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귀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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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귀환 #6
“도란님 진짜 정체가 뭐예요?”
라디가 똑바로 서서 날 마주보았다.
무겁게 내뱉어진 의문이 으슥한 잔향이 되어 메아리친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색. 의혹에 찬 눈동자는 조금 어둡다.
차갑고, 조금은 낯선 시선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체라니. 난 그냥...”
“도란님은 이곳 사람이 아니죠?”
“.....”
숨이 막혔다.
누군가가 표백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주위에서 창광하는 빙설의 백광이 짙어지자 소리가 멀어졌다.
그녀가 어떤 의미로 말을 꺼냈는지는 모른다. 사고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다만, 텅 빈 전회를 거듭하는 머릿속 한 가지 확신한 건
우린 한없이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침묵으로 일관하자 라디가 되물었다.
“도란님은 어디서 오신 거예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왜 그렇게 생각해?”
라디는 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명료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말을 삼갔을 뿐이죠. 실력은 뛰어난 데 반해 비정상적으로 아는 게 없어요. 던전의 기본 상식도 모르고, 흔한 몬스터의 이름조차 몰라요. 하지만 묘하게 이상한 데에서는 박식하기도 하고요.”
“....”
“이거... 대체 어디서 배우신 거죠?”
그녀가 발치에 놓인 설피와 썰매를 눈짓했다. 나무줄기 곳곳의 그을린 흔적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덧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썰매까지 이렇게 단시간 안에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해요.”
“그건 어릴 때 많이 만들어봐서....”
“이 근방에서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은 없어요. 저 멀리 북방 대륙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도란님이 북쪽 출신이었다면 스노우 타이거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겠죠? 그쪽의 고급 특산물 중 하나가 바로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니까요.”
라디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말을 아꼈다.
신중해야 했다.
외줄 다리를 걷는 듯한 긴장감 속, 그녀가 짧은 침묵을 깼다.
“...저희 유적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세요?”
“.....”
“도란님이 살던 곳에서는 장례 풍습으로 미라, 그러니까 언데드를 만든다고 했었죠?”
아.
젠장.
“그때 도란님은 제게 멀리서 오셨다고 얼버무렸어요. 당시에는 다른 대륙에서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이젠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는 계속 참아왔지만, 이젠 묻고 싶어요.”
“도란님.”
“도란님은 대체 뭐죠?”
“.....”
입술이 갈라졌다.
공기가 버겁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 예상했고, 나름의 각오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직면하니 덜컥 겁이 났다.
만약 라디에게 내 출신을 말하면 기탄받을까 봐.
지금껏 그녀와 쌓아왔던 인연이 그렇게 가볍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본능 깊은 곳에 자리매김한 두려움은 쉬이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란님...”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침묵하자 라디가 애절한 눈동자로 올려다봤다. 그 눈길에는 번민하는 나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나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였다.
따뜻한 온기가 내게 와닿은 건.
“라디... 야...?”
그녀가 강하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맥동과 달콤한 체취가 풍겼다.
어여쁜 벚꽃색 입술이 벌어지며 내게 전했다.
“도란님... 아니, 도란.”
“괜찮아, 나 어디 안 가.”
“설령 도란의 진짜 정체가 뭐든지 간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더라도... 나만은 끝까지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
“이제 이 장소와도 작별이네요... 꽤 정들었는데...”
컹!
“늑돌아 일로 와, 줄 묶어줄게.”
크응!!
익숙한 야영지를 뒤로하고 여정길에 올랐다.
나와 라디가 머물렀던 장소.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험난한 마경 속에서 아늑하게 쉴 수 있었던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이제는 폭설에 파묻혀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아늑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의 온기가 살갗에 선연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
“어린애도 아니고 참... 고작 입맞춤한 거 가지고...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단순히 열병이 도진 걸지도.
내가 계속 입술을 매만지며 멀뚱히 서 있자 보다 못한 녀석이 한소리 했다.
그도 그럴 게, 원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라디가 먼저 이렇게 나서서 키스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참아보려 하는데 계속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기... 꼬맹아...”
“안 돼요.”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또 해달라고 할거잖아요.”
“....안 돼?”
“안 돼요.”
야박하긴...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결국, 내 출신을 밝히는 건 차일로 미뤘다.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지만,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다. 그만큼 내게는 라디와의 관계가 소중했으니.
하지만 머잖아 곧 솔직히 털어놓을 때가 오지 않을까?
별 거부감 없이 썰매를 끄는 늑대와 그런 녀석을 다독이는 라디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가에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숲을 떠났다.
눈 덮인 침엽수림을 벗어나자 드넓은 설원이 펼쳐졌다.
어딜 보아도 새하얀 눈이 있을 뿐. 다행히 이전처럼 살풍경은 아니다. 언덕 곳곳에는 커다란 암석이 널려있었고, 꽁꽁 얼어붙은 고목이 군데군데 산재했다.
좋은 조짐이다.
점점 거세져 가는 눈발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아직까진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니까. 지난번에 설원을 가로지를 때는 식량도, 동료도 없었으니.
하지만,
“...앞길 조심하세요, 전 괜찮으니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알았어... 그래도 혹시 힘들면 말해. 썰매 뒷자리에 공간을 마련해볼 테니까.”
라디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로브를 움켜쥔 채 뒤따라왔다. 바람에 펄럭이는 옷자락 소리가 요란하다. 어떻게든 옷깃을 잡아당겨 들이치는 냉기를 막아보지만, 큰 효과는 없는지 힘에 부쳐 보였다.
세찬 바람이라도 불 때면 비틀거리는 모습이 걱정돼 짐이라도 들어줄까 제안했지만, 녀석은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면 말해, 업어줄게.”
“저는 걱정 마시고 도란님 컨디션에 집중하세요. 아직 완전히 상처가 회복된 게 아니니까요.”
라디는 기특하게도 불평 한 번 내뱉지 않았다. 정말 다시 봐도 굉장한 정신력이다. 험난한 오지에 고립되었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을 정도니. 어린 나이부터 거친 모험가 생활을 이어올 수 있던 원천을 조금 엿본 기분이다.
“...야, 아직 할 만하냐?”
컹!!
늑대가 혓바닥을 휘날리며 대답했다. 예상외로 썰매를 끄는 일이 적성에 맞는 모양. 덧신을 신은 것도 아니면서 푹푹 빠지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뛴다.
발바닥에 털이 수북해서 그런 걸까?
녀석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꼬맹아.”
“네, 말씀하세요.”
“나 이전에 몬스터를 데리고 다니는 모험가를 길에서 본 적이 있는데 말이야...”
“무슨 말을 꺼낼지 대충 예상 가긴 하는데... 일단 계속하세요.”
“우리가 얘 데려가서 키우면 안 될까...?”
“도란님.”
“아, 아니 혹시나 해서 말이야.”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얼버무렸다.
솔직히 욕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녀석이 만약 동료와 만나지 못하고, 우릴 따라오기로 결정했다면 내가 키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간 정도 꽤 들었고 식비가 많이 든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투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녀석을 거느리고 다니면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모험가도 없어질 테니까.
종종 차별을 겪는 나에게는 매우 큰 이점이다. 어찌 됐든 겉보기엔 흉악한 몬스터니까.
알맹이는 그냥 겁 많은 똥개에 불과하지만.
라디도 속으로 이것저것 헤아려보더니, 잠시 바람이 옅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몬스터를 사역마로 등록하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말톤님의 보증이 있으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닐 테니까요. 크누트 길드의 금 랭크 회원이시니...”
“생각해보니 말톤이 있었네... 걔가 얘를 보면 환장하겠지...?”
“아마 그렇겠죠... 동물을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니까요..”
라디가 뺨을 긁으며 난처하게 웃었다. 녀석의 성벽은 워낙 유명하니까.
...한데 말톤과 라디는 서로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곰곰이 떠올려 보니 어떤 경위로 면식을 쌓게 됐는지 못 들었다.
그러한 의문을 담아 물어보자 라디가 봇짐을 고쳐매며 대답했다.
“아 그건요... 한 재작년 즈음인가? 빌헴 마을에서 햇 보어라는 마물이 대량으로 출몰했었거든요. 그때 근방의 모험가들에게도 토벌 임무가 내려갔는데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사낭 쥐 수인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분이라 이후로도 한두 번 퀘스트를 같이하다 보니 알게 됐고요.”
“그래? 하긴... 내 머리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녀석이니까.”
“...근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이상한 점?”
라디가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내리깔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어서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흘려넘겼지만... 어쩐지 말톤님이 절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시에 전 평범한 F급 모험가인 데다가 항상 로브로 얼굴을 감추고 다녀서 그럴 리가 없었을 텐데...”
“말톤이 널 알고 있었다고?”
“네, 모험가 패를 보여드리기도 전에 제 이름을 부르질 않나... 후드를 벗지 않았는데도 사낭 쥐 수인이란 걸 단박에 알아채질 않나...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인데, 토벌대 파티 멤버로 절 미리 지목해 놓으셨더라고요. 전혀 일면식도 없던 사이었는데...”
“...본인한테는 물어봤어?”
“네, 절 아느냐고 물어봤었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답했어요. 아, 혹시나 도란님이 오해할까 봐 덧붙이는 건데, 말톤님이 수상하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어쩌면 길드에서 의뢰를 수주하는 도중 우연히 제 인적사항을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좀 신기해서...”
“그러게...”
나라고 말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많다.
놈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E랭크 모험가에 불과하지만 그게 본 실력이 아님은 누구나 안다.
그의 진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엘프 마을을 떠난 이유도 모른다.
사람들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목숨을 빼앗는 데 거침이 없다.
항상 둔기를 주 무기로 쓰지만, 활을 훨씬 더 잘 다룬다.
정체불명의 신의 가호를 받았다.
[말톤 그 자식을 조심해]
어쩐지 악마가 남기고 간 구절이 뇌리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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