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스승 #1
* * *
[109] 스승 #1
“...정신이 좀 드세요?”
“여긴...”
“동굴 안이에요. 이제 안전하니 마음 놓으세요.”
“....얼마나 지났어?”
“서너 시간 정도요.”
“그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니 구석구석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보인다.
“아뜨뜨... 아파라...”
“...촉수에 당한 흔적이에요. 맹독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온몸이 만신창이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상처가 깊지 않다. 아무래도 놈들의 체액에 고통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혼자였더라면 지금쯤 마물의 뱃속으로 사라지거나 발치에 쓰러져 있었을 터.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아니요, 저희야말로... 만약 도란님이 희생해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더라면...”
“난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니까. ...늑대 너도.”
끄응...
늑대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 몸에 코를 문질렀다.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걸 자책하는 걸까. 그럴 필요 없는데도...
나는 상체를 일으켜 라디를 마주했다. 적적한 모닥불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드리우자 그림자가 졌다. 그녀는 시선이 교차하자 힘없이 고개를 돌린다. 고아한 뺨에는 불꽃을 머금어 주홍빛으로 반짝이는 물방울 하나가 맺혀있었다.
나는 라디의 눈가에 아른거리는 물기를 닦아주며 물었다.
“왜 울고 그래.”
“.....”
“나한테 미안해서 그래?”
“....”
다정하게 손등을 어루만지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칫 빠져들 것만 같이 푸른 눈동자에는 다분한 자책과 회한이 묻어나왔다.
라디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다 저 때문에... 제가 없었더라면 도란님이 이렇게 다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
“전부 제가 있어서....”
“라디야.”
조금 세게 손등을 틀어쥐었다. 쪽빛 눈동자가 살짝 놀라 벌어진다. 나는 그 몸체를 끌어당겨 입술로 입술을 덮었다. 더 이상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도록. 강렬하게.
평소보다 배는 농밀한 키스를 마치고 그녀를 놓아준 뒤, 녹진하게 풀어진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신 내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
“절대로.”
“흣...!”
따끔하게 귀를 꼬집자 신음이 흘러나왔다. 라디는 잠시 대답을 주저했지만, 알겠다고 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심산으로 바지춤을 풀자 황급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쉽네.
“다음부턴 자책하지 마. 아니, 애초에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어. 우리가 함께 넘어온 고비가 몇 번인데... 안 그래?”
“.....”
“...대답.”
“아, 알겠어요...!”
주섬주섬 다시 허리춤을 매만지자 라디가 재빨리 내 손을 붙잡았다. 목소리에 조금 기운이 돌아온 걸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며 물었다.
“그래... 이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괜찮아?”
“....네, 말씀하세요.”
“마지막에 우리가 도망칠 때... 내가 본 게 맞지?”
“....”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
라디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눈을 감더니, 잠시 후 결의를 머금은 눈동자로 내 흑안을 담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던전 2층 동굴을 통과할 때 처음 만났고, 유적까지 저희를 안내했었던, 그리고... 제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뒤로 추위와 마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보호해준 그 애예요.”
“역시나...”
내 눈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두꺼비 마물로부터 벗어날 때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었던 인물. 다만, 일전에 나와 격전을 벌였던 부정형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엔 명확한 윤곽을 지니고 있었다. 라디보다 머리 한 개 정도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
이전에 들었던 말 중에 실체로 현현하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간신히 시간에 맞춰 등장한 거겠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다시금 잠잠해진 그림자에선 어떠한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또 목숨을 빚졌네... 아니 근데 기왕 도와줄 거면 조금만 더 빨리 와주지...”
스스로도 염치없는 소리란 걸 알면서 툴툴거리고는 고개를 들어 라디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면.. 그 애가 너한테 해줬다는 얘기는 뭔데. 네가 대답을 주저할 정도로 말하기 힘든 거야? 아니면... 혹시 협박이라도 당했어?”
“아, 아뇨... 협박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뭘... 새삼스럽게.”
“그것도 그러네요...”
라디가 자조적으로 웃고는 내 흑발을 쓸어넘겨 주며 입을 열었다.
“도란님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전해들었어요.”
“.....”
“도란님에겐 조금 더 복잡한 비밀이 얽혀져 있다고 했어요. 저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비밀이요.”
“....”
“스노우 타이거의 고기를 드시라고 한 것도, 강한 마물을 먹으면 도란님이 힘을 각성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해서 그런 거고요.”
“...너는 그 말을 믿어?”
“당연히 안 믿었죠. 그러니까 저더러 도란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라던데요? 그러면 답을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처음에는 넌지시 질문하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추궁하는 어조가 되어버렸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그건 내 잘못도 있으니까.”
라디가 내 출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되었다. 유적의 미라 제작소에 들렸을 때도 내 고향에 대해 물은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 얼버무린 이후로 단 한 번도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속으로 매우 답답했겠지. 어쩌면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번 일은 그간의 서운함과 그림자의 부추김, 누가 봐도 수상한 내 행보와 맞물려 일어난 헤프닝이었고.
...이곳을 빠져나가면 전부 솔직하게 털어놔야겠다.
“....그러면, 그 비밀이 뭔지도 들었어?”
“아니요, 저도 거기까진... 그 건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고 했어요. 다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혹시 힌트 같은 건?”
“음... 저도 잘... 아, 이게 단서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도란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얽혀있다고 했어요. 저를 포함해 정말 많은 사람이요.”
“그래?”
“네.”
...기묘하다. 놈이 내 출신 얘기를 했다는 건 적어도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걸 알 확률이 높다는 뜻인데. 나에 대해 굉장히 잘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정말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젠장... 어디 붙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채석장에서 이름 석 자 적힌 돌멩이 찾는 겪이네... 신빙성은 있는 거지?”
“아무래도... 몇 번이나 저희 목숨을 구해준 와중에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 성격도 아닌 것 같았고...”
“나중에 눈앞에 나타나면 내가 직접 물어봐야 하나...”
“죄송해요 조금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냐 아냐 괜찮아. 이런 내용이면 주저할 만도 하네. 나였어도 선뜻 털어놓지는 못했겠어. 미안해.”
손을 내젓고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확실히, 이렇게 불확실한 정보라면 조심성 없이 내뱉고 보기보단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편이 현명하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심경을 복잡하게 해 봐야 도움 될 게 없으니까.
“...그럼 그거 말고는 없었어? 이를테면 나를 알게 된 계기라던가...”
“음... 그건 못 들었지만... 잡다한 얘기를 나누긴 했어요. 옛날에 유적 사람들이 살아갔던 방식이나, 잊혀진 고대 마법, 전투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고, 헤일이랑 메라가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거요.”
“....그중에서 특히 유념해야 할 만한 게 있어?”
“음... 유념할 만한 내용이라... 유념... 아!”
별안간 라디가 손바닥에 주먹을 맞부딪히며 탄식했다.
그러고는 허리를 곧게 펴며 아리송한 미소를 피어올렸다.
“왜, 뭔가 떠올랐어? 대체 뭐길래...”
“흐음...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그 애가 저한테 말해준 게 있어요. 근데 이건 조금 개인적인 거라...”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이야기야..?”
“네, 오히려 전할 수 있으면 전해달라고 했어요.”
슬며시 올라간 라디의 입꼬리를 보자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뭔데.”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내뱉었다.
“도란님은 난봉꾼이라고 하던데요?”
*
컹!!
“....”
컹!!! 컹!!!!
“그래... 일어났어...”
늑대의 침 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라디와 번갈아 가며 선잠을 청한 지도 오래, 피곤한 나머지 어느새 둘 다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
자리를 뒤척이자 몸 앞쪽에 맞닿은 물체에서 향기로운 체취가 풍겨왔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라디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어젯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눈보라를 헤치며 피난처를 찾았으니 상당히 피곤하겠지.
나는 그녀에게 모피를 덮어주고 슬며시 빠져나와 동굴 입구로 향했다.
나른하게 웃웃을 들추자 흉터 없이 탄탄한 복근이 눈에 들어왔다.
“...촉수에 당한 상처는 얼추 회복한 모양이네.”
이전에 절벽 위에서 정신을 잃고 깨어난 후로 신체 능력이 향상되었다고 느꼈는데 회복력도 같이 올라갔나 보다.
내심 달가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을 나서자 머리 위에서 밝은 광채가 쏟아졌다. 그토록 지독하게 몰아치던 눈보라도 어느새 멎은 모양.
바위에 송송 뚫린 구멍으로 화산 지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기뻐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차, 등 뒤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어요?”
“...조금 더 누워 있지. 피곤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이 장소를 탈출해야 하니까요... 하음...”
라디가 귀여운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졸음을 쫓아내기 힘든지 영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찬 바람을 쐬자 눈동자에 서서히 총기가 돌아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상처가 욱신거린다거나.. ”
“멀쩡해, 자고 일어나니 한결 개운해졌어.”
“...하루만에요?”
“그래, 스노우 타이거한테 당했던 상처도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치명적인 독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크게 데이긴 했지만, 이번 경험을 발판삼아 성장하면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데 단도가 안 먹히는 상대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솔직히 조금 당황했어.”
“아,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어요. 아마 마나 때문이었을 걸요?”
“마나?”
“네, 마력으로 등껍질을 강화한 게 아닐까 싶은데... 평범한 재질이라도 마력이 깃들면 강철보다도 단단해질 수 있으니까요. 7계층에 사는 마물이니 그 정도 재주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요.”
“...나랑은 상성이 안 좋았네. 앞으론 조심해야지. 이 단도도 너무 맹신해선 안 되겠어.”
스노우 타이거가 바람 칼날을 휘두르고 바위를 솟구쳤듯, 그 두꺼비들은 마력으로 갑각을 강화하고 독을 사출한 거겠지. 앞으로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일전에 소환했던 촉수도 이번엔 반응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연습을 거듭하면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나저나 아쉽네... 놈들에게서 독을 채취했으면 좋았을 텐데. 마비독이 있으면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아?”
“네... 저도 정말 안타까워요. 처음 보는 마물이라 엄청나게 궁금했는데... 무슨 독이었을까요? 신경 계열인 건 확실하고, 마나로 합성한 걸까요?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생성해낸 걸까요?”
“글쎄... 근데 보통 두꺼비는 독성을 띠는 종이 많으니까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라디가 턱을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나 귀여운 외견을 하고선 취미가 맹독 수집이라니...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늑대랑 빙하 동굴에서 어떤 독버섯을 구했는데 그건 못 쓰는 거야? 내 배낭에 아마 한두 개 정도 남아있을 텐데.”
“아, 저도 봤어요. 그건 코카 버섯이란 건데 액상이 아니라서 볼트에 묻혀 쓰기는 힘들어요. 정제 과정을 거치면 원액을 추출하는 게 가능하지만 증류기가 없으니 지금은 무리고요. 그래도 비싼 거니 잘 챙겨두세요. 하나에 10실링은 할 거예요.”
“잠깐..! 10실링이라고?!”
오랫동안 던전 안에서만 생활한 나머지 금전 감각이 무뎌졌지만, 10실링이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만 쓰던 장검이 8실링. 코볼트 킹을 처치하고 번 돈을 모두 합친 게 11실링. 내 입에 근근이 풀칠하게 해주었던 약초 채집 의뢰가 보통 6페니 정도 했으니.
즉, 그 버섯 하나가 평소 내 일당의 백 배가 넘는 셈. 게다가 그때는 무려 스무 개도 넘는 코카 버섯을 채취했었다.
대부분 이 녀석의 주둥이 속으로 들어갔지만...!
컹?
“너 마침 잘 왔다...! 빨랑 버섯 도로 뱉어내 이 약쟁이 똥개야..!!!”
컹!! 크르르르! 컹!!
난데없이 코를 얻어맞은 늑대가 요란하게 항의했다.
녀석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뒤, 기진맥진한 채 읊조렸다.
“...근데 왜 그렇게 비싼 거야? 개당 10실링이면 장난이 아닌데... 마약 성분 때문인가?”
“음... 코카 버섯은 마나가 풍부한 지역에서만 자라요. 그만큼 근처에 강한 몬스터가 많이 서식할 확률이 높고요. 사용처는... 약품으로도 쓰긴 하는데 워낙 비싸서 포션을 제작할 때나 가끔 들어가는 편이에요... 보통은 다른 용도로 쓰이죠...”
“다른 용도? 그게 뭔데...?”
라디가 말꼬리를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로브 자락을 꾸깃하게 움켜쥐며 대답을 주저한다. 괜히 궁금해지게...
“...말 안 하면 나 삐질 거야. 아얏...! 어제 촉수에 당한 상처가...!!.”
“치... 치사해...!”
라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요.”
“뭐라고?”
“...라고요.”
“작아서 안 들려.”
“...귀족들이나 갑부들이 그... 밤일할 때 흥분을 돋구기 위해 쓴다고요...”
“버섯은 팔지 말고 아껴두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정말...! 이래서 일부러 말 안 한 거라고요!!”
“흐흐...”
이건 다 잘 보관했다가 좋은 데 써야지.
진통제. 진통제 용도로 사용해야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난 의료 목적으로 쓰려고 했는데 왜? 혹시 다른 생각 했어?”
“어...? 아, 아니 그... 그런 건 아니고...”
“말해봐 꼬맹아. 대체 뭘 떠올렸길래 얼굴이 시뻘개져선... 음?”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잠깐만. ....늑대야 너 혹시 밖에 나갔다 왔었어?”
컹..?
동굴 구석,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늑돌이 치곤 조금 크지 않아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발자국.
간밤에 다녀간 듯한 발자취는 모닥불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