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탈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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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탈출 #2
“젠장!!”
이걸로 벌써 네 번째.
홧김에 주먹을 내려치자 눈더미가 흘러내렸다.
던전 천장까지 뻗은 암석 기둥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상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내부가 바위로 꽉 막혀있거나 가팔라서 기어오르기조차 불가능한 게 대부분이었다.
“제길...”
거친 탄식을 내뱉으며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창날로 찌르는 듯한 허기에 시달리며 탈출구를 찾은 지도 벌써 이틀째. 곧 이 지긋지긋한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도란님...”
“...미안해, 이번엔 있을 줄 알았는데...”
“자책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라디가 부드럽게 손을 겹쳐왔다. 내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따뜻한 마음씨가 전해져 온다. 녀석도 몹시 힘들 텐데 여전히 불평 한번 내뱉지 않는다. 정말 내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
라디가 곁에 앉아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우리 같이 다음 장소로 가봐요. 이번에야말로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이제 마지막이다.
이 근방에 남은 기둥은 하나. 거기에서도 탈출구를 찾지 못하면 한참을 더 이동해야 한다. 또 한 번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으며 설원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말이다.
라디가 날 안심시키고자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되려 그럴수록 내 마음은 타들어 갔다. 녀석은 이런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팔자가 아니니까.
힘겹게 일어서 걷기 시작하자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라디는 내 팔뚝을 쭈물거리며 기분을 북돋고자 애썼다.
“...난 괜찮아.”
“괜찮기는... 도란님은 생각하는 게 얼굴에 훤히 다 드러난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녀석이 손을 뻗어 살며시 내 흑발을 들추었다. 까치발을 들며 눈동자를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기분 풀면 이따가 오늘 밤에 좋은 거 해드리려고 했는데...”
“...좋은 거?”
“.....”
녀석은 새침하게 올려다보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앞서나갔다.
“아, 뭔데. 좀 알려줘.”
“네? 뭘요?”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게 맞아?”
“정말... 도란님은 알기 쉬워서 좋네요. 진짜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라디가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기양양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학심이 들끓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만만치 않게 밝히잖아. 이 요망한 꼬맹아.”
“....제가 언제 밝혔다고 그래요?”
“평소에 은근히 기대하는 거 다 알거든? 저번에는 꼬리까지 흔들며 일부러 유도했으면서.”
“자, 잠깐..! 그건...”
“게다가 너 은근 냄새 패티쉬가 있는 모양이던데... 몰래 맡으면 모를 줄 알았어? 요 발정 난 꼬맹아.”
“그, 그만...!! 으.. 으...”
덮어두었던 치부를 발가벗기자 라디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머리 위에서 김을 뿜어댈 기세. 감파란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찔끔 고여나왔다.
“미안, 재밌어 보이길래 장난 좀 쳤다. 그래도 덕분에 기분 풀렸으니 안심해.”
“그,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녀석이 입을 쩍 벌리더니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나는 그 시선을 능청스러운 미소로 덮으며 끌어안았다.
“...이거 놓으세요.”
“싫어.”
“...저라서 다행인 줄 아세요.”
“그럼 당연하고말고. 난 이제 너 없으면 안 돼.”
“.....”
라디가 손아귀에서 힘을 빼더니 살며시 입꼬리를 풀었다.
“던전에서 나가면... 그때는 정말 끝까지 해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잿빛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내 기분을 북돋아 주기 위해 서두를 꺼냈다는 건 알고 있다.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지만, 마지막 돌기둥을 훑어볼 정도는 되겠지.
발치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거대한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장에 맞닿을 정도로 높게 솟은 암반. 그 자태는 마치 던전을 떠받드는 기둥을 보는 듯하다. 어떻게 이런 지물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우면서도, 석회 동굴에 자라난 석주를 생각하면 그럭저럭 납득은 간다.
아마 비슷한 원리로 형성된 게 아닐지.
완만한 설산 중앙에 돋아난 기둥을 향해 나아가던 도중, 주변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꼬맹아, 근처에 다른 몬스터는 없어?”
“음... 그게..”
라디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곤란한 듯 눈매를 늘어뜨렸다.
“...이상하게도 이 산에 올라온 뒤로부터는 아무 기척도 안 느껴져요.”
“그래?”
“네, 마치 이 근처에는 아예 마물이 서식하지 않는 것만 같아요. 저기 봐요.”
라디가 멀리 떨어진 관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확히는 그에 매달려 싱그러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불그스름한 열매를.
“...아무도 먹질 않았어요. 몬스터, 하다못해 작은 동물이라도 있었더라면 저렇게 손이 닿기 쉬운 위치에 먹이가 남아있을 리 없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고요. ...눈보라가 그친 게 언제쯤이었죠?”
“이틀 전..”
라디의 말대로 이 설산에는 우리가 걸어오며 남긴 발자국만 잔재할 뿐, 흔히 볼 수 있는 배설물이나 땅이 파헤쳐진 자국 등 마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심상치 않은데.”
앞길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어쩐지 쎄한 느낌이 들었다. 문뜩 고개를 돌리자 멀찌감치 산등성이 아래 흑곰 일가족과 눈이 마주쳤지만, 놈들은 제 새끼를 입에 물고 허겁지겁 능선 아래로 사라졌다.
“이상해요... 마치 뭔가에 겁먹은 것처럼...”
“....”
가슴께에 미약한 통증이 일 정도의 불안감이 샘솟았다.
“...돌아갈까?”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치만... 저거 보이시죠..? 아무래도 이번엔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구멍.
머리 위, 이제는 한결 가까워진 바위기둥 하단에 커다란 공혈이 뚫려있었다. 내부가 비어있는지 안쪽으로부터 세찬 바람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입구 주변에는 쓸려내리던 도중에 그대로 얼어붙은 눈이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대류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넓은 공간이 안에 있다는 뜻.
그 공백이 상부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코흘리개 꼬마도 아는 사실이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일단 들어가 봐야 하나...?”
“그러게요... 난처한데...”
어쨌든 확인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7계층에 떨어지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설원을 가로질렀다. 지금까지는 막연한 가능성에 의존해 무작정 걸어왔지만, 드디어 이곳을 탈출할 희망을 엿보았다.
운이 좋다면 저 기둥 내부 공간을 통해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터, 이 순간만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순 없다.
“...젠장.”
하지만 여기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
본디 모험가의 감이란 건 무시할 만한 게 못 된다. 지금껏 내 직감은 잘 들어맞는 경우가 잦았으니.
목덜미를 따갑게 짓누를 정도의 불길함은 점점 무게를 더해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들 지경이 되었다.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기둥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불길하게 드리워졌다.
“도란님, 괜찮으세요..?”
라디가 푸른 눈동자로 걱정스레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그래, 암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갈 수는 없어. 아직 해가 질 때까지는 좀 남았으니 빨리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든지 하자.”
“네, 그렇게 해요.”
살짝 보고 오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다.
나는 애써 불안감을 지우고 발길을 재촉했다. 좁은 보폭으로 산등성이를 오르자 구멍으로부터 차가운 한기가 뻗어왔고, 드센 바람이 요란하게 옷자락을 펄럭인다.
그렇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압도적인 광경이 드러났다.
“이건...”
수직굴.
굳건해 보이던 바위기둥의 내부는 벌레가 파먹고 난 고목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뻥 뚫린 하늘에서는 묵직한 바람이 쏟아졌고, 바닥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가 도사렸다.
“도, 도란님...? 자, 잠시만...”
“....”
라디가 뒷걸음질치며 아연실색했지만, 그에 반해 내 얼굴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피어났다.
머리 위로부터 파릇파릇한 녹음이 비쳐 들어왔으니까.
저 꼭대기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7계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 주위를 둘러보며 올라갈 방법을 찾던 도중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어떻게 이런 게 이곳에...”
기둥 안쪽 벽면을 따라 쭉 이어진 나선형 갱도를 바라보며 숨죽이고 있자니, 라디도 내 시선을 눈치채고 흥미롭게 눈매를 좁혔다.
“역시나... 제 예상이 맞은 모양이네요.”
“예상이라니...?”
“음... 그건 말이죠...”
녀석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조목조목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이 7계층도 이렇게 추운 환경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저희가 봐왔던 노간주나무나 전나무는 사철이 뚜렷한 곳에서도 잘 자라잖아요? 간혹 마주쳤던 두꺼비나 뱀은 원래 추운 기후에서는 서식하지 못하는 생물이기도 하고... 아마 기후 변화에 적응한 일부만 살아남은 게 아닐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그 왜, 2층 유적에서 봤던 벽화 중에도 던전 내부의 기후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기도 했고.”
“네, 그 초원이 그려져 있던 벽화 말이죠? 게다가 여왕의 방까지 이동할 때 탔던 배도 2층에서는 구하기 힘든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으니까요.”
“...근데 그러면 이 계층에도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야?”
“음... 꼭 거주한 건 아니어도 계층 간 왕래를 위해 통로를 건설해둔 게 아닐까요? 충분히 일리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눈 아래에 유적이 파묻혀 있을 수도 있고요.”
“신기하네...”
대체 이 던전엔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가 담겨 있는 걸까.
A급 모험가가 다녀갔다는 시점에서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할 거라고는 확신했지만, 설마 이런 인위적인 구조물이었을 줄이야. 이런 외딴 오지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낙후된 갱도를 잔뜩 뒤덮은 이끼와 끌과 망치의 자국으로 추정되는 흠집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추위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그럼 탈출할 방법은 찾았으니 오늘은 돌아가서 정비하고 내일 다시 오자.”
“네? 바로 안 올라가고요...?”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아. 일단 지금은 물러나자.”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하루아침 만에 이곳이 무너지지도 않을 테고.
우리는 수직굴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완만한 능선을 내려가던 중,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자 높은 설산의 풍경 너머로 마그마의 붉은 빛이 비쳐 보였다. 아마 저 분화구 아래에는 8계층이 도사리고 있겠지. 극한의 추위 다음은 초고열의 화산이라니, 정말 악의가 가득 느껴지는 조합이다.
물론 내가 갈 일은 없겠지만.
“...내가 여기 두 번 다시 오나 봐라. 당분간 던전에는 얼씬도 말아야지.”
“....울시는요?”
“울시? 울시는... 나중에 어느 정도 개척이 된 다음에 살짝 들르지 뭐. 내후년 정도면 7계층도 공략하려는 사람이 꽤 나타나지 않을까? 희소한 마물이 많으니까.”
“그러게요...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전에 다시 보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
“네, 뭐... 그냥 그렇다구요.”
“.....”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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