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귀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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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귀환 #7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거센 눈보라를 거스르며 나아간 지 꼬박 반나절이 흘렀지만, 여전히 폭설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슬슬 쉴 장소를 찾자... 이제 곧 어두워지겠어.”
“....”
“...조금만 더 참아줘.”
당장 거처를 확보해야 한다.
날씨가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극한의 추위가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미소를 지으며 나와 늑대를 고무하던 라디도 어느 순간부터 묵묵히 행군에 몰두했다.
희뿌연 눈발 너머로 그녀가 휘청이는 게 전해졌다.
“...됐다. 이 고목 아래에 자리를 잡자. 조금만 더 견딜 수 있겠어..?”
“....”
라디가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이 빠진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으나, 여유가 없기는 나도 매한가지.
방수포 사이로 한기가 들이치자 입김이 얼어붙었다. 성에가 눈썹을 하얗게 물들였고, 손발에 감각이 없어 부츠 아래를 엿보기가 두려웠다.
한시가 급한 상황.
“...늑대야 여기 좀 파줘, 부탁할게.”
컹...
목둘레에 묶인 끈을 풀어주자 늑대가 힘없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 혹한의 맹추위 앞에서는 녀석도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을 터, 거센 맞바람을 거스르며 산더미 같은 짐을 끌어왔으니 지치지 않는 게 이상하지.
늑대가 굴을 파는 사이, 나는 바람을 등지고 라디를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옷감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화끈거리는 고통이 몰아닥쳤지만,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바라보며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면 돼.”
“.....”
‘젠장...’
날씨가 급속도로 악화된 게 원인이다. 이대로 가면 강력한 눈보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제길... 늑대야 조금만 더 빨리....”
컹!
눈더미 아래로부터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황급히 라디를 데리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협소한 입구를 비집고 고개를 들자 제법 널찍한 설동이 완성되어 있었다. 고목 아래 부분적으로 눈이 퇴적되지 않은 공간을 잘 활용한 모양.
“잘했어 늑대야. 이제 너도 조금 쉬고 있어.”
나는 녀석을 쓰다듬은 뒤, 서둘러 썰매를 잡아끌고 굴 안으로 되돌아왔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모피 대신 장작을 바닥에 깔아 냉기를 차단한 뒤, 라디를 그 위에 앉히고 배낭을 이용해 설동 입구를 틀어막는다.
바람 소리가 한층 잦아들자 굴 내부에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굳어버린 손가락을 움직여 간신히 불을 피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들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꼬맹아, 몸은 괜찮아?”
“.....”
“꼬맹아...?”
“....”
라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내 애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호소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서로의 온기가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가쁜 심장의 박동이 차차 진정되어갈 즈음, 라디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적에서 노획한 옷가지마저 내게 양보했으니 더욱 힘들었겠지. 나 역시 극한의 상황을 넘나들며 단련해온 육체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을 거슬러 나아간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통으로 설동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고 연기가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들고 나자 라디가 로브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으... 축축해..”
“도와줄까...?”
“...부탁드려요.”
손 하나 까닥일 힘조차 없는 모양.
냉기가 새어들지 않도록 로브 위를 동여맨 끈을 풀고 단추를 끌러내자 흠뻑 젖은 로브가 맥없이 떨어졌다.
나는 녀석의 로브를 걸레처럼 쥐어짜 물기를 제거하고 부츠와 양말까지 모두 벗겨낸 후 불가에 널어 건조시켰다.
“이렇게나 젖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이 정도는 괜찮아요.”
“괜찮긴... 조금만 더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는데.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해줘. 혹시라도 동상에 걸리면 큰일이니까.”
“...네.”
“그래, 장하다.”
라디의 머리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차갑게 젖은 머리카락에 가슴팍이 축축해졌다.
애틋하게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다가가던 도중, 늑대가 격하게 몸을 털었다.
푸다다다닥!!
“야 인마!!”
“...혼자 방치해서 섭섭했나 봐요.”
“아니 암만 그래도 좀 눈치껏... 그래, 고생했다 인마.”
“고마워 늑돌아. 덕분에 편히 올 수 있었어.”
컹!!
늑대는 짧게 울부짖더니 그제야 만족스럽게 털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서 눈을 돌리고 짐더미로 손을 뻗었다. 이제 슬슬 허기진 배를 채우고 취침 준비를 해야 할 터.
얼어붙은 훈제 육포를 통째로 불에 던져넣어 해동했다. 수통에는 허브 이파리를 집어넣고 끓였다. 머잖아 비좁은 설동 안에 보글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고, 향기로운 향이 차차 퍼져나갔다.
라디가 차를 한 모금 머금더니 소박한 웃음을 피워올렸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요...”
“그러게 힘들면 말하라니까.”
“다들 열심히 걷고 있는데 저만 우는소리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잘못된 거래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라디는 달그레 뺨을 얼굴을 붉히더니 말없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생기가 돌아온 두 뺨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된다.
녀석은 내 가슴에 고개를 묻고 고양이처럼 비비다가 문뜩 눈초리를 세우며 읊조렸다.
“그런데... 도란님은 멀쩡하신가 봐요?”
“뭐가.”
“안 힘들어요? 저는 완전 녹초가 됐는데 도란님은...”
“그럴 리가 있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여유가 넘치시는 게...”
“추위엔 이골이 났거든,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몸이 적응했어.”
이게 다 아버지 탓이다. 그 웬수 때문에 인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훨씬 끈질기다는 걸 몹소 체험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고 있자니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며 쳐다보았다.
“....왜?”
“그건 적응한 게 아니라 그냥 비정상인 거예요.”
“그런가..?”
“네.”
라디가 단언했다.
이어서 폭언을 내뱉었다.
“도란님... 도란님은 말톤님 말고 친구 없죠?”
“.....”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같이 식사를 해본 적도 없죠?”
“...그렇긴 한데 그걸 왜 굳이...”
길드 접수원인 카렌 씨나 치료원의 아리엘 등 타인과의 교류가 아예 전무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영 인간관계가 빈약한 게 사실이다.
...한 명 더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한데 걔는 인간이 아니니 예외고.
“도란님은 본인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자각하고 계시나요?”
“음... 딱히...?”
내가 모험가 랭크에 비해 강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 C랭크 상위로 가면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놈들이 지천에 널렸다. 날붙이도 맨몸으로 튕겨내는 괴인을 내가 무슨 수로 꺾겠는가?
게다가 베라스틴 밖으로 나가면 그런 강자들이 수두룩하다. 이 세계는 지구보다 정보의 교류가 덜 발달한 바, 강함의 기준이 획일하지 않다. 말톤처럼 길드에 따라 랭크가 현저하게 다른 경우도 있고, 지역마다 강함의 척도가 판이한 일도 흔하다.
당장 이 나라의 수도인 비스마르크 왕도에 가면 마나를 사용하는 동 등급 모험가가 널렸다고 하니.
하지만 라디는 내 눈빛만 보고 속내를 읽었는지 곧바로 반박해왔다.
“...도란님, 저도 나름 모험가 생활을 해 온 지 7년이 다 되어 가거든요? 그간 제가 봐왔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도란님은 강해요, 정말로.”
“그래...? 하지만 마력 없이는...”
“그래서 더 대단한 거예요. 도란님은 한 번이라도 객관적으로 본인의 속도를 남들과 비교해본 적 있어요?”
“....없는데?”
“대체 어떤 모험가가 마나도 쓰지 않고 단신으로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린다는 거예요... 보통은 첫 일격도 피하지 못하고 죽는다고요.”
“.....”
놈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단도의 힘 때문이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내가 녀석의 공격을 상당수 흘려낸 것도 사실이니까.
“아무리 포장해도 도란님의 스피드는 비정상이에요. 보통 강한 마물을 사냥할 땐 진형을 갖추고 원거리에서 화력을 쏟아부어 잡는 게 정석이거든요. 그래서 마법사들의 몸값이 비싼 거고요. 근데 도란님을 그런 걸 죄다 무시하고 무식하게 때려잡으니 당연히 기가 차죠..”
라디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도란님이 마나를 각성하기라도 하는 날엔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셨어요?”
“내가...”
마나를 각성한다고?
에이.
그럴 리가.
라디나 말톤이라면 몰라도 나는 출생부터가 다르다. 내 본고향은 이 세계가 아니니까. 지구인 중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인물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예 태생부터 불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난 아마 안 될...”
“가능해요. 도란님이라면 할 수 있어요. 반드시.”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나는...”
“애초에 도란님은 인간이 아니잖아요... 계속 몬스터를 잡아먹다 보...”
라디가 아차 싶은 듯 말끝을 흐렸다. 황급히 수습해 보려고 하지만ㅡ
늦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의혹에 찬 흑안이 비쳐보였다.
“너... 무슨 얘길 들은 거야.”
그림자 마물.
불현듯 놈이 뇌리를 스쳤다. 라디는 녀석과 계속 함께했었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도, 설원을 가로질러 올 때도, 얼음동굴을 지나올 때도,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리고 기절한 나를 발견했을 때도...
그녀가 라디 곁에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지...”
“걔, 지금 여기 있지? 아니, 이 대화도 그림자 속에서 엿듣고 있잖아. 내 말이 틀려?”
라디는 그녀가 말을 할 줄 안다고 했다. 어떠한 문답을 나눴다는 뜻.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라디의 태도로 보아 나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이걸 보고도 아무 의문을 품지 않았지.”
슈화아아악!
내 손에 검은 증기가 피어오르며 새까만 단도가 나타났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 허나 라디에게는 그렇지 않을 터였다.
일전에 사슴을 잡을 때 이 능력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질문 하나 하지 않았다.
마치 전부 예상했다는 듯이.
“그리고, 넌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어떻게 절벽에서 뛰어내리고도 무사한지 묻지 않았어. 혹시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어떠한 경위로 살아나왔을지.”
나조차도 모르는 걸.
“.....”
라디가 함구했다.
입을 굳게 다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묵이 내 말에 무게를 실었다.
“걔한테 들은 거지? 전부, 내가 모르는 나에 관한 걸.”
동굴. 던전 2계층. 놈이 꺼낸 첫마디, 마지막으로 남긴 작별 인사.
[만나서 반가웠어요 도란님... 그럼 안녕히...]
그녀가 보였던 눈물은 마음 한구석에 강렬히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
놈은 날 알고 있다. 허나 내 기억에 놈은 없다.
녀석은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안다.
라디는 그 존재에게 어떠한 말을 전해 들었다.
“라디야, 나도 알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가 날 신뢰하는 것만큼 나도 널 믿어.”
라디가 내게 해가 되는 내용을 감출 리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녀가 숨기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ㅡ
“뭔가... 알고 있는 거구나..? 나에 대한 걸...”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
나를 아는 존재들.
그림자들의 속삭임.
내면에서 조우한 악마.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의 정체.
그간 품어왔던 수많은 의혹이 내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
적막이 내리깔렸다.
무거운 침묵이 나와 그녀 사이에 맴돌았다.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끈적하게 늘어진다.
길고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라디가 입을 연 순간
푸화아아아아악!!!!!!!!!!!!
설동이 무너져내리며 괴이한 형체들이 나타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