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14화 (114/375)

〈 114화 〉 탈출 #1

* * *

[113] 탈출 #1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애틋했던 밤이 지나고,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스름한 여명이 세상을 맑게 비추자 우리는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수북한 눈이 내려앉은 고원으로 향했다.

서른 마리 남짓 늑대 무리, 깊게 갈라진 벼랑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그럼.. 밥 잘 먹고 잘 지내야 해?”

­컹...

“어디 가서 다치지 말고... 앞으로는 무리랑 안 떨어지게 조심하고.. 또... 도란님은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

나는 묵묵히 시선을 굳혔다.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작별이 이렇게나 힘들 줄은 몰랐다.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자니 녀석이 먼저 다가왔다.

­끼잉....

“....잘 지내라. 고마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더 했다간 감정이 북받쳐 녀석을 붙잡고 말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며 다정한 미소로 쓰다듬자 늑대가 내게 안겨들었다.

­컹..! 컹컹!!

“...나도 널 만나서 즐거웠어. 너와 함께 했던 나날은 잊지 못할 거야.”

­컹! 크르르.. 컹!!

“또 오라고...? 하지만...”

­컹!! 컹!!!

“.....그래, 알았어. 언젠가 다시 만나자.”

각오했다.

만일 내가 강해진다면,

이 고난과 역경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면,

반드시 이곳을 다시 찾아 녀석을 만나러 오겠다고.

늑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자 라디가 미련이 남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이름도 못 지어줬네요...”

“그러게... 원래는 더 일찍 지어주려고 했는데... 이름 갖고 싶어?”

­컹!!!

“그렇다면....”

잠시 턱을 짚으며 고민했다.

이왕이면 멋진 이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기억에 오래오래 남도록.

“...꼬맹아, 너는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잠시 손을 떼고 라디를 바라보자 녀석은 나와 늑돌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글세요... 도란님이랑 닮았으니까... 도돌이...?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잠깐, 나랑 얘랑 닮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허리를 자르자, 라디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털 색깔이 똑같잖아요. 도란님도 검은색, 얘도 검은색. 비슷하지 않아요? 은근히 소심한 면도 똑같고... 서로 죽도 척척 맞고...”

“.....”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나와 녀석은 생각보다 비슷한 구석이 많다. 남들과는 다른 털 색깔부터 식탐이 강하다는 점이나, 동료들과 떨어져 고립되었었다는 것까지. 인정하긴 싫지만, 성격도 살짝 닮은 것 같다.

잔잔하게 털가죽을 어루만지고 있자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울시’ 어때?”

“울시요?”

“그래, 꽤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컹!! 컹컹!!!

늑대가 살갑게 뺨을 문댔다.

“뭐...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면...”

라디가 울시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곧 안타깝게 눈썹을 늘여뜨렸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너무 아쉬워요... 하다못해 작은 증표라도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증표?

그래, 그게 있었지!

“잠깐만 기다려봐.”

“도란님?”

배낭 깊숙한 곳에서 스노우 타이거의 소재를 꺼내들었다. 그중 적당한 크기의 이빨을 골라내 단도로 구멍을 뚫은 다음, 가죽 띠를 꼬아 만든 끈을 안에 넣고 통과시켰다.

“자, 이리 와봐.”

단시간에 완성한 이빨 목걸이를 울시의 목에 걸어주자 녀석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눈치.

“그래... 나중에 고기 잔뜩 싸들고 보러 올 테니까 잘 지내고 있어. 엄한 모험가들한테 다치지 말고... 만약 그런 놈들이 오면 엉덩이를 확 물어뜯어 버려.”

­컹!!

“...도란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뭐 어때. 그깟 놈들보다 우리 울시가 훨씬 중요한데, 그치?”

­컹! 크르르.... 컹!!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그래... 그럼 이제 정말로 작별이야. 잘 지내,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 거대한 은빛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가르침은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울시를 잘 부탁합니다.”

­크릉...

늑대가 앞발을 내저었다. 이후 은빛 마력이 담긴 파동이 부드럽게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몸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름의 작별 인사인 걸까.

“....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는 울시의 그림자에 가슴이 미어진다.

새하얀 눈에 가려져 더 이상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먹먹하게 입을 열었다.

“...아쉬워?”

“....네, 그동안 많이 정들었는데.”

한줄기 눈물이 라디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나는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

“이제 거의 다 왔나 보네.”

“그럴까요...?”

“...그래야지.”

늑대와 헤어지고 이틀이 더 지난 지금.

드디어 던전이 끝날 조짐이 보인다.

뿌연 눈발이 잠시 뜸해지기라도 하는 때에는 희미하게나마 저 멀리 던전의 벽이 비쳐 보였다. 곳곳에는 화산 활동의 부산물로 보이는 검은 암반이 기괴하게 돋아났고, 해가 지고 나면 활화산 특유의 붉은 기운이 지평선 너머에서 남실거렸다.

이 앞으로는 더 이상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듯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슬슬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괜찮아...?”

“전 모피를 걸쳐서 거뜬해요. 도란님이야말로 힘드실 텐데...”

“이 정도는 끄떡없어, 자.”

“....고마워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설풍을 헤쳐나갔다. 그간 늑대의 굴에서 충분한 정비를 마친 덕에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휴식할 때를 제외하곤 무게만 차지했던 토끼 가죽을 체형에 맞게 수선한 것도 한몫했다.

작은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걷다 보니 금방 해가 저물었다. 던전 곳곳에 산재한 발광 이끼는 서서히 빛을 잃고 푸른 광채를 흩뿌린다. 그 광경은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는 듯했다.

우리는 서둘러 밤을 지새울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설동을 팔까? 아니면...”

“글쎄요... 여기는 암석들이 많으니까 잘 둘러보면 적당한 장소가 있을지도...”

화산 지대가 멀지 않은 덕에 바위 구조물이 유독 자주 눈에 띈다 어쩌면 하룻밤을 보내기에 적합한 바위틈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충분할 테니.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던 차, 라디가 무언가를 발견해냈다.

“도란님, 저기는 어때요..?”

“저건... 동굴? 우리 둘이 자기엔 딱 적당하겠네. 혹시 주변에 위험한 기척은 없어?”

“음... 일단 별다른 냄새는 안 나요. 마물의 털이나 발톱 자국도 안 보이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심해선 안 되겠지만요.”

“그래? 그럼 잠시만...”

“....”

감각을 갈무리했다. 눈을 감은 채 바닥을 짚으며 집중했다. 지난 늑대 스승과의 나흘 동안 그가 어떻게 상대를 감지해내는지 숱하게 보고 배웠다.

이윽고 발치를 옅게 뒤덮은 아지랑이를 거두며 읊조렸다.

“....이 안에 큰 마물은 없는 것 같아. 자잘한 생물은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가요...?”

라디가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날 올려다봤지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고는 짐을 내려놓았다.

배낭에서 꺼낸 장작과 불쏘시개로 불을 피우고 난 뒤에는 호랑이 모피를 바닥에 깔고 드러누웠다.

“...이리 와.”

“.....”

라디가 말없이 다가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당기자 내게 체중을 실으며 기대온다. 그 옆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여 머리칼을 걷어주었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울시는 잘 있을까요..?”

“헤어진 지 고작 이틀밖에 안 됐는데 잘 있겠지 뭐.”

“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투명한 얼음을 타고 흐르는 빛처럼 신묘한 색채가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만약... 저희가 떠난 뒤, 모험가한테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죠...? 시간이 지나면 이 층에도 강한 인간이 찾아올 텐데... 만약 울시를 헤치기라도 하면...”

“괜찮아. 울시는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니까. 스노우 타이거의 일격을 맞고도 살아남았잖아? 목숨 하나만큼은 끈질기다고.”

“....”

귀를 어루만지며 위로했지만, 라디가 여전히 침울한 기색이길래 조금 더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정말로 괜찮을 거야. 거기엔... 스승님이 계시니까...”

그래, 그가 곁에 있는 한 울시는 안전하다. 수련에 정진한 나흘, 나는 그가 얼마나 막강한 존재인지 직접 목도했다.

“그리고 또 모르지. 뼈 목걸이를 보고 모험가들이 그냥 놔둘 수도.”

이 던전은 오랫동안 미발견된 탓에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적어도 이 계층엔 공략에 실패했다던 A급 파티 이외에는 나와 라디가 최초일 게 분명하다.

그만큼 인간의 존재가 생소할 터, 네눈박이 늑대가 아무리 사람에게 적대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교류했던 울시네 무리에 한정해서는 인간과의 교전을 꺼릴 가능성도 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럴 거야. 분명히. 그러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래야 나중에 다시 만나든지 하지.”

“저희가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그야 물론이지. 저거 보여?”

동굴 밖, 광활하게 뻗은 창공의 일각을 가리켰다. 푸른 빛무리가 빼곡하게 들어선 하늘의 한구석에는 지상에서 상공까지 맞닿을 정도로 드높은 바위기둥이 여럿 돋아나 있었다.

“...수직굴이야. 저 안에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게 틀림없어.”

눈에 뒤덮여 희끗희끗하게 빛나는 돌기둥은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떠받드는 동량을 보는 듯하다. 적어도 저 중 하나에는 상부로 이어지는 길이 있겠지.

“저기까지만 도달하면 이제...”

“그래,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 지긋지긋한 추위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천히 팔뚝을 어루만지니 라디가 작은 탄식을 흘렸다. 이내 부드럽게 살갗을 타고 내려가 허리를 끌어안자 마른침을 머금는다. 나는 그대로 그녀와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고, 살며시 흔들리는 꼬리를 엄지와 검지로 지긋이 쓸어내리며 더욱 밀착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녀석을 이불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서 빨리 7계층에서 나가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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