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스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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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스승 #3
늑대 일행을 쫓아 조금 걷자 큼지막한 바위굴에 다다랐다. 굴 안쪽은 메아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규모로, 일전에 통과했던 동굴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으나 서른 마리 남짓 늑대를 수용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라디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뭐가?”
“뭐가라뇨! 몬스터가 자기 은신처를 보여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예요?! 하물며 그 사납기로 유명한 네눈박이 늑대가!?!”
라디가 내 어깨를 움켜쥐고 앞뒤로 흔들며 외쳤다. 늑대들의 시선이 쏠리자 신음하며 목소리를 낮췄지만.
“뭐, 얘랑도 며칠간 잘 지내왔는데 뭘 새삼스럽게...”
혀를 내민 채 헥헥거리는 늑돌이를 턱짓하자, 라디가 재차 다그쳤다.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마물은 대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하는 상대를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고요! 도란님도 드래곤 레어엔 바보 천치도 얼씬하지 않는다는 속담쯤은 들어보셨을 거 아니에요?!”
“얘는 드래곤이 아니라 개잖아.”
“지금 거기서 딴지를 걸 타이밍이에요?!! 대체...!”
컹?
“.....”
늑돌이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라디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숙여 녀석의 턱을 긁어주었다.
나는 동굴 구석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어쨌든 잘 됐지 뭐. 안 그래도 밤을 지낼 장소를 찾아야 했는데.”
오늘만이라면 자고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야생 몬스터와 함께 하룻밤을, 그것도 놈들의 보금자리에서 보낸다는 건 역사를 뒤져봐도 유례가 없지 않을까?
“정말...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쉬었다 가자. 자는 도중에 물어뜯기지만 않는다면 이 층에서 여기만큼 안전한 장소도 드물 테니까, 그리고...”
크응...
시선을 내리자 늑대가 애틋한 눈망울로 날 올려다봐왔다. 굳이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나와 녀석 모두 알고 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내일이면 늑대와 작별해야만 한다.
그간 함께 쌓아왔던 추억을 떠올리자 목이 메었다.
“...그러네요. 이제 마지막이구나... 늑돌아, 이리 와.”
킁...
늑대가 다소곳이 라디의 품에 안겨 꼬리를 늘어뜨렸다. 녀석도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평소보다 더 응석 부리는 눈치다. 분명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해우를 나누고 싶을 텐데도, 녀석은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떠날 기미가 없었다.
그 광경을 계속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 고개를 돌렸다.
씁쓸하게 부싯돌을 꺼내 들려는 찰나, 라디가 손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왜?”
“그... 불을 피워도 괜찮을까요? 혹시라도 늑대들을 자극하는 건...”
“그런가...?”
고개를 들자 이쪽을 예의주시하는 늑대들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심지어 눈이 네 개라 수도 두 배는 많게 느껴진다.
적대 관계에서 벗어나자 놈들은 처음 목격한 인간이 신기한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과연 지능이 뛰어난 녀석들답게 개성도 뚜렷해서 몇몇은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늑대도 있고, 대놓고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는 늑대도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우두머리 늑대는 동굴 입구에 주저앉아 우수에 젖은 눈매로 묵묵히 창공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뭐, 괜찮겠지. 얘도 처음에 불을 봤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그럴.. 까요...?”
“아마도, 거기 장작 좀 건네줄래?”
“.....”
라디에게서 땔감을 건네받고 부싯돌을 맞부딪혔다. 찰나, 어두운 동굴 안에 불똥이 튀자 일제히 시선이 몰려들어 식겁했지만, 다행히 흥분해 날뛰거나 하는 녀석은 없었다.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모닥불을 들쑤시자 따뜻한 온기에 얼어붙은 손발이 녹아내린다.
“살짝 쫄렸어요... 갑자기 확 쳐다봐서...”
“그러게... 사실 나도 그랬어. 뭐, 여기도 화산 지대가 있으니까 살아생전 불을 처음 목격한 건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드물 테지만.”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내일이 오면 아침 일찍 여기서 떠나야 할 터. 설원을 지나오며 굶주린 탓에 저녁이라도 먹고 싶지만, 이 많은 늑대 앞에서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는 건 아무래도 꺼려진다.
하는 수 없이 잠을 청하고자 짐더미에서 호랑이 모피를 꺼낸 순간
.....
“....!!!”
눈이 마주쳤다.
우두머리 늑대. 돌연 놈이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이지에 찬 눈동자가 내 몸뚱이를 관조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이다.
시선에서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저... 도, 도란님...? 지금 저희 뭔가 시, 실수한 거 같은데요...”
“그, 그러게...!”
“서, 설마 그 스노우 타이거가 친구였다거나 하는 건...”
“빨리 숨겨!”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황급히 털가죽을 도로 쑤셔넣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늑대가 서서히 거구를 일으켰다.
‘젠장...!’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곁눈질하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구가 보였다. 여전히 발소리 하나 흘리지 않을 정도의 은밀함. 저 덩치에 기척 하나 없다니.
모순적인 광경에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치솟는다.
다급하게 벽으로 물러서려는 찰나, 놈은 이미 내 등 뒤에 있었다.
“어, 어느새...!”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급히 바닥을 기어 거리를 벌렸지만, 놈은 내가 도망가든 말든 앞발을 뻗어 하얀 털가죽을 건져올렸다.
그와 동시에 썰매가 엎어지며 스노우 타이거의 이빨과 발톱이 우수수 바닥에 쏟아졌다.
......
정적.
“도, 도란님...! 빠, 빨리 사과해요!!”
“...그,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놈이 먼저 우리를 공격해서...!”
.....
“죄송합니닷!!!”
황급히 도게자를 박았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빌어 보면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 정작 그 호랑이는 내 손에 의해 가죽을 남기고 장렬하게 산화했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자니 익숙한 개발바닥이 내 뺨을 쿡쿡 찔렀다.
“야, 야..! 장난칠 때가 아니야...! 너도 빨리 빌어! 같이 싸웠잖아!!”
컹...!! 컹컹!!!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컹! 크르르... 컹!!
“....화난 게 아니라고? 그럼...”
천천히 고개를 들자 커다란 네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적의가 아니라...
컹! 크르르르...! 컹!!!
“뭐, 뭐라고 하는 거예요 도란님...?”
“....”
작게 마른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사,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데..?”
*
야생동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경험은 과거에도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별난 아버지를 둔 덕에 외딴 오지에 조난당하는 일이 잦았고, 그런 내게 야생이란 제2의 사회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그랬던 내게 홀로 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올가미 매듭은 이렇게 만든단다. 동그라미를 두 개 만들고, 교차하는 원 안에 로프를 집어넣으면 완성이야.]
[이건 카나 아그리아라는 식물이야. 줄기 겉에 있는 털을 벗겨내고 씹으면 장에서 기생충을 싹 씻어내 줄 거란다.]
[동물들은 물을 마실 때 제일 민감해. 덫을 설치할 땐 강가 주변이 아니라 길목에 설치해야 한단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은 건, 배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만물을 보고 배워라. 그들처럼 걷고, 그들처럼 생각해라.]
아버지는 내게 야생을 벗 삼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이는 내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1년.
나는 외딴 숲속에서 검 한 자루에 의존하며 살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잔뜩 굶주리던 나는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고, 짐승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나아갔다.
새앙토끼가 먹는 풀로 독초를 구별했고, 스라소니가 사냥을 마치고 남은 찌꺼기로 배를 채웠다. 이리가 물러가고 난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는 신중함과 진흙탕에 납작 엎드려 몇 날 며칠 먹이를 노리는 인내심을 배웠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들을 흉내 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야생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다.
아니,
단언컨대 이 왕국의 모든 역사를 뒤져봐도 유일무이할 거라고 장담했다.
컹!!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컹! 크르르... 컹!!
“....”
은빛 늑대.
놈이 날 동굴 밖으로 불러내었다. 대체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른다.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린 게 놈의 흥미를 끈 걸까.
아우우우우우!!!!!!
컹!!! 크르르... 컹!!
우우우우우!!!
“도란님... 이대로 괜찮을까요...?”
“글쎄다...”
라디가 잔뜩 흥분한 늑대들을 둘러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현 위치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바위산 중턱. 동굴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소다. 널찍한 원형 공간의 외각에는 늑대들이 줄지어 에워쌌고, 짙게 땅거미 진 창공에서는 눈송이가 하늘하늘 흩날렸다.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일단 얼떨결에 따라 올라오긴 했지만 이곳은 그저 빈 공터일 뿐. 사냥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련에 쓸 만한 나무나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폭포라도 있으면 좌선수련이라도 할 텐데.
살짝 초조한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우두머리 늑대가 서서히 신형을 돌렸다. 굳게 다물어진 주둥이 위의 네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나 긴장하게 만든다.
만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까무러졌겠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녀석이 커다란 앞발을 들어보였다. 녀석을 따라서 손바닥을 뻗었지만, 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잖이 당황하며 손뼉을 맞부딪히자 녀석이 무심하게 노려본다.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저... 제가 뭘 어떻게 하면...?”
“...혹시 마나를 발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애석하게도 나는 마나를 감지할 수 없다. 늑대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조금 난처해 보였다.
하지만 녀석이 앞발을 한 번 까딱거리자 시야에 변화가 생겼다.
바람.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에 이상한 기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정처 없이 떨어지던 눈송이가 명확한 흐름을 타고 첨단에 괴여든다.
“아...”
마력을 볼 수 없는 나를 배려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 건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부표들로 해류를 관측하는 것처럼, 휘날리는 눈송이의 움직임으로 마나의 흐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물에게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는 현 상황에 오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잠시, 녀석이 그대로 발을 내려 지면을 디뎠다. 그리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발톱을 맴돌던 눈송이들이 얇은 장막을 이루어 눈에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지면을 밀어내고 있다는 걸.
곧 그 눈송이들이 은빛 털가죽을 타고 올라가자 늑대의 기척이 희박해졌다.
네 눈동자가 날 지긋이 바라봐왔다.
이건 설마...
“기척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거야...?”
......끄덕.
놀랍게도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앞의 늑대가 내 말을 이해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내용에 경악했다.
기척을 줄인다..?
그 말은 즉 상대의 색적을 늦춘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어마어마한 이점. 모험가라면 누구나 불시에 습격을 받은 적이 있을 터, 기습당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쓸모가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강자들은 상대의 기척을 읽으며 싸운다. 호흡, 보폭, 시선,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비롯해 사소한 행동거지에서 정보를 얻고 다음 수를 준비한다. 기척을 읽기 힘들게 한다는 건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 준다.
이는 마물도 마찬가지.
더욱이 남들보다 뛰어난 반사신경과 스피드를 지닌 내가 이 기술을 전투에 접목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가 눈치채기도 전에 다가가 목을 베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거다.
필시 사기적인 능력이다.
“...그런 걸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거야...?”
복잡한 심경을 담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인간과 몬스터. 엄연한 적대 관계다. 어쩌다가 늑돌이와 친해져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 적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나와 녀석의 관계를 나타내자면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지.
하지만 눈앞의 늑대는 변함없는 눈길로 날 내려다보았다.
무리를 짊어지는 자의 책임감이 엿보이는 시선. 스노우 타이거 때의 싸구려 오만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긍지의 눈빛.
나는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놈에게서 강자의 자비를 목도했듯이, 그 또한 내게서 어떠한 가능성을 찾았다는 걸.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ㅡ
“...부탁해. 아니, 부탁드립니다..”
짧은 기간, 최선을 다해 이 기술을 완벽히 흡수해 보이겠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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