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귀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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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귀환 #5
생존 11일째.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고 하루가 더 흐른 시점, 어두컴컴한 움막 안에서 눈을 떴다.
“......”
조용하다.
희미한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꼬맹아, 자?”
“.....”
“잠깐 일어나 봐. 밖이 조금 이상해.”
“....”
소곤소곤 속삭여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모피를 더듬어 올라가던 도중 손끝에 부드러운 살결이 맞닿았다.
그 감촉을 만끽하며 털가죽 속으로 파고들자 후끈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온다.
“...안 일어나면 억지로 깨운다?”
절호의 찬스.
살금살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만지겠는가. 귓가에 숨을 불어 간지럽히자 작은 몸이 움찔했고, 뺨을 붙잡고 쭈욱 잡아당기자 볼살이 말랑말랑 떡처럼 늘어졌다.
어떻게 사람 피부가 이렇게 고울 수가 있지?
마치 아기를 보듬는 것만 같다. 미세한 잡티 하나 없을뿐더러 향기까지 풍긴다.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아봤더라... 그래, 베이비 파우더라 불렀던 것 같은데.
나는 움푹 파인 쇄골의 감촉을 즐긴 뒤, 이에 그치지 않고 서서히 쓸어내렸다. 고아한 등의 라인을 따라 점점 아래로. 잘록한 허리를 지나 앙증맞은 둔부에 손을 뻗었다.
이어 엄지를 세워 엉덩이골 위에 우뚝 선 꼬리 둔치를 지그시 압박하자
“으읏...”
입술이 벌어지며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깼나?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지만, 움막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도하며 천천히 골짜기 아래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던 찰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육식 동물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음성이 지척에서 울려퍼졌다.
“아, 일어났어?”
“일어났어? 라니... 아침부터 정말 팔팔하시네요. 그렇게나 기운이 남아돌아요?”
“응.”
“.....”
라디가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란님이 일부러 자는 도중에 깨울 정도면...”
“밖이 좀 이상해.”
“밖이요? 어떤 게...”
“너무 조용해. 바람 소리는 물론이고 늑대 코골이도 안 들려. 게다가 지나치게 어두운 것 같지 않아?”
“...그러네요. 날이 밝을 때는 지난 것 같은데... 한번 나가서 확인해보는 게 좋겠어요.”
“그래, 잠시만 여기 있어 봐.”
모피를 들치고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팔에 힘을 주어 출입구를 틀어막은 나뭇단을 치우려고 했으나
“어...? 이거 안 열리는데?”
“무슨... 농담하지 마세요.”
“진짜야 이거 봐.”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이...”
라디가 무릎을 기어 다가왔다. 이내 낑낑거리며 애를 써봤지만, 굳게 닫힌 출입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안 움직여...!”
“아무래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눈이 훨씬 많이 내렸나 본데...”
나뭇가지 틈새로 밖의 풍경을 엿보고자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밤새 내린 눈이 움막을 뒤덮은 모양. 그 탓에 서릿바람에 잔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가득 쌓인 눈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적막이 흐르고, 두 남녀의 숨소리가 얽혀들자 묘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라디가 흠칫 떨었다.
“...둘만 남았네?”
“아니...!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여기서 빠져...!”
“기다리다 보면 늑대가 알아서 파헤쳐 주겠지. 우리 그때까지 시간이나 때우고 있을까?”
“무, 무슨...! 늑돌아 와서 도와...!! 읍?!”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이 순간을 방해받고 싶진 않았으니까.
귀에 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저번 거 마저 이어서 하자, 응?”
“읏...!”
양어깨를 살살 눌러 바닥에 밀어붙였다. 다리를 바동거리길래 종아리로 옭아매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라디가 내 팔을 떼어내려 안달복달했지만, 귀를 매만지며 키스하자 얼마 안 가 흐느적하게 풀어졌다.
천천히 입술을 떼자 물기 섞인 숨소리가 들려온다.
“...벗긴다?”
“....”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순간ㅡ
와르르르!!!!
등 뒤에서 눈부신 하얀빛이 터져흘렀다.
손등으로 눈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들자 웬 익숙한 개 한 마리가 혀를 내민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컹!!!
“야 인마 너...!”
컹!! 크응!!!
늑대는 자기가 우릴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 뻔뻔한 모습에 분노가 용솟음쳤다.
“이, 이... 이 끓여 먹어도 시원찮은 놈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컹?!
“오냐! 오늘 몸보신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새카만 코를 한 대 쥐어박자 녀석이 날카롭게 짖어댔다. 놈이 앞발바닥으로 내 얼굴을 후려치자 뺨이 얼얼했다. 나는 녀석의 관절을 쪼이며 귀에 악다구니를 질렀고, 놈은 침을 질질 흘리며 내 정강이를 물어뜯었다.
엎치락뒤치락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무렵, 등 뒤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라디가 다가와 늑대를 쓰다듬으며 읊조렸다.
“고마워 늑돌아. 덕분에 정조를 지켰네? 정말... 누가 늑대고 누가 사람인지...”
“....”
난연한 얼굴로 키득거리는 라디를 보니 독기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늑대가 파 둔 굴을 통해 피난처 밖으로 빠져나왔다.
동시에 막막한 풍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순백.
푸르스름하던 침엽수림이 눈으로 뒤덮였다. 높게 솟은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쏟아졌고, 지면에서는 반짝이는 적설이 시릴 정도의 백광을 반사했다. 굵직한 나뭇가지들은 휘다 못해 부러질 지경이다.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데...”
어제도 눈이 내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움막 끄트머리가 간신히 보이는 거로 미루어 1m는 넘게 쌓인 모양. 그저께 나무를 덧데어 보강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세계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라디가 내 품에서 내려와 말했다.
“이 정도 폭설이면... 당장 여길 떠야겠네요..”
“...그러게.”
앞으로도 계속 눈이 올 거다. 단순히 한 번 내리고 그칠 눈발이 아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은 구하기 어려워지고, 기온이 떨어질 터. 폭설이 이 산림을 완전히 뒤덮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꼬맹아, 가서 사슴 고기 좀 챙겨올래? 늑대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금방 파낼 수 있을 거야.”
“네, 이 정도면 찾는 것도 일이겠네요. ...늑돌아 이리 와 줄래?”
컹!!
라디가 늑대를 시켜 눈을 파헤치는 사이, 나는 피신처 안에 들여놓았던 짐을 하나하나 밖으로 옮겼다.
배낭과 토끼 가죽을 옮기고, 스노우 타이거 모피까지 지상으로 올려보내고 난 뒤에야 고된 작업도 끝이 났다.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를 펄럭이며 허리를 폈다.
“드디어 끝났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옮겨 둘걸.”
“고생하셨어요 도란님.”
라디가 소맷자락을 뻗어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품속에서 꺼낸 수통을 받아들자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체온으로 데워진 덕분에 마시기 딱 좋다.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읊조렸다.
“그럼 이제 출발하는 일만 남았나요?”
“음... 아직. 조금 기다려줄래? 늑대랑 같이 잠깐 앉아 있어.”
나는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라디에게 미소로 화답한 후 작업에 착수했다. 수중에 있는 나무줄기 중 유연한 놈들을 골라내 잔가지를 제거한다. 그다음엔 불에 그슬려 모양을 잡고, 끈으로 동여매어 고정했다.
“지금 뭐 만드시는 거예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온 라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눈 위에서 신을 덧신을 만들고 있어. 이대로 가면 발이 푹푹 빠질 테니까.”
“아... 이게 바로 그 설피라는 건가요...”
“바로 맞혔어.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네, 이 근처에는 그런 걸 쓸 정도로 눈이 많이 오지 않으니까요. 추운 지방에서 간간이 사용한다는 말만 들어봤지...”
“하긴... 잠깐 발 좀 줘볼래? 치수 좀 재게.”
“...여기요.”
라디의 부츠 사이즈에 맞춰 끈을 조정했다. 이전에 내가 썼던 설피는 얼음 동굴에서 땔감으로 써버린 바, 여분을 포함해 두 짝을 더 만들고 나자 뿌듯함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설원에서 막힘없이 나아가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번엔 또 뭐 만드시는 거예요? 신발치곤 좀 많이 큰데...”
“썰매를 만들게. 늑대한테 끌라고 시킬 거야.”
컹?
생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사슴 가죽을 그 위에 덧붙였다. 도중부터는 끈이 모자라 붕대로 썼던 헌 옷가지를 재활용해 나뭇가지를 엮었다. 나무의 강도가 약해 나와 라디의 하중을 지탱할 정도는 아니지만 짐 정도는 충분히 실을 수 있을 터다.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도중에 조금 헤매긴 했으나, 이 정도면 이동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배로 단축할 수 있겠지.
“어때, 나름 잘 만들지 않았냐? 이래 봬도 겨울만 되면 동네 개들을 모아다가.... 꼬맹아?”
“.....”
침묵.
라디는 내가 만든 썰매와 설피를 바라보며 깊이 고뇌했다.
시선을 고정하고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유보했다.
이내 굳게 닫힌 입술이 벌리고, 내게 고했다.
“도란님...”
“도란님 진짜 정체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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