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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04화 (104/375)

〈 104화 〉 귀환 #4

* * *

[104] 귀환 #4

또 한 번 날이 저물었다.

휘황한 던전의 조명이 지고 난 뒤의 침엽수림은 신비로운 남색으로 물들었다.

나와 라디는 고적하게 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발목까지 쌓인 솔잎이 복사뼈를 간질인다. 송엽이 짓눌리며 피어나는 상명한 향이 콧등을 맴돌았고, 이따금씩 솔방울이라도 밟을 때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적막 가득한 이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박...

“.....”

밤이 되자 산짐승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던 노루는 커다란 바위 아래 몸을 움츠렸고, 쫄막거리며 고개를 치들던 다람쥐는 나무 둥치의 구멍으로 파고들었다. 자그마한 땅굴에서는 새까만 딱정벌레가 등딱지를 반짝였다.

황혼의 중심에서 잔잔하게 방양하는 우리는 필시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리라.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요...”

“그러게...”

낯이 하루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장소.

라디가 발을 멈추었다. 높게 솟은 나무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자 투명한 눈망울에 밤하늘이 담겼다.

별똥별이라도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며 창공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물결이 일렁거렸다.

“...아쉽게도 오늘 수확은 아까 사슴이 마지막이었네.”

“그래도 숲에서 노간주나무 열매랑 박하잎을 구해서 다행이에요. 이 정도면 당장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늑대만 없다면 말이지... 쟤 엄청 먹어대잖아. 아까도 몰래 집어먹으려다가 걸렸고.”

­컹?

“한창 성장기잖아요. 먹은 만큼 밥값도 톡톡히 하고요. 어제도 저희를 대신해서 밤새 경계를 서줬으니 그 정도쯤은 어쩔 수 없죠.”

­컹컹!!

“아니 뭐 탓하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내가 늑대를 흘겨보자 녀석이 항의하듯 요란하게 짖어댔다. 쓸모는 있지만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게 문제. 욕심도 상당해서 잠시 자리만 비웠다 하면 고기를 훔쳐먹다 걸리곤 했다.

그래도 도통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지만.

­컹!!! 크르르르...! 컹컹!!!

“알았어, 사과할 테니까 진정해.”

장난스럽게 늑대의 코를 튕겼다. 담소를 나누며 야영지로 되돌아온 뒤에는 숙소 보강에 착수했다.

이대로 노곤하게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조금 있으면 쏟아지겠네.”

날씨가 심상치 않다.

천장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게 뻗은 하늘. 흐릿한 저 너머로부터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오늘 밤엔 폭설이 쏟아질 터, 눈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피난처를 보완해야 한다.

단도로 자른 나무줄기를 조속히 긁어모은 뒤, 피신처 위에 덧대는 작업을 반복하자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이 송골송골 배어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까먹고 있었네. 우리 모피는 어떡하지?”

“모피요?”

“호랑이 가죽 말이야.”

“아, 스노우 타이거... 그러게요, 눈이 내리기 전에 거두어들여야 할 텐데...”

“더 늦기 전에 가져오자. 내가 빨리 갔다 올게.”

“네, 그럼 저는 마저 보수하고 있을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모닥불을 뒤로하고 캠프 밖으로 걸어나왔다. 푸르릉거리는 늑대의 재채기와 두런거리는 라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하늘을 올려다본다. 빼곡하게 돋아난 침엽수 사이로는 끝없이 늘어선 별의 행렬이 아름답게 지상을 비추었다.

“...예쁘네.”

저 광채의 정체가 이끼에서 비롯된 화학 작용이라는 건 알지만, 던전 안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가끔 진짜 하늘로 착각하곤 한다.

찬란한 별빛에 휩싸여 상공을 응시하던 도중, 소리소문없이 몰려든 먹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워 나는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완전히 어둡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조명을 내뿜는 건 비단 이끼뿐만이 아니다. 한낮의 지열이 가시자 곳곳에 자라난 야생초에서 푸른 빛이 간헐적으로 반짝였다. 은하수 빼곡한 우주에서 유영하는 비행사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다분히 몽환적이지만, 그래서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걸 실감해 가끔은 쓸쓸해지기도 한다.

­저벅저벅..

조금 울적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눅눅한 공기가 코를 맴돌았다. 비가 오기 전, 습윤한 기운을 머금은 숲의 냄새. 침엽수의 잔향과 뒤섞인 오묘한 향취. 작은 설치류들이 남긴 상흔에서는 나무 수액이 빛을 반사해 보석처럼 빛났다.

“...도착했다.”

작은 가시덤불을 지나쳐 공터에 도달하자, 백호의 모피는 야음 속에서도 고고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묶어 둔 넝쿨을 풀러 털가죽을 끌어내리자 의외로 가벼운 중량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당장 써도 되겠는데...?”

생각보다 빨리 건조돼서 다행이다. 아직 습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다.

본디 동물 가죽을 실생활에 쓰려면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특유의 마력 때문인지 썩지 않았다. 나머지는 던전에서 나간 뒤 제혁소에 맡겨도 충분할 거다.

그렇게 내 덩치보다 훨씬 큰 털가죽을 등에 메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부스럭..

공터에서 조금 떨어진 덤불 속,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늑대 너야?”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며 다가서려는 찰나­

“윽...?!”

­오싹.

즉각 가죽을 내팽개치고 단도를 뽑아들었다.

서늘한 네 개의 동공. 하지만 동글동글하고 애교스럽던 늑대의 눈과는 다른, 흉악하게 찢어진 눈매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안에 서린 살기를 감지하자 지네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 모골이 송연해졌다.

‘젠장...!’

방심했다.

한밤의 숲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바, 긴장을 풀어선 안 됐다.

하물며 이렇게나 다가올 때까지 눈치를 못 챘을 정도로 은밀한 놈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 하물며 완전히 상처가 낫지 않은 지금 이런 어둠 속에서 단신으로 적과 교전을 벌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칼자루를 묵직하게 거머쥐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는 걸 자각하며 뒷걸음치던 찰나­

“도란님?”

“라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물러나 꼬맹아!!!”

놈이 라디를 헤치면 큰일이다.

덤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급히 소리쳤지만, 녀석은 의아하게 되물어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도란님?”

“저기 덤불에 뭔가가...!”

“.....아무것도 없는데요?”

“어...?”

사라졌다.

분명 계속 덤불을 주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 노려보던 눈동자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

“뭐가 있었어요?”

“아니 방금 저기 덤불에 짐승이 있지 않았어...?”

“짐승이요? 일단 저는 아무 냄새도 못 맡았는데...”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어 코를 쫑긋거렸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도란님... 정말로 제대로 본 게 맞아요...? 아니면 야생초의 불빛을 착각했다던가... 여기까지 접근했으면 늑대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데...”

“.....”

나는 말없이 단도를 움켜쥐고 눈동자가 있었던 위치로 다가가 지면을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발자국은커녕, 작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정말로 몬스터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덤불에 털이 붙어있었을 게 분명한데도.

“....제 후각으로도 감지하지 못하는 상대가 있을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는 조심하죠.”

“그래...”

라디가 내 말에 동조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공터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네.”

“....”

*

야영지에 도착하고 모피를 내려놓자 하늘에서 깃털 같은 눈송이가 흩날렸다.

아직은 눈발이 약하지만 곧 폭설로 바뀔 터, 미리미리 대비해서 다행이다.

“남은 사슴 고기는 여기다 두면 될까요?”

“그래, 눈 속에 놔두면 썩지는 않겠지. 장작은 젖지 않게 토끼 가죽으로 덮어두고... 늑대 넌 고기에 눈독 들이지 마, 이번에도 훔쳐 먹다가 걸리면 진짜로 혼날 줄 알아.”

­컹! 크르르르...! 컹 컹!!

“...나중에 도란 몰래 떼어줄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

­킁!! 컹!!!

라디가 슬그머니 늑대 곁으로 다가가 속삭이자 녀석이 침을 질질 흘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런 늑대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며 내뱉었다.

“...어째 네 말을 더 잘 따르는 거 같다?”

“음... 제가 먹을 걸 많이 챙겨줘서 그런 게 아닐까요? 개는 밥 주는 사람이 최고라고들 하잖아요.”

“그럴지도... 야, 인마 내 연인한테서 안 꺼져? 빨리 네 집으로 돌아가!”

­크르르르...!

모닥불 근처, 늑대가 눈에 젖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임시 움막을 턱짓하며 발로 밀어냈지만, 녀석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팅겼다.

“뭐 어때요. 얘도 저희랑 같이 있고 싶나 봐요. ...차라도 좀 마실래요?”

“아, 고마워.”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라디가 철제 수통을 건네왔다. 혹여나 내가 데일까 봐 천 조각을 둘둘 말아서. 그 따스한 마음씨에 스르륵 입꼬리가 풀어졌다. 천천히 차를 음미하자 은은한 허브 향기가 풍겨온다.

“...맛있네. 차 끓이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자연스럽게 익힌 거예요. 독초를 채취하다 보면 약재로 쓸 수 있는 재료도 간간이 손에 들어오거든요.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나 연구하다 보니 늘었어요.”

“장하네.... 춥다. 조금 더 붙자.”

“....네.”

라디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머뭇거리길래 녀석의 허리를 붙잡아 내 옆에 끌어앉히자 뺨이 붉어졌다.

여전히 풋풋한 모습이 귀여워 말랑한 귀를 매만지자 몸에서 긴장이 풀려갔다.

“...눈이 얼마나 올까?”

“글쎄요... 지나 봐야 알겠지만, 꽤 내리지 않을까요? 구름이 심상치 않으니...”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러게요...”

눈이 쌓이면 식량을 구하기 힘들어진다. 허브나 베리는 물론이고 짐승을 잡는데도 애로사항이 생긴다. 수북하게 쌓인 눈더미를 헤치며 사냥감에게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폭설이 계속되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뭐, 다 잘 되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 마셨으면 슬슬 자자.”

“네... 늑돌아, 오늘 밤도 잘 부탁할게?”

­컹!!

우리는 뒷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등지고 피신처 안에 발을 들이자 푹신한 호랑이 모피가 맞이해줬다.

라디가 바닥을 매만지며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이거 생각보다도 엄청 부드러운데요..? 뽀송뽀송하고... 좋은 향기도 나는 것 같아요!”

“그러게, 고생한 보람이 있어.”

최상급의 털가죽. 지구에서도 이런 물건은 본 적이 없다. 크기도 넉넉하다 못해 넘칠 지경. 비좁은 움집 안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 대여섯 번 정도 접고 나서야 간신히 깔 수 있었다.

“이걸 시트로 쓸려면 침대 크기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겠는데... 우리 둘이서 자고도 한참 남겠어.”

“아... 그, 그렇죠...? 아무래도...”

라디가 새삼 얼굴을 붉혔다. 이 모피의 진짜 용도를 떠올린 모양.

“왜, 부끄러워?”

“시끄러워요, 금방 또 기고만장해져서는...”

내가 팔을 뻗자 라디가 그 위에 고개를 뉘었다. 달콤한 체취가 물씬 풍기고, 청명한 눈동자를 코앞에서 마주 보았다.

“...이상한 데 만지지 마요.”

“좁아서 어쩔 수 없잖아.”

“...엉큼해요.”

“본능이야.”

“.....”

라디가 오늘은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듯,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 봉인했다. 그러면서 행복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게 녀석답다.

깍지를 낀 채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고 있자니 꽃잎 같은 입술이 열리며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도란님.”

“왜.”

“저희가 살아서 여길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래야지,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네요... 잘 자요 도란님.”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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