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귀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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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귀환 #3
생존 9일째.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달콤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정신적 충족감이 수면의 질에 영향을 끼친 걸까. 흑발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만끽하자니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들었다.
비몽사몽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늑대는 항상 핥아서 깨워줬는데.”
“해드릴까요...?”
“히이익...!”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내리자 라디가 바지춤에 손을 뻗은 채 입꼬리를 세우고 있었다.
“나, 남사스럽게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자기가 먼저 말 꺼냈으면서... 그냥 장난 좀 친 거예요. 잠 깼으면 일어나세요.”
라디가 내 뺨을 짓궂게 꼬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입구에 놓인 칸막이를 치우자 어슴푸레한 서광이 드리운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두르고 선 그녀의 모습에 살짝 설렌 건 비밀이다.
피신처에서 나오자 반갑게 주둥이를 비벼오는 늑대를 한껏 쓰다듬으며 물었다.
“...바로 사냥부터 나설 생각이야?”
“바로는 아니고 일단 배를 채운 다음에 움직일 거예요. 도란님은 다쳤으니 든든하게 먹어줘야 해요.”
“...그냥 같이 누워 있으면 안 돼?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시간만이라도.”
“그러면 도란님은 여기서 잠시 쉬고 있을래요? 저랑 늑대가 둘이서 다녀올 테니까...”
“그건 안 되지. 금방 준비할게.”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라디가 맑은 눈웃음을 자아냈다. 이런 여자에게 사랑받다니, 나는 정말 복 받은 놈이다.
라디는 피신처 뒤에서 고기를 주렁주렁 들고오더니 모닥불에 늘여놓고 데우기 시작했다.
한데, 허전한 손목을 보고 있자니 문뜩 떠오르는 물건이 있었다.
“아, 꼬맹아. 그러고 보니 내 배낭은 어디 있어?”
“배낭? 아, 저 나무 아래에 기대놨어요.”
“그래?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줄래?”
“....?”
의아하게 쳐다보는 라디를 뒤로하고 침엽수 근처로 다가가자 눈에 젖지 않게 나뭇단으로 덮어둔 배낭이 보였다.
나는 그 안에 깊숙이 손을 넣어 한 물체를 꺼내들었다. 구멍 뚫린 방수포를 걷어내자 정교한 기계장치가 은빛 광채를 발한다.
크로스보우.
모닥불로 되돌아와 그간 애타게 기다려왔을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필요할 거 같아서 가져왔어. 어때, 마음에 들어?”
“도란님...”
라디가 왈칵 안겨들었다. 내 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행복하게 웃는 그녀를 보니 그간의 고생이 보답받는 듯했다.
컹! 컹!!
“그래 너도.”
이렇게 다시 웃게 된 게 얼마 만일까.
*
“그럼... 늑돌아, 사냥감이 보이면 알려줘. 알겠지?”
컹!
늑대를 이끌고 사냥을 나섰다.
이 근방에는 강력한 마물이 없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물론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되겠지만, 발걸음이 경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산책을 나서는 기분으로 침엽수 아래를 거닐며 읊조렸다.
“...야, 늑대야. 근데 너도 이제 무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냐? 나랑 라디도 재회하는 데 성공했는데.”
끼잉... 킁!
“하기야... 이렇게 광활한 설원에선 다시 만나기도 어렵겠네... 게다가 늑대는 활동 반경도 넓어서 찾기도 막막하고...”
....컹.
녀석이 의기소침하게 축 늘어졌다. 섣불리 동료들을 찾겠다고 나섰다간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마음대로 떠나가지도 못할 터.
내가 라디를 그리워했듯 녀석도 빨리 가족을 찾아갔으면 좋겠지만,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기분도 든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늑대를 어루만져주다 보니 난처하게 뺨을 긁는 라디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아니 그야... 어제도 보긴 했지만... 묘하게 말이 통하네요..?”
“뭘 새삼스럽게... 너도 얘랑 대화 정도는 하잖아. 그래서 내가 기절한 동안 같이 사냥도 다니고 상처도 치료해주고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저는 손짓 발짓으로 간단한 의사소통만 주고받았을 뿐이에요. 도란님이 늑돌이와 먼저 친해진 다음이 아니었더라면 기력을 되찾자마자 물어뜯으려 했었을걸요?”
“그래?”
“네, 포션을 발라줄 때도 굉장히 긴장했었어요. 갑자기 절 공격하면 안 되니 끈으로 팔다리를 묶고 로브로 머리를 덮었었거든요. 그래도 적의를 드러내면 어쩔 수 없이 숨통을 끊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얌전히 있어준 덕에...”
“대견하네...”
컹!!
지금의 녀석이 우리를 헤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지만, 처음 맞닥뜨렸을 때 목도했던 샛노란 살기를 떠올리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난처하게 쓴웃음을 짓자 라디가 늑대를 쓰다듬으며 물어왔다.
“이런 몬스터를 어떻게 길들인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 그건 말이지...”
늑대와 함께하며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라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힐난하듯이 흘겨봤다.
“정말... 도란님을 보고 있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것 같아요. 혹시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걸로도 모자라서....”
“뭐 어쨌든 잘 됐잖아, 덕분에 이렇게 네 얼굴도 볼 수 있고.”
“...이리 와요.”
라디가 다정하게 내 손을 맞잡았다. 열기 어린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맥동에 그녀의 마음이 여실하게 전해져왔다. 어느새 우리 둘의 입꼬리에 포근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천천히 발걸음이 겹쳐져 갔다.
컹! 컹컹!!
그렇게 라디와 깍지를 낀 채 깊은 숲속을 거닐다 도중, 이전부터 궁금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근데 얘는 어떤 마물이야? 평범한 늑대는 아닌 거 같은데...”
“그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네.”
담백한 대답. 라디가 알지 못하는 몬스터가 존재했을 줄이야. 언제나 명료한 답변을 내놓았던 그녀인지라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모르는 몬스터도 있었어?”
“실례네요... 저도 뭐든 다 아는 건 아니라고요. 음... 그나마 짐작 가는 마물이라고 하면... 네눈박이 늑대라고 불리는 종류가 있거든요? 얘처럼 눈이 네 개인 게 특징인데 문제는 털 색깔이 달라요. 네눈박이 늑대는 보통 잿빛이거나 은빛이 감도는 백색인데 얘는 완전 시꺼멓잖아요.”
“아, 그럼 맞을 거야. 얘 동료들은 전부 회색이었으니까. 아마 이 녀석만 좀 특별한 게 아닐까 싶은데... 돌연변이나 격세유전 같은 게 아닐까?”
“그래요...?”
라디가 수긍하며 늑대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잠시 후, 턱을 짚은 채 아리송하게 고개를 기웃거렸다.
“왜?”
“아니 그게... 조금 신기해서요. 네눈박이 늑대는 엄청 지능이 높고 포악하기로 유명해요. 게다가 워낙 희소해서 신비에 쌓인 종족이거든요. 도란님은 몬스터 진화론에 대해서 들어봤어요?”
“몬스터 진화론? 고블린이 나이를 먹으면 홉고블린으로 진화하고 거기서 더 성장하면 샤먼이나 리더 같은 걸로 변한다는 그거?”
“네, 맞아요. 애벌레가 우화해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네눈박이 늑대도 완성체가 되면 유체 시절과는 꽤 다른 모습이 될 거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뒷받침하는 근거도 제법 있고요. 개체 수가 너무 적다 보니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건 아니지만...”
“...신기하네. 근데 그러면 얘는 백호의 심장을 먹었으니까 나중에 엄청나게 세지는 거 아냐?”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라디가 진지한 눈빛으로 늑대를 응시했다. 나도 녀석을 조금 다시 봤다. 이 팔푼이가 그렇게나 귀한 몸이었다니... 혓바닥을 내밀고 태평하게 헉헉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영 매가리가 없는데...
...사실 이 녀석의 정체는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눈 두 개 더 달린 개가 아닐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사냥감이 나올...”
크응!
입을 열기가 무섭게 늑대가 앞발로 내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전방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
기척을 줄이고 살금살금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덤불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다갈색 음영을 발견했다. 풀잎 위로 언뜻언뜻 비치는 뿔로 보아 사슴인 모양.
“제가 처치할까요?”
라디가 석궁을 들어올렸지만, 살며시 깨문 입술은 그녀가 자신이 없다는 걸 대변해주었다. 볼트에 바를 독이 없는 지금으로선 큰 살상력을 기대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내리며 속삭였다.
“...아냐 내가 할게.”
“네...? 하지만 도란님은 원거리에서 공격할 만한 수단이...”
“괜찮아.”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늑대야, 혹시 모르니까 뛸 준비 하고 있어.”
...컹!
콰드드득!!
도약.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뛰쳐나갔다. 미끄러운 이끼로 덮인 지면 위를 질주했다. 기다란 목이 화들짝 올라오며 이변을 감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와라!!!”
손아귀에서 검은 아자랑이가 솟구친다. 일렁이는 가닥들은 점점 형상을 갖추었고, 새카만 단도가 되어 나타났다.
사슴이 사태를 파악하고 도주를 꾀하자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졌으나
슈화아아아악!!!
내가 단도를 투척하자 검은 궤적이 매서운 속도로 육박했고, 튼실한 뒷다리에 빨려 들어가듯 적중했다.
“좋았어!!!”
주변에 다른 적이 없는 걸 확인하며 다가갔다. 사슴은 고통스럽게 울부짖다가도 내가 점점 가까워지자 쩔뚝거리며 일어서 뿔을 치들었다. 저 날카롭게 도려내진 끄트머리에 적중하면 변변찮은 방어구 하나 없는 나는 치명상을 면치 못하겠지.
하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키이잉...
내가 오른손을 치켜들자 사슴의 허벅지에 박힌 단도가 되돌아왔다. 날붙이에 틀어막혔던 피가 팍 터져나오자 녀석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놈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이 쓰러진 고목을 뛰어넘으며 강습했고, 놈 또한 내가 지척에 다다르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꿰에에에엑!!!!
제법 날카로운 기습. 창날처럼 날카로운 뿔이 내게 치달아온다. 허나
콰지직...!
감속. 지면을 즈려밟으며 제동했다. 잔가지를 부수고 이끼를 쓸어내며 선회한다. 기세를 살려 디딤발에 회전을 가해 놈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
“안녕?”
놈이 당황하며 내 기척을 쫓았으나 검은 이미 휘둘러졌다. 검은 도신이 사슴의 목덜미를 절삭하자 녀석은 짧은 단말마 이후 허물어진다.
맥없이 바닥에 쓰러진 사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쉽네...”
최근에 강적들만 상대해서 그런지 이 정도쯤은 가뿐하다. 이 숲에는 자잘한 마물이 주류라는 게 사실인 모양.
능숙한 손놀림으로 사슴을 나무에 걸쳐 피를 빼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라디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왜?”
“아, 아니 그야... 도란님.. 강해지셨네요...”
“그렇지?”
던전에 들어오고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 나조차도 성장한 게 체감될 정도다. 여러 고초를 겪으며 다양한 환경에서 전투를 벌인 게 유효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스노우 타이거와의 격전에서 승리한 게 크나큰 자신감을 주었으니.
지금이라면 코볼트 킹과 맞붙어도 쉽게 이기지 않을까?
올라가는 입꼬리를 추스르며 사슴을 갈무리하자 라디도 소매를 걷고 거들었다.
녀석이 내가 해체해 낸 고기를 운반하기 쉽도록 토막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도란님이 모험가가 되신 게 언제부터라고 하셨죠?”
“나? 이제 막 반년 좀 됐을걸.”
“고작 반년 만에 이 정도라니...”
“그래봤자 밑바닥 F랭크 신세지만.”
자조하며 웃었다.
생각해보니 내 모험가 등급은 아직 F급에 불과했다. 베라스틴으로 돌아가면 모험가 랭크 갱신부터 해야지. 카렌이 언질해 둔 게 있으니 이번엔 분명 승급할 수 있을 거다.
‘E랭크라...’
모험가의 등급은 곧 신용과 직결한다. 그에 따라 주어지는 여러 혜택은 덤. 소재를 팔 때도 수수료를 상당수 감면받을 수 있고, 주택을 구매하거나 융자를 받는 데도 편리하다.
빗물 새는 허름한 여인숙과 차가운 길바닥에서 노숙해온 지도 오래, 평범한 식탁에서 따뜻한 아침 식사를 맞이하는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유적에서 구한 술을 포함해 스노우 타이거 소재를 팔면 작은 주택을 장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나는 고기를 손질하던 단검을 살포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꼬맹아, 우리 던전에서 나가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관에 틀어박혀 있을까? 한 일주일 정도 쉬다 나오는 거야. 어때?”
“.....”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디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오밀조밀한 손가락을 놀리던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내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뭐... 그야 저도... 피로를 풀긴 해야 할 테니까요. 던전에서 나가면 당분간 또 바빠질 테고... 노숙하는 것도 질렸고... 또...”
라디가 꿋꿋이 정면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짐짓 태연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꼼지락거리는 두 손과 붉게 달아오른 뺨으로 보아 내 질문에 담긴 속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애써 대답을 회피하는 녀석을 보자 장난기가 솟구쳤다.
일부러 짓궂은 어조로 속삭였다.
“그때가 되면 우리 꼬맹이는 매일 밤낮으로 괴롭힘당할 텐데? 지금까지 상상도 못 해본 체위...”
텁!
라디가 소맷자락으로 내 입을 덮었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은 더 이상 뺨에 난 문양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푹 숙인 고개 탓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 봐도 뻔하다.
그 와중에 내게 피가 묻을까 배려해 손바닥이 아니라 소매를 쓴 것도 사랑스럽고.
“왜, 너도 좋잖아.”
“...시끄러워요.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나 하세요. ....던전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국물도 없을 줄 아세요.”
“정말? 국물도 안 줄 거야?”
“으흣...?!”
불시에 허리를 간지럽히자 녀석이 꼬리를 쭈뼛 세우며 주저앉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로브가 피로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
새빨간 얼굴에 대비되어 푸른 눈동자가 강렬한 색채를 머금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난 그냥 요리 얘기한 건데. 그러고 보니 너 예전에 생선구이 먹을 때 언젠가 요리해주기로 약속하지 않았어?”
“그, 그건 안 잊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뭐 난 다른 쪽 요리도 언제나 환영하지만.”
“....!!”
깨끗한 손으로 은근슬쩍 허벅지를 매만지자 라디의 얼굴이 더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쉴 새 없이 쫑긋거리는 귀로 보아 적잖이 긴장한 모양. 지난번 꼬리를 만졌을 때 일을 떠올린 걸까.
“걱정 마. 내가 언제 무리시킨 적 있냐.”
“저, 저저 저번에 제가 기절할 때까지 해 놓고선 그런 말하기에요?!!”
“...그건 네가 너무 민감해서 그런 거고. 그래서 결국 마지막까지 넣...”
“아!! 알겠으니까 그만 좀!!!”
라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황급히 두리번거리는 게 녀석답다. 볼살이라도 꼬집어 주고 싶지만, 손이 더러우니 참아야지.
“으... 내가 어쩌다 이런 남자한테...”
“그래서 싫어?”
“.....싫다고는 안 했어요.”
라디가 새침하게 읊조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슴 손질을 마치자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다. 풀밭 위에 쪼그리고 앉아 늑대에게 내장을 건네주며 배시시 미소짓는 녀석을 보자 따스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
별안간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라디가 눈을 빛내며 내게 손짓해왔다.
“....도란님 잠깐 이리로 와 보실래요?”
그녀가 붉은 검지를 들어올려 내 뺨에 장난스럽게 그으며 말했다.
“이걸로 이제 저랑 같네요.”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넘어뜨렸다.
뺨에 맞닿는 하얀 숨결과 요란스러운 늑대 덕에 외로울 날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