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12화 (112/375)

〈 112화 〉 스승 #4

* * *

[112] 스승 #4

“허억.. 헉...”

거친 숨소리가 울려퍼졌다.

바위산 중턱, 자그마한 공터에 전운이 감돈다. 아스스한 바람이 따갑게 늘어지자 은은한 달빛이 흑발에 내려앉았다. 발치에 내리깔린 적설은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늑대가 앞발을 내디뎌 정적을 깼다.

­───!!

그저 발을 내려놓을 뿐인 단순한 동작. 하지만 그의 발톱이 맞닿은 부분부터 바닥이 갈라졌다. 티 한 점 없던 눈밭에 긴 상흔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대기가 파열한다.

“크윽...!”

재빨리 후방으로 물러나자 이번엔 측면에서 소음이 일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파도가 적설을 가르며 쇄도해온다. 나는 단도를 사선에 내리그었지만, 모두 막아내지는 못하고 멀찌감치 튕겨나갔다.

­콰드드득!!

눈 위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며 제동한다. 잇새로 스며나오는 신음을 틀어막고 다시 질주했다. 머리를 숙여 바람이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 무거워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다그쳐 밤하늘 아래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하단에서 솟구치는 마력 칼날을 뛰어넘어 늑대 앞에 도착한 순간­

“으윽?!”

미처 보지 못했던 후속타에 얻어맞고 날아가 눈밭에 처박혔다.

만신창이가 된 팔다리를 가누며 간신히 고개를 들자 의연하게 내려다보는 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제기랄...”

일어서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대로 된 휴식조차 취하지 못하고 수련에 매진한 지도 꼬박 이틀. 열감을 품은 옷은 땀에 흠뻑 절어 악취를 풍겨댔다.

그래도 약간의 성과가 있긴 했다.

­저벅...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부르튼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발치에서 칠흑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나는 그 검은 연무를 전신으로 퍼트렸다.

지금껏 구르고 구르며 터득한 비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마력을 행사할 수 없는 나는 단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마나를 대체했다.

서서히 밀도를 높여간 아지랑이가 가슴팍까지 차올랐을 즈음,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시금 발을 구른다. 이번에는 확연하게 느린 속도로.

­투웅....!

눈밭을 가르며 회색 자국이 퍼져나갔다. 허나 좀전의 공격과는 조금 다르다. 마치 거미의 꽁무니에서 은실이 뿜어나오듯, 느릿하게 확산한다.

하지만 천천히 퍼져나가던 마력의 파동은 어느 임계점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형상을 갖추어 육박했다.

­파바바바바박!!!!!

“.....!!”

즉각 대응했다. 눈을 크게 뜨고 살수의 행방을 쫓았다. 반보 전진해 후방으로 치밀어오는 마력 칼날을 빗겨냈고, 더욱 가속해 사선에서 물러났다. 그물망처럼 뻗어있는 균열에서 은빛 호선이 뿜어나오자 온몸을 비틀어 회피한다.

­투웅...!

늑대가 한 번 더 발을 구르자 공터에 있던 눈더미들이 죄다 쓸려나갔다. 순식간에 발생한 충격파가 내게 당도하자 아지랑이가 불안하게 일렁인다. 침착하게 거리를 벌리며 기운을 갈무리하려던 차, 늑대가 재차 앞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보았다.

그가 눈 위를 밟는 찰나, 뒤꿈치를 들며 입방골에 무게중심을 싣는 걸.

실로 단순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발동작엔 이상하리만치 설명하기 힘든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상대의 배후로 파고드는 말톤의 보법처럼.

나는 즉각 뒤돌며 단도를 중단으로 들어올렸고, 어느새 내 후방에서 육박해오는 발톱을 막아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똑같이 되갚아주려는 순간­

“큭...?!”

다리가 풀려 맥없이 고꾸라졌다.

체력에 한계가 찾아왔음을 자각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달아오른 탓에 추위도 못 느낄 지경.

그렇게 한참을 땅바닥에 엎어져 신음하고 있자니 종아리에 푹신한 감촉이 와닿았다.

“....?”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랗고 말랑말랑한 육구가 보였다. 어여쁜 선명한 분홍빛에 눈길을 빼앗긴 것도 잠시, 그가 내 발을 툭툭 건드렸다.

­.....

“네...? 왜 갑자기...”

­.....

“서, 설마 부츠를 벗으라는 건...”

­...

“...제길.”

무언의 압박에 천천히 부츠를 벗고 얇은 모직으로 된 양말까지 잡아당기자 새하얀 맨발이 드러났다.

“윽...”

용기를 내어 서서히 눈 위를 즈려밟았다. 예상했던 대로 발바닥이 찢어질 듯 시려온다. 면도날로 피부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그만 주저앉으려는 찰나, 깊은 신뢰가 담긴 네 눈동자와 마주쳤다.

“....”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며 기를 모았다. 검은 기운을 다리에 두르고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하지만 발 구조부터가 다른 늑대의 동작을 모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넘어졌다. 시퍼런 타박상이 내 몸 곳곳에 늘어간다. 살을 에는 추위에 셔츠마저 얼어붙고, 발바닥이 찢겨나갔다. 새하얀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던 공터는 피와 진흙이 엉겨 붙은 진창으로 변했다.

아무리 시도해봐도 성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늑대가 굳건히 내 곁을 지켜 주었기에.

그렇게 점점 밤이 또 무르익어 가고, 간혹 사냥을 마치고 부산스럽게 몰려와 구경하던 늑대들도 돌아가 공터엔 깊은 적막이 내리깔렸다.

그때였다.

“.....!!”

언제부턴가 통각을 느낄 수 없게 된 발을 옮긴 순간, 전류가 등골을 타고 역류하는 듯 찌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조심스레 발바닥을 들어올리자 피가 찐득하게 늘어진다.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방금 동작을 재현하자­

­슈화아아악!!!

나는 전례 없는 가속과 함께 일보 전진했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드니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늑대가 보였다.

“서, 설마...!”

­.....크릉.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했던 그의 첫 미소.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해냈어...! 해냈다고!! 드디어...!!!”

이 순간을 위해 지난 며칠간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마나의 제약을 한 풀 벗겨내는 데 성공했다.

“방금 제대로 보셨죠?!! 한순간에... 아.”

­.....

나는 그제야 늑대의 코를 부둥켜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팔에서 힘을 빼고 놓아주었지만, 다행히 그는 내 무례에도 언짢아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시도해보라는 듯 시선으로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게 분명... 됐다.”

한 번 성공하자 감이 잡혔다. 전신을 나른하게 이완시킨 뒤 종골에서 힘을 빼고 지골로 바닥을 디뎠다. 이어서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단도의 기운으로 가속하자 순식간에 풍경이 뒤로 지나갔다.

힘을 쓴 반동으로 탈력감이 찾아오는 걸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자 단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공하셨나요 도란님?”

“아, 왔어? 그래, 드디어 해냈다! 무려 이틀 만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도란님이라면 해내실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고기를 좀 구워왔는데 지금 드실래요?”

“그래, 이제 다 끝났으니까 내려가서... 음?”

대충 옷가지를 추스르고 보금자리로 돌아가려던 찰나, 말캉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늑대가 어깨에 육구를 들이밀고 있었다.

맹렬한 불안감이 몰려든다.

“어... 왜요...?”

­.....

“...아직 기척을 죽이는 방법을 못 배웠다고요...?”

­.....

­끄덕.

“.....”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도란님...”

야.

*

“...끝났어요 도란님...?”

“.....”

“그... 식사라도 좀...”

“....”

“....무릎 내어드릴 테니 이리 오세요.”

­털썩!

“도, 도란님...!!”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인가 아침이 찾아왔고, 몇 번인가 밤이 찾아왔다.

하룻밤만 머물다 갈 계획이었던 당초의 예정은 무산된 지 오래. 늑대는 잘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고 날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하루에 한 번, 라디가 고기를 들고 올라와 줄 때야 비로소 바닥에 엎어져 숨을 고를 뿐.

어느새 늑대를 대하는 나의 호칭도 달라져 있었다.

“...스승님.”

­.....킁.

“스, 스승?”

바위굴 입구에서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털가죽에선 일말의 피로감도 찾을 수 없었다. 막 물에서 건져 올린 미역처럼 축 늘어진 나와는 대조적으로.

머리맡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꼬맹아... 얼마나 지났어...?”

“...수련에 돌입하고 꼬박 나흘이요.”

“그런가...”

이젠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기처럼 라디에게 몸을 뉜 채 피부를 맞대고 있자니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컹! 컹컹!!

“그래... 왜 안 오나 했다.”

늑돌이가 달려와 내 얼굴을 핥았다. 지난 사흘간 단도의 힘을 이끌어내며 일시적으로 감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구별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녀석과 정다운 해후를 나누는 도중, 라디가 내 부츠를 벗겨내며 기겁했다.

“도, 도란님...! 발 상태가 완전 엉망이잖아요!!”

“하하...”

“웃을 때가 아니에요!!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 발이 이렇게 개발새발인 거예요?!!”

“...많은 일이 있었다고만 해둘게..”

그간 늑대 스승과 함께 맨발로 이산 저산을 누볐다. 젖은 바위에 미끄러지기를 수십 번이고, 벼랑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붙들고 간신히 매달리기도 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라디가 다급하게 내 발을 품에 안고 녹였다. 시퍼렇게 부르튼 양발을 보면 걱정이 들 법도 하지만...

“스승님... 부탁드립니다...”

­.....킁.

“무, 무슨...!”

늑대가 침을 늘어뜨려 내 발바닥 위에 떨어뜨리자 상처가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완치 수준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걸을 순 있다.

라디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도란님을 만나고 나서부턴 터무니없는 일만 일어나요... 역사서를 뒤져봐도 몬스터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도란님이 유일할 거예요...”

“흐흐... 그러는 너도 제법 이것저것 배우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스승님과 수련에 매진한 사흘, 라디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녀석도 늑대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 먹잇감을 구해왔으니까. 원체 똑똑한 녀석이니 분명 보고 배운 게 있을 거다.

주변 늑대들의 분위기만 봐도 그렇고.

­헥 헥...

­끼잉...

녀석들은 그새 라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꼬리를 내리고 모닥불 곁을 맴돌았다. 대체 뭐로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은근슬쩍 다가와 수줍게 뺨을 문대는 녀석들도 있다.

얘네 굉장히 포악한 몬스터라고 하지 않았나...?

의아하게 쳐다보자 라디가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 그건... 익힌 고기가 입에 맞았나 봐요. 늑돌이가 먹는 걸 보고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길래 몇 점 던져줬더니 줄을 서서 받아먹으러 오더라고요... 같이 사냥하러 다니면서 친해진 것도 있고요.”

“그래...? 별일이네... 늑대 무리랑 사냥을 나서는 건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아, 내일도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 같이 가실래요?”

“그래, 근데 그건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 피곤해...”

긴장이 풀리자 그간 쌓여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그대로 기절해버릴 정도로.

“그럼 지금 바로 주무세요. 모피를 깔아뒀으니...”

“그건 그렇고 나 엄청 열심히 했는데... 혹시 뭐 없어? 포상이라던가...”

말꼬리를 흐리며 은근히 눈짓했다. 라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내가 말하는 바를 눈치챘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귀, 내어드려요...?”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

나는 따뜻한 모피 속에서 라디의 꼬리를 껴안은 채 잠들었다.

간혹 허리를 휘며 움찔거리는 그녀가 매우 귀여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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