거 덕분이에요.”

라디가 로브 안쪽을 뒤지더니 수납 공간에서 낡은 나침반 하나를 꺼내들었다.

“도적의 품에서 나온 아티팩트에요. 겉보기에는 평범한 나침반처럼 보이지만 특이하게도 방위가 아니라 소유주가 가장 원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모양이더라고요. 물론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을 향하거나 대상과 멀리 떨어지면 빙글빙글 도는 둥 제약도 크지만...”

“무슨 그런 얼토당치도 않은 물건이... 그러면 그 도적이 우리의 앞길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네, 아마 이 아티팩트 덕분일 거예요. 일개 도적이 처음부터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고, 아마 저희와 만나기 직전에 귀족 자제의 파티를 턴 게 아닐까 싶은데... 수통 안에 들어가 있던 포션도 포함해서요.”

“이걸 달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원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라...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물건을 예전에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해적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였는데 굉장히 인상 깊게 봤었지.

“...그럼 이걸로 출구의 위치도 알 수 있어?”

“안타깝지만... 도란님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한 번 떨어뜨렸는데 그다음부턴 작동을 안 해요. 충격에 망가진 건지 내부에 담긴 마력이 전부 소진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도시의 감정사한테 감별을 맡겨 봐야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쉽게는 나갈 수 없다는 건가...”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다. 라디와 성공적으로 합류했으니 시간에 쪼들릴 이유가 하나 줄었다. 이곳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하다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충분한 정비를 마치고 식량을 확보한 뒤에 움직이는 편이 현명하겠지.

백호에게 입은 상처도 회복해야 하고.

여전히 욱신거리는 어깨를 매만지고 있자니 라디가 불안한 눈동자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도란님께 하나 물어볼 게...”

“응? 뭔데?”

“....말톤님이요. 말톤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도란님이 이곳에 혼자 왔다는 건 설마...”

“아, 그건 걱정 마. 잘 있으니까. 듣자 하니 가호를 받았다던데? 나 참... 그런 게 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오기 전에 회복하는 모습을 보고 왔으니까 지금쯤이면 꽤 호전됐을 거야.”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그동안 많이 염려했었는데.... 도란님이 먼저 말을 안 꺼내셔서 잘못된 줄 알고 걱정했어요..”

“미안, 워낙 겨를이 없다 보니.”

라디는 그제야 어깨를 느슨하게 풀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알쏭달쏭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말톤님이 가호 소유자였다니... 대체 어떤 신님에게 받았을까요? 유스타니아? 아니, 엘프면 세계수일 가능성도...”

“아 맞아, 나도 그게 궁금했어. 물어보고 싶긴 했는데 썩 달가워하던 눈치는 아니더라고. 일단 나중에 말해 준다고는 했는데...”

“으음...”

라디가 입가를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도 등을 제치며 모닥불을 응시했다. 늑대는 왜 우리를 따라해서 턱을 괴는지 모르겠지만.

허나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 리도 만무, 나는 아까 먹다 남은 뼈다귀를 늑대에게 던져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는 어떡할 생각이야? 계획해 둔 거라도 있어?”

라디가 곧바로 대답했다.

“일단 도란님이 완전히 회복하실 때까지는 이 숲에서 머무를 예정이에요. 겸사겸사 스노우 타이거의 가죽도 말리고요. 이 층에서 여기만큼 식량이 풍부하고 안전한 장소도 드물 테니까요.”

“음... 그래...? 그럼 그 다음은?”

“이후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해요. 곳곳에 흑요석이 널려 있으니 화산 지대가 있을 테고, 그곳에 다른 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잘 됐으면 좋겠네.”

화산 지대까지 도달하면 이 추위도 한풀 꺾이지 않을까?

밤새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큼지막한 통나무를 던져넣고 슬슬 잘 준비를 하던 도중, 묘한 기척에 불현듯 고개를 들자 우물쭈물하는 라디가 보였다. 로브 끝자락을 불안하게 말아쥐는 거로 보아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왜?”

“으.. 그게...”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도, 도란님...! 혹시 배고프진 않으세요..?”

“....?”

갑자기?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그래?”

“그... 스노우 타이거의 고기를 훈제시켜 둔 게 남았거든요. 아까 먹은 게 모자란다면 조금 어떨까 해서요...”

“그럼 그냥 그렇게 물으면 되지... 혹시 이상한 거라도 섞었어? 마약 버섯이라던가...”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라디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수상한데... 그래 그럼 한번 먹어나 보자. 안 그래도 어떤 맛일지 궁금했거든. 어딨어?”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녀석이 피신처 너머로 총총 걸어가더니 줄에 꿴 고기를 대롱대롱 흔들며 다가왔다.

라디는 그중에서 살코기 몇 점을 떼내어 늑대에게 던져주고는, 나머지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내게 들이밀었다.

“아 해 보세요.”

“...안 부끄러워?”

“군말 말고 자, 아.”

라디의 검지에 실린 고기를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씹기 시작하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활동성이 강한 몬스터라 누린내가 심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천천히 고기를 음미하자 풍부한 향과 함께 감칠맛이 퍼져나왔다.

동굴에서 먹었던 토끼 고기보다도 맛있는데...?

“오, 괜찮은데? 진짜 맛있어.”

“그렇죠?”

상당히 식었는데도 이 정도. 강한 마물일수록 맛있는 게 아닐까 하던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체내의 마나가 맛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라디의 태도로 보아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 이 고기가 왜?”

“저기... 혹시 몸에 무슨 변화는 없으세요? 불끈불끈 힘이 솟는다거나... 날개 같은 게 돋아날 기미가 느껴진다던가...”

“내가 무슨 몬스터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래요? 흠...”

라디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내 몸을 살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기도 하고, 상의를 들춰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내 바지춤을 잡고 끌어내리길래 재빨리 손목을 붙잡았다.

“대체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이 정도로는 모자란가... 아, 그냥 별 건 아니고... 그러니까 그... 아! 강한 마물이 몸에도 좋다고들 그러잖아요.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본 거예요. 앞으로도 무슨 변화가 생기면 저한테 꼭 말해 주셔야 해요? 정말 사소한 것도요!”

“그, 그래...”

얼떨결에 대답했다. 녀석의 눈동자에 감도는 묘한 이채를 보자 분위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자가 말을 했다고 그랬지.

그녀와 나눈 대화 중 뭔가 신경 쓰이는 내용이 있었던 걸까?

조금 석연치 않긴 하지만 나중에 천천히 물어도 될 일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슬슬 자자.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지.”

“네, 식량을 충분히 비축해두려면 부지런히 활동해야 해요. 스노우 타이거의 고기가 아직 꽤 남았긴 하지만, 너무 부피가 커서 전부 다 가져올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 늑대가 먹어대는 양도 상당하니까... 그나저나 너는 어디서 자냐?”

­컹?

숯으로 양치질을 마치고 피신처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늑대가 눈에 밟혔다.

숙소의 크기는 성인 두 명이 간신히 드러누울 수 있을 정도. 녀석이 들어갈 만한 자리는 없다.

지금이라도 공간을 더 넓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도중, 라디가 어이없다는 듯이 읊조렸다.

“늑대는 당연히 밖에서 자야죠.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얘는 개가 아니라 엄연한 몬스터라고요. 이 정도 추위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컹! 컹컹!!

....글쎄다.

라디가 쓰다듬어주니 좋다구나 배를 까보이며 드러눕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시골 강아지인데...

“왜요? 아쉬워요?”

“...조금.”

당연히 같이 잘 거라 생각했다. 녀석을 껴안고 자면 엄청나게 따뜻하거든. 개과 동물의 체온은 인간보다 높은지라, 후끈후끈한 초대형 핫팩을 끌어안고 자는 기분이었다.

늑대와 같이 못 잔다는 게 유감이지만...

“대신 절 껴안고 자면 되잖아요.”

“아.”

고 생각을 못 했네.

뾰로통하게 부푼 볼살을 보자 참을 수 없었다.

“꺅...!”

­컹!! 컹 컹!!!

“시꺼. 넌 망이나 잘 봐.”

­컹...! 크르르르!!!

라디를 들어안은 채로 나뭇단을 밀어냈다. 그대로 피신처 안으로 들어와 푹신한 모피 위에 녀석을 내려놓자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직 도란님 몸도 다 안 나았으니 무리는...”

“걱정 마. 꼬리만 만질게.”

“자, 잠깐 그건... 으냑..?!”

꼬리 밑동을 살살 쓸어올리자 내 팔뚝을 부여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곧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내 흑발을 쓸어주었다.

밖에서는 늑대가 질투라도 하는지 고개를 들이밀고 입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조차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계에 떨어지고 2년.

이 온기가 그리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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