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탈출 #3
* * *
[116] 탈출 #3
“....내 이럴 줄 알았지.”
“저, 저건 대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불과 얼마 전, 안일한 판단으로 라디를 잃을 뻔했던 내가 이런 불온한 전조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딱딱한 과육을 질겅질겅 씹으며 머리 위 거대한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심장이 건포도처럼 오그라들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지만, 두 번째로 겪는 일이라 생각만큼 동요가 크진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끝으로 열매를 집자 입을 쩍 벌린 채 꽁꽁 얼어붙은 라디가 보였다.
햄스터가 교미하는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으... 설마 저 마물은...”
“왜, 아는 놈이야?”
“다, 당연하죠!! 아, 아니 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어째서 도란님은 그렇게 태연한 거예요?!”
라디가 언성을 높이며 내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벌어진 입속에 과육을 넣어주자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양새가 썩 귀엽다.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새의 심정이 이러할까?
“이전에 울시랑 한 번 같이 본 적이 있거든.”
“네...? 저런 마물을 보고도 무사하다니... 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거예요...”
“좋기는 개뿔, 동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둘 다 죽을 뻔했다.”
치를 떨며 거대 빙조를 바라보았다. 전신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몸체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형형한 광채를 뿜어댄다. 빙하 동굴을 지나올 때 뚫린 천장 사이로 목격했던 녀석. 저놈이 A급 파티를 궤멸시킨 범인이 틀림없겠지.
놈이 기둥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자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순탄치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더욱 착잡한 심경이다. 만일 저 기둥을 그대로 타고 올라갔더라면 지금쯤 새 모이 신세가 되었을 게 분명하다.
“젠장... 왜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냐...”
이 정도쯤 되면 모종의 신이 내게 앙심을 품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 이 세계엔 각양각색의 신이 실존한다고 하니 아예 허황한 얘기도 아닐 거다.
기구한 운명에 저주하며 입안에 가득한 씨앗을 뱉어내자 라디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떡하죠...? 이러면 저 통로는 못 쓰는 게...”
“뭐, 기다리다 보면 오늘처럼 자리를 비울 때가 있겠지. 녀석도 배는 채워야 할 테니까. 사냥하러 떠났을 때를 노리면 되지 않을까?”
“...그럼 당분간은 여기서 계속 지켜봐야겠네요.. 주변에 먹거리가 풍부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저 괴조 때문에 마물도 이 근처로는 오지 않는 모양이고요.”
“그러게, 이걸 안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둥으로부터 꽤 떨어진 지점. 천만다행으로 해가 지기 전에 제법 널찍한 설동을 팔 수 있었다. 오래 머물기에는 불안하지만, 며칠 체류하는 정도면 문제없을 터.
거대한 기둥이 비치는 전경을 뒤로하고 굴 안으로 들어왔다. 장작을 부채꼴로 쌓아 모닥불을 피우고, 하산하면서 따온 열매를 그 옆에 늘여놔 건조했다. 며칠 동안 여기서 머물러야 할지 모르니 최대한 식량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
“슬슬 주무시게요?”
“그래, 내일 아침 일찍부터 동향을 감시해야 하니까. 저 빙조가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오는지 파악해 놔야지.”
“앞으로 당분간은 새 일과가 생기겠네요...”
“그래도 이게 어디야. 무턱대고 행군하는 것보단 낫지 않아?”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죠. 물론 저런 마물 근처에서 한동안 숙식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라디가 미리 만들어둔 나뭇단으로 설동 입구를 틀어막고 다가왔다. 모피 위에 누워 옆자리를 들추자 내 품 안에 자연스럽게 파고들어온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같이 잠자리에 드는 게 당연한 관계가 된 걸까.
라디가 살짝 눈을 치뜨며 쳐다봐왔다.
“왜...?”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었죠?”
“그런 거 아냐. 그냥 네가 사랑스러워서 그래. ...그건 그렇고, 내 예상으로는 저 몬스터가 A급 파티를 패퇴시킨 원흉이 아닐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음...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해요. 누구나 눈앞에서 저렇게 압도적인 걸 봐 버리면...”
라디는 아직도 좀전의 광경이 아른거리는지 설동 입구를 응시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기야, 나도 녀석을 처음 목격했을 땐 한동안 울시를 끌어안고 충격에 빠졌을 정도니까.
그녀의 허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런데... 저 몬스터는 대체 뭐야? 아까 보니까 대충 아는 눈치던데.”
“아 그건... 저도 확실하게 아는 건 아니에요. 옛날에 읽었던 문헌에서 비슷한 마물이 나왔거든요. 분명 이름이... 카쟈드 이글이었나...? 아마 그럴 거예요.”
라디가 미간을 좁히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모양. 이윽고 점점 아래로 향하는 내 손을 도로 허리에 원위치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워낙 어릴 때 본 거라 모호하지만... 애초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몬스터로 기억해요. 대전쟁 이전에 살았던 마물이거든요. 근 오백 년간 한 번도 목격담이 없어서 아예 멸종했다고 여겨졌는데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럼 기억하는 특징 같은 건 없어?”
“음... 굳이 열거하자면 마나가 풍부하고 기온이 낮은 지역에 서식한다는 점 정도...? 근데 이건 너무 뻔하잖아요.”
라디가 난처하게 고개를 저으며 모피를 끌어당겼다. 더 할 말은 없는 모양인지 내 팔뚝에 기대며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가늘게 뜬다.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온기를 나누고 있자니,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꼬맹아.”
“네, 왜요 도란님?”
“...넌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아? 대다수 사람은 이 정도까지는 잘 모르지 않나? 내가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잖아.”
라디는 몬스터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해박하다. 그간 모르는 게 나오면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될 정도로.
이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을 뿐만 아니라 제법 오랫동안 모험가로 살아왔으니 당연할 법도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녀는 일반적인 이 세계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할뿐더러 반짝이는 교양마저 흐른다.
이는 전혀 예사롭지 않다.
사실 모험가는 낭만이 넘치는 직업이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에 가까우니까.
몇몇 성공한 하이랭커는 이를 데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겠지만, 그간 내가 봐왔던 모험가 대다수는 못 배운 잡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거지, 부랑자, 떠돌이 일꾼, 맥주 거품, 칼날 구석에 낀 녹.
전부 모험가를 나타내는 수식언들이다.
성공하면 온갖 재물과 명성을 쓸어담지만, 절대다수는 무명의 그늘 아래서 잊혀지는 직업. 그런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서적보다는 편안한 침대를, 펜보다는 당장 먹을 끼니를 갈구하는 시대니까.
하물며 어린 나이부터 악착같이 의뢰에 매진해왔을 그녀가 이토록 아는 지식이 많은 건 상당히 의외일 수밖에 없다.
허리에서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묻자 라디가 온유하게 미소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제가 정말 어렸을 때, 그러니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적에는 집안에 작은 서재가 있었거든요. 두 분이 일하러 나가 홀로 남게 되면, 흔들의자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곤 했어요. 한번은 너무 빠져들어 몰래 촛불을 켜놓고 밤새 읽다가 들켜서 혼난 적도 있고요.”
아련한 목소리. 추억에 젖어 과거를 반추하는 그녀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묘연한 빛깔을 띤 눈동자는 나룻배가 떠오른 밤 호숫가를 연상시킨다.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라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가 힘든 과거를 보냈다는 건 알고 있다. 이 모진 세계에서 부모를 잃고 홀로 자립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적적한 위로 하나 건네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운 한숨에 담아 흘려보내자 푸른 시선과 마주쳤다.
라디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전부 지난 일이니까요. 왜 도란님이 더 슬퍼하시는 거예요...”
“.....”
그녀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을 훑으며 아쉬운 온기를 남기자, 나는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치미는 걸 느껴 고개를 돌렸다.
라디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알고... 싶으세요? 제가 부모님을 여의었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
망설여졌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녀가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아. 더 이상 웃으며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어서.
그녀의 뺨에 난 상흔이, 내게도 아픈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았다. 그만큼 과거에 그녀에게서 보았던 원념은 쉬이 들추어도 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젠 다르다.
우리는 함께 많은 시련을 겪어왔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간 극복했던 고초의 풍량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맺어주는 매개체가 되었고, 강렬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그녀라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가슴속에 일렁인다.
확고한 의지를 시선에 담자, 라디가 수련한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열었다.
“제 부모님은... 아마 꽤 중요한 직위의 사람들이었을 거예요. 항상 두 분이 함께 외출하셨다가 돌아오시곤 했는데, 한 번은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집안 양탄자 밑 비밀 수납장에서 아버지의 존함이 새겨진 고급 무구를 발견한 적이 있었거든요. 교외 변두리의 외딴 오두막이었는데도 가끔 세련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했고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망향을 헤메었다.
“저희 가정은 꽤 유복했던 것 같아요.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고, 식사를 마치면 항상 따뜻한 차와 쿠키로 입가심을 했어요. 함께 식사하며 담소를 나눌 때면 어머님과 아버님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식과 인근 왕국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셨고요. 두 분이 살아서 도란님을 보셨더라면 엄청나게 기뻐하셨을 텐데...”
“.....”
말없이 손을 맞잡아주자 라디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손등을 뺨에 비볐다. 허나 즐거움도 잠시, 망망대해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처럼 곧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불길한 전조가 내비쳤다.
“하지만... 그 사건을 전후로 저희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어요. 눈이 내리던 한겨울, 제가 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던 날, 강도로 위장한 기사들이 오두막에 몰아닥쳐 제 부모님을 살해했어요.”
담담한 목소리. 그녀의 뺨에 난 붉은 문양에서 짙은 혈향이 배어나왔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요. 아마 머리를 부딪힌 충격 때문일 거예요.. 어머니가 절 장롱에 숨기는 사이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대항했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어요. 삐걱거리는 창틀 너머에서 기사들의 새하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날붙이가 시퍼렇게 번뜩일 때마다 손가락이 튀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피 웅덩이 위에서 조각 난 부모님의 시신을 맞추고 있었고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신을 차렸을 땐 오두막엔 제 부모님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시체도 널려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 모르겠어요. 만일 그 기사들이 살아서 저를 발견했더라면 목격자를 없애 후환을 덜고자 했었을 텐데.”
“.....그럼 아마 부모님이..”
“음... 그건 아닐 거예요. 시체에 남은 상흔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아무래도 그 일이 있고 조금 뒤에 찾아온 은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은인...?”
“아, 네.. 전신에 피처럼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이었는데 엄청 강해 보였어요. 아무리 도란님이라고 해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요. 그 사람이 절 데리고 오두막에서 벗어나던 중 싸우는 모습을 목격할 기회가 있었는데, 활과 단도, 그리고 본 적도 없는 암기들을 자유롭게 다뤘어요. 심지어 단검에 찔리고도 생채기밖에 남지 않았었는데 그마저도 곧바로 회복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건데... 아마 최소한 A랭크 상위 정도쯤 되는 실력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 그 사람이 널 구해준 거야...?”
“네. 그 남자로부터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는 곧바로 기절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옆 마을의 수도원으로 옮겨진 뒤였어요. 그다음부터는 도란님이 아시는 대로 성인이 되어 독립하기 전까지 수도원에서 지냈고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제가 붉은색 로브만을 고집하는 이유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정말로 고마운 사람이네...”
“네... 나이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혹여나 그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구해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다고...”
“....”
붉은 로브를 걸친 실력자.
그 울림은 사무치는 고마움과 함께 마음속 깊이 자리매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