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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13화 (113/375)

〈 113화 〉 스승 #5

* * *

[113] 스승 #5

이튿날.

부산스러운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동굴 안은 짙은 어둠이 가득했고, 곳곳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돌바닥에 울퉁불퉁한 무늬를 그리는 거로 보아 한밤중인 모양이다.

타다 남은 잔불을 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반사적으로 투구부터 확인했지만 있을 턱이 없다. 비몽사몽 눈가를 비비던 도중, 야음을 가로지르는 시꺼먼 음영에 튕기듯이 일어났다. 몬스터 특유의 서늘한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늘어진다.

“대체 무슨... 아.”

바닥에 놓인 라디의 옷가지를 보고 나서야 늑대 소굴에 와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막상 여기서 잠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던가. 그간 쉬지 않고 수행에 매진했으니.

대충 옷가지를 걸치고 동굴 입구로 나아가자 익숙한 음영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도 전에 늑돌이가 안겨들었다.

­컹!!

“그래, 그래. 잘 있었어?”

­크응!! 컹!!

“일어나셨어요 도란님?”

“그래, 상의가 벗겨져 있던데 네가 한 거야?”

“네, 땀도 안 닦고 주무시길레... 어찌나 곤히 자던지 죽은 줄만 알았어요.”

“그야 원체 피곤했으니까...”

늑대를 쓰다듬으며 난처하게 미소지었다.

그 정도로 강도 높은 단련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

“근데 무슨 일 있어? 왠지 다들 부산스러운데.”

주위를 둘러보자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몇몇 늑대는 수선스럽게 동굴 안팎을 오갔고, 어떤 놈들은 잔뜩 흥분해 고개를 치들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은연한 달빛이 기운 라디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언제나 입고 다니던 로브 대신 수선이 끝난 토끼 가죽을 걸치고 있었다. 체형에 딱 맞춰져 쭉 뻗은 등의 곡선이 매혹적으로 도드라졌고, 얼굴에는 새하얀 도료로 칠한 문양이 어지러이 수놓았다.

야생미 물씬 풍기는 광경, 기울어지는 달빛을 받으며 오연하게 선 자태에선 평소와는 다른 성숙함이 느껴진다.

색다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설레던 찰나, 벚꽃색 입술이 벌어지며 은은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조금 있으면 사냥을 떠나거든요. 저도 같이 갈 예정이라 준비한 거예요.”

“아 그래서 다들... 무슨 몬스터를 잡으러 가길래 그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라디가 홀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레이트 매머드를 잡으러 가요.”

*

늑대들과 함께 설원으로 향했다. 아직 몸의 피로가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몬스터와 함께 사냥을 해보겠는가.

이번 기회에 마물들의 사냥 방식을 더 자세히 알아두면 추후에 큰 도움이 될 터.

한데...

“...좀 편해 보인다 너?”

“...어쩔 수 없잖아요.”

라디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난처하게 내려다봤다. 녀석은 늑대 위에 올라탄 채 편하게 눈밭 위를 질주했다. 그에 반해 나는­

­.....킁.

“자, 잠깐...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도리도리.

“제길!!”

수련의 일환으로 드넓은 눈밭을 부랴부랴 달려야 했다. 어디 좀 태워주면 덧나나.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퍼질러졌을 즈음에야 늑대들이 멈춰섰다.

“헉... 헉... 뭐야...? 도착..한 거야...?”

“쉬잇... 사냥감이 근처에 있어요.”

“...어디 보자.”

조심스레 언덕 너머로 고개를 들자 맞바람에 흑발이 나부꼈다. 어두컴컴한 야음 너머 평지에는 다갈색 털가죽을 지닌 형체들이 떼거리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매머드 무리.

7계층에 떨어진 직후 처음으로 마주했던 생명체. 나 혼자서라면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상대다.

이 강력한 몬스터를 잠시 후면 마물들과 합심해 사냥한다고 생각하니 전율이 일었다.

어떠한 방식으로 전투를 개시할지 가슴을 졸이던 찰나, 라디가 내게 속삭였다.

“도란님은 어디에 붙으실 거예요?”

“어디에 붙다니?”

“본대에 합류할지 별동대에 가담할지 말이에요.”

그런 것도 있냐.

“너는 어딘데?”

“저는 별동대에서 놈들을 기습하는 역할이에요.”

“그래? 그럼 난 본대에 가세할게.”

몇몇 몬스터들은 구체적인 전술을 구사한다는 걸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몸소 겪어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라디가 언덕에서 물러나 시야 저편으로 사라지자 늑돌이가 달려와 반겨주었다.

­...킁!! 킁!!!

“뭐야, 너도 본대였어?”

­킁!

“그래, 우리 어디 한번 잘 해보자. 예전에 토끼 사냥했을 때 기억하지? 그때처럼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거칠게 목덜미를 끌어안자 녀석이 요란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오랜만에 나와 사냥하는 게 기쁜 모양. 결국 녀석은 근처에 있던 다른 늑대의 주의를 받고 난 뒤에야 잠잠해졌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오매불망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

능선 너머로부터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서서히 뿌리를 뻗어오는 관목처럼 불길한 기척.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언덕 너머를 엿보자 기이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건...’

­.....

어렴풋한 밤안개를 뚫고 잿빛 형체들이 매머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한계까지 납작하게 자세를 낮추고 눈 덮인 고원을 가로지르는 이들.

처음엔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라디?’

선두에 선 존재에게서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와인빛 로브 대신 하얀 털가죽을 덮은 그녀는 설원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네 발로 날렵하게 눈밭을 기는 모습에선 수인의 일면이 엿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목표물 근처까지 접근한 순간ㅡ

­아우우우우우우!!!!!!!!!!!!

공격이 개시되었다.

한 늑대의 울부짖음으로 전황이 일변했다. 슬금슬금 엎드려 근접하던 늑대들이 일제히 일어나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거리며 갈색 털가죽에 쇄도했고, 갑작스러운 기습에 맞닥뜨린 매머드는 잔뜩 얼어붙어 대처가 늦어졌다.

그중 제일 돋보이는 건 단연코 라디였다.

녀석은 제 몸집의 세 배가 넘어가는 늑대 위에 올라타 능숙하게 매머드 사이를 질주했다. 측면으로 파고들어 급소에 쇠뇌를 격발하고, 거구 아래를 지나며 다리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그녀가 요리조리 전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하얀 눈보라가 솟구친다.

­뿌우우우우우!!!!!!

­컹!!! 컹!!!!

뿔나팔을 연상시키는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매머드도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반격을 개시했다. 덩치 작은 새끼들을 원형 중심에 모으고 수컷들이 외각에 서서 늑대의 맹공에 대처했다. 이어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놈이 넓적한 발을 들어올려 라디를 짓누를 기세로 내려찍는다.

“제기랄!!!”

황급히 단도를 거머쥐고 뛰쳐나가려 했으나­

“어...?”

“.....”

라디는 늑대의 갈기를 붙잡고 기민하게 방향을 틀어 매머드의 일격을 피했다. 이어서 솟구치는 신형. 그녀가 늑대 위에서 뛰쳐오름과 동시에 볼트를 발사했다. 즉각 매머드의 길쭉한 코가 육박해 오지만, 몸을 뒤틀어 흘려보내고 되려 발판으로 삼아 도약했다.

아찔한 곡예를 선보인 뒤, 라디의 손목에서 발발한 은빛 섬광이 밤공기를 가로질러 홍채에 적중하자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부드럽게 눈 위에 착지한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니 늑대들이 시력을 잃고 방황하는 매머드에게 달라붙어 숨통을 끊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침음했다.

“...어쩌면 우리가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컹.

나와 늑돌이는 시선을 마주하며 난처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

결국 우리가 나서는 일은 없었다.

“...압도적이네.”

­컹...

별동대가 활약해준 덕에 본대 없이도 충분한 사냥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제각기 토막 낸 고기를 들고 동굴로 돌아오자 잔류했던 늑대들이 반갑게 맞이해왔다.

등 뒤에 짊어진 매머드 고기를 내려놓으며 읊조렸다.

“...늑돌아, 쟤 원래 저렇게 강했냐?”

­.....킁.

어쩐지 라디에게 말을 걸기가 힘들다. 주위를 둘러싼 늑대들 때문이 아닌, 특유의 분위기가 그녀를 범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번 일로 라디의 잠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다시금 깨달았다.

달리는 늑대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는 균형 감각과 순발력. 볼트 한 발로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정확도와 그를 뒷받침하는 동체 시력.

평소엔 간과하기 쉽지만, 그녀 또한 수인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걸 이따금씩 실감하곤 한다.

“.....”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기며 당당하게 선 옆모습을 목격하자 묘한 열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더 쳐다봤다간 무언가 저지르고 말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앳돼 보이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뭘 그리 뻣뻣하게 굳어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수상한데... 저는 잠시 땀 좀 닦고 올 테니 그동안 불 좀 지펴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아, 잠깐.”

문뜩 떠오른 생각에 손목을 붙잡자 라디가 의아하게 올려다봤다.

“왜요 도란님?”

“...아까 일어났을 때 옷가지가 개어져 있던데 그럼 지금 속에 알몸이야?”

“읏...?!”

라디가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정곡인 모양. 토끼옷 안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어, 어쩔 수 없잖아요!! 로브는 너무 눈에 띄니 모피를 입어야 하는데 속에 옷을 입으면 땀으로 범벅된다고요! 워낙 통풍이 안 돼서... 도란님도 제가 땀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으면 싫잖아요...?”

“아니, 난 그냥 너라면 뭐든 좋은데?”

“네...? 아, 아니 잠깐...!”

참지 못하고 그녀를 벽에 몰아붙혔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늑대들이 귀를 쫑긋거리며 이쪽을 돌아본다.

“...지금 하자.”

“네, 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왜 갑자기 흥분하신 건데요!?”

“벗길게.”

“잠깐! 지금은 안 돼요!! 늑대들이 쳐다보잖아요!! 이거 좀...”

“사람도 아닌데 뭐 어때.”

“쟤들도 알 건 다 안다고요!! 아, 아무튼 나중에 둘만 있을 때 해드릴 테니 지금은...!”

라디가 횡설수설하더니 황급히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씰룩거리는 토끼 꼬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늑돌이가 내 발치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끙...?

“...그런 게 있어.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끄응.... 컹! 컹!!

“알았어, 보채지 좀 마.”

녀석을 쓰다듬으며 부싯돌을 꺼내들었다. 고이 보관해둔 마른 검불 쪼가리에 불을 붙이자 늑돌이가 땔감을 물고 다가왔다.

“고맙다 인마... 그러고 보니 너랑도 오늘 밤이 진짜 마지막이네.”

­킁...

내가 장작을 받아들자 녀석이 쓸쓸하게 주저앉아 허벅지에 뺨을 문댔다. 스승님과의 수련도 끝난 바, 내일이 되면 늑대 무리도 이곳을 떠난다. 나와 라디도 제 살길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뭐, 고마웠다.”

옆구리에 난 흉터를 보니 여러 감정이 눈앞을 흐렸지만,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정 섞인 눈길을 보내왔다. 그 변함없는 신뢰를 마주하고 있자면 인류의 동반자라고 불리는 개의 조상이 늑대라는 걸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오늘 밤은 기필코 최고의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다짐하며 장작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까지 아껴둔 허브 이파리마저 전부 꺼내 고기에 밑간을 치자 호기심 많은 눈동자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익힌 고기를 마음에 들어했다고 했었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손짓한 후, 녀석들이 가져온 고기들까지 전부 모닥불 위에 얹었다. 얼마 머잖아 고소한 냄새가 동굴 안에 진동한다.

“벌써 시작했어요?”

“그래, 너도 빨리 와.”

말끔해진 라디가 젖은 머릿결을 매만지며 다가왔다. 처음 만났을 때 목덜미 부근까지 내려왔던 단발은 어느새 어깨춤에 닿을 정도까지 자라났다. 시트러스 계열 향초로 머리를 감았는지 녀석이 내 곁에 앉자 희미한 감귤 향이 풍겼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도란님? 왜 그렇게 빤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에게 화답한 뒤, 눈앞의 고기를 뒤집었다. 이제 잠시 후면 먹을 수 있겠지. 그런데...

“...스승님은 안 드세요?”

­......

저만치 동굴 입구에 앉아 있는 그에게 물었지만 영 요지부동이다. 은근슬쩍 곁눈질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로 보아 관심이 있는 건 분명한데... 체면 때문일까?

“난감하네...”

이래선 다른 늑대들도 곤란하다. 지금까지는 대장이 부재중이라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까.

늑대들의 주둥이에서 질질 떨어지는 침이 수영장을 만들 기세였기에, 하는 수 없이 가장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를 덜어내 동굴 입구로 가져갔다.

“...드세요.”

­.....

“스승님이 안 드시니까 다른 애들이 곤란해하잖아요. 한 번 맛이라도 보세요. 제법 입에 맞을걸요?”

­....

그는 고기를 목전에 두고 상당히 머뭇거렸지만,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한 입 베어물었다.

“...입에 맞으세요?”

­......크릉.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똑똑히 보았다. 새하얀 꼬리가 좌우로 살며시 흔들리는 걸.

­컹!!

­크르르르...

­컹컹!!!

“그래, 다들 좀만 기다려.”

흐뭇한 미소를 숨기며 모닥불로 돌아오자 늑대들이 잔뜩 아우성쳤다. 한 번 맛을 들이자 녀석들은 생고기를 마다하고 나와 라디 주변에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전부 다 구워 줄 수는 없을 테지만, 실랑이를 벌이는 놈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꼭 무슨 목장에 온 거 같아요...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양들을 보는 기분이네요.”

“그러게... 양이 아니라 늑대지만.”

녀석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다 보니 밤이 무르익어 갔다. 창공에서 내리쬐는 별빛은 점차 진해지고, 공기는 짙은 아취를 품고 너울거렸다.

하지만 동굴 안에 시끌벅적한 소음이 차오를수록 애절한 마음도 늘어간다.

정말로 작별이 머지않았음을 깨닫기에.

라디가 검은 늑대를 끌어안고 잔잔하게 털가죽을 쓸어내렸다. 나도 그 옆에 걸터앉아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하릴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마음을 녹였다.

문뜩 녀석과 함께한 나날이 떠오른다.

처음은 갈라진 푸른 빙하 틈에서였지. 인간과 마물. 서로를 물어뜯을 운명이었던 우리는 극적으로 뭉쳤고, 수많은 난관과 맞닥뜨렸다.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린 얼음 동굴을 헤쳐나오기도 했고, 서로의 체온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솥밥을 먹은 동지였으며, 생명의 은인이었고, 힘을 합쳐 스노우 타이거라는 강적을 쓰러뜨렸다.

우리는 인간과 몬스터 이전에 친구이자 동료였다.

­.....컹.

“....그래..”

옆구리에 난 흉터를 어루만졌다. 녀석이 날 구하다가 생긴 상처. 그 쓰라린 흔적을 매만질수록 내 가슴도 아려왔다. 이건 녀석이 나에게 보인 신뢰의 증표이자 내 나약함의 상징이었기에.

그렇게 울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아우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우!!!!

­아우우우우우우우!!!!

돌연 늑대들이 크게 울부짖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드높게 포효했다.

낯선 이방인들을 배웅하듯 높고 우렁차게.

마지막 밤을 추억하기라도 하는 듯 그들만의 방식으로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라디는 쭈뼛쭈뼛 일어서 달그레한 뺨으로 늑대들과 함께 춤을 추었고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적적하게 수통을 기울였다.

지구에 살았을 적, 티베트 고원에 사는 부족들에게 전해 들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땅거미가 진다네

다들 어서 대문을 잠그게

땅거미가 진다네

다들 어서 대문을 잠그게

밤이 오면 잿빛 전사들이 나타나

굶주린 배를 잡고 배회한다네

그 어떤 걸로도 그들을 막아 세울 수 없으니

빨강 망토도, 어리석은 후드도

독이 든 사과도, 굳건한 강철 우리도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길들일 수 없으니

옅은 달빛이 비추는 광야에서 멀어지리

달의 전사들은 숲 이슬과 마른 살의 내음를 풍기며

짙은 저녁노을을 타고 남쪽으로 질주하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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