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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17화 (117/375)

〈 117화 〉 탈출 #4

* * *

[117] 탈출 #4

결전의 날이 밝았다.

“드디어 오늘인가...”

나흘.

나흘이나 굴에 머물며 괴조의 동향을 살폈다. 추위에 딱딱 맞부딪히는 이를 틀어막으며 하염없이 돌기둥을 쳐다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덕분에 큰 성과를 거두어냈다.

놈에게는 일정한 행동 패턴이 있다.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녀석은 동이 트기 직전에 이 설산을 떠나 해가 저문 뒤에나 돌아오곤 했다. 대략 여덟 시간 정도의 공백이 있는 셈. 기둥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마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달아올랐다.

“꼬맹아 일어나, 해 뜨기까지 한 시간 남았어.”

“.....”

“꼬맹아?”

“으음... 도란님...?”

부드럽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새하얀 형체가 비몽사몽 몸을 일으켰다. 졸음기 다분한 얼굴로 눈가를 비비는 라디에게 체온으로 데운 수통을 건네자 녀석은 두 손으로 받아들고 천천히 목을 축였다.

몽롱한 눈동자가 느릿느릿하게 날 올려다봤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 많이 피곤해?”

“네 그야...”

라디가 말끝을 흐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모피를 들추고 일어났다. 나는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하기 시작하는 녀석에게서 눈을 떼고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짐을 줄여야 하니 마음껏 써도...

“꺄악!”

별안간 등 뒤에서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니 라디가 제 몸을 부둥켜안은 채 눈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라 뽀얀 살결과 대비되는 두 뺨이 유독 눈에 띈다.

“왜, 무슨 일 있어?”

“무, 무... 무슨 일이 있긴요!! 속옷 차림인 걸 알고 계셨으면 빨리 말해줬어야죠!!”

“...새삼스럽게?”

“새, 새삼스럽다니...!!”

라디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항의하다가도 이래 봐야 나 좋은 구경만 시켜준다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모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가느다란 팔 하나가 쏙 빠져나와 주변에 놓인 옷가지를 집어들고는 도로 사라졌다.

꾸물거리는 호랑이 털가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나온다.

“우, 웃지 마세요!!”

“아니 그냥... 귀여워서 그렇지.”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디가 모피를 들썩거리며 소리쳤다. 느긋하게 모닥불을 쬐며 기다리자 잠시 후 녀석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기어나왔다.

정전기로 들떠오른 머리칼을 애써 진정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라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넌 왜 하루만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가냐. 이제 덜 부끄러워할 때도 됐잖아. 혹시 조상 중에 연어 수인이라도 섞여 있는 거 아냐?”

“무, 무슨..! 연어 수인은 또 뭐예요!!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거든요!!! 아니, 그보다 도란님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나?

“아니 그야... 이제 와서 고작 속옷가지고 뭘 그래. 더한 것도 봤잖아. 어제만 해도 밤새 이대로 끌어안고 잤었고.”

“그, 그래도...! 부끄러운데 어쩌라고요!!”

라디가 얼굴을 코코 열매처럼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나로선 참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다. 당장 전날 밤에도 같이 뒹굴었으면서 다음 날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은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뭐... 나야 좋지만.’

매번 이렇게 생생한 반응을 보여주니 질릴 새가 없다.

굴 안에 틀어박혀 괴조의 동향을 감시하는 동안 심심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혹여나 들킬 수도 있으니 외부 활동도 최소화했고, 잡다한 이야깃거리를 늘여놓더라도 얼마 안 가 화재가 동나버렸다.

그 뒤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사랑하는 남녀가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갇혔을 때 할 만한 게 뭐가 있겠는가. 식량은 충분하고, 밤은 길다. 하물며 이곳엔 고즈넉하게 타들어 가는 모닥불도 있으며, 웃돈을 주고도 쉬이 구하지 못할 최고급 털가죽 침대마저 있다.

“꼬맹아...”

“....왜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미, 미쳤어요?! 어제 그렇게나 하고도 어떻게...”

“...그러게?”

“그러게라뇨!! 안 그래도 지금 굴 안에 냄새가 가득 차서 코가 삐뚤어질 지경인데! 마물이 근처에 있었으면 저희 둘 다 진작에 들켰어요!!”

라디가 팔을 내두르며 소리쳤다.

나는 마지막으로 모닥불에 땔감을 밀어 넣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 돼?”

“....”

그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모피 위로 잡아끌었다.

*

“..갔지?”

“....네.”

“좋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눈과도 작별이다.”

홀가분한 몸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한밤의 커튼이 드리웠던 대지는 새벽녘의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그사이에 또 한 번 설풍이 훑고 지나갔는지 고운 가루눈이 소복하게 발목을 간질였다.

­뽀드득..

괴조는 날이 밝자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먹이를 찾아 나섰겠지. 갑자기 변심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며칠간 묵었던 설동을 정리하고 설산 정상을 향해 나아가던 도중, 문뜩 호기심이 들었다.

“꼬맹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만약 저 몬스터를 잡으면 소재 가격이 얼마나 나올까?”

“도란님!!”

“아니아니 잠깐...! 정말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내가 저런 괴물이랑 싸울 리 없잖아.”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덧붙였다.

지금껏 내가 무모한 일을 벌인 적은 꽤 있었지만, 저놈은 아예 덤빌 엄두가 안 난다. 단도가 먹힌다고 한들 급소를 꿰뚫으려면 일주일 내내 칼질만 하더라도 모자랄 터, 애당초 하늘을 나는 녀석을 내가 무슨 수로 요격하겠는가. 애먼 날갯짓에 휩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필사적인 항변에 라디도 안심했는지 턱을 짚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음... 아무래도 값이 꽤 나가긴 하겠죠? 희귀한 정도를 넘어서 아예 멸종된 줄로만 여겨졌던 마물이니까요. 평범한 소재도 연구 목적으로 비싸게 팔릴 테고... 심장이나 눈 같은 주요 부위엔 상당한 마력이 깃들어 있을 거예요.”

“그럼 한... 100골드 정도 나오려나...?”

“그것보단 훨씬 더 나오지 않을까요...? 저희야 금화 하나에도 목메는 입장이지만 진짜 부자들의 재력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당장 말톤님만 하더라도 쌓아둔 재산이 꽤 될 테고... 아무리 그렇다더라도 덤빌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S랭크라도 오지 않으면 절대 혼자서는...!”

“그래 그래, A랭크 파티도 못 이긴 걸 우리끼리 어떻게 잡아. 절대로 덤빌 일 없으니 안심해라.”

내가 놈에게 싸움을 걸 때가 온다면 세상이 미쳐 날뛰거나 말톤이 몬스터에게서 흥미를 잃었을 때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톤은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괜히 우리를 구조하겠다고 애쓰다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도란님, 저기 저거 좀 봐봐요.”

잠시 상념에 젖어있다 보니 라디가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녀석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자 산등성이 중간 부근, 부자연스럽게 툭 불거진 얼음덩어리가 보였다. 내 덩치를 웃도는 빙하 조각은 기포 하나 없이 투명했으나 왠지 모를 섬뜩한 기운을 발산했다.

얼음으로부터 흘러나온 냉기를 들이마시자 폐 속의 조직이 차갑게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이건... 그 괴조의 소행이겠지...?”

“그렇.. 겠죠...? 나흘 전, 저희가 하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건 없었으니까요.”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리겠네.”

자세히 살펴보니 얼음덩어리 밑으로 박살 난 살점과 핏방울이 삐져나와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발도 근처에 도달하자마자 결빙되어 알음알음 참혹한 현장을 덮었다.

혹시나 싶어 짐더미에서 꺼낸 나뭇가지로 쿡 찔러봤지만, 순식간에 얼어붙어 황급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가요...”

“그래.”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마냥 남아돌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갱도를 타고 기둥의 최상단까지 올라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그 뒤의 일도 고려해야 한다. 막상 다음 층에 도착했더니 강력한 마물이 똬리를 튼 채 기다리고 있다면 웃을 일이 아니다.

정보가 없는 이상 아무리 서둘러도 모자라다.

“...다 왔다.”

쉬지 않고 능선을 올라 기둥에 도착했다. 커다란 입구 앞에 서자 세찬 바람에 흑발이 나부낀다. 이제 이 안으로 발을 들이면 다음번에 울시를 다시 보러 방문하기 전까지는 설원과 영영 작별이다.

우리는 제각각 무기를 겨누고 단숨에 돌입했다.

­푸확!!

“.....”

“...없나.”

발치에 흩날리는 하얀 눈을 응시하며 단도를 내렸다. 혹시 몰라 플래시 골렘의 핵도 준비했건만 아무런 생명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기둥 내부엔 고요한 적막과 고성에서나 불법한 황소바람만이 요란할 뿐.

“괴조의 둥지란 걸 알고 나니까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네요...”

“그러게...”

수증기가 얼어붙어 번뜩거리는 바위들과 잔뜩 낙후된 갱도. 처음에 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괴조를 목격하고 난 지금은 음산하게만 느껴진다.

더욱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이전에는 무심하게 넘어갔던 요소들이 눈에 띄었다.

“...도란님, 저길 보세요.”

“저건... 새 둥지...?”

머리 위, 짙은 어둠 사이로 돌출된 거대한 음영이 엿보였다. 나흘 전에 방문했을 땐 평범한 지형지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영락없는 새 둥지다. 괴조가 거처할 때 쓰는 자리가 틀림없을 터.

그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꼬맹아, 혹시라도 저 둥지 안에 보물이 있거나 하지는 않을까?”

“보물... 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가 있을 확률은 높지만...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위험하다고? 뭐가?”

알이라도 훔친다면 모를까, 잡동사니 한두 개 챙긴다고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만일 놈에게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걸 모으는 습성이 있다면 마석이나 레어메탈 한두 개 정돈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다못해 고블린 굴에서도 운이 좋으면 죽은 모험가들로부터 노획한 장구류를 발견하곤 하니까.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라디가 주저하면 말을 이었다.

“이건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강력한 마물 중에는 파수병을 세워 레어를 보호하는 개체도 있데요.”

“파수병?”

“네, 다른 몬스터를 산하에 두어서 둥지를 지키게 하거나, 자연물에 마력을 불어넣어 골렘을 생성하는 종도 드물게 존재하는 모양이에요. 그 어떤 마물도 제 보금자리에 불청객이 끼어드는 걸 반길 녀석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까지 하려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할 테지만...”

“...그럼 지금도 꽤 위험한 거 아니야..?”

조심스레 기둥 상단부를 올려다봤다. 만약 놈의 둥지를 지키는 몬스터가 있다면 갱도를 타고 올라가다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 자칫하다간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을뿐더러 전투를 벌이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라디가 쇠뇌에 장전된 볼트를 매만지며 읊조렸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런 마물도 존재한다는 걸 말씀드린 거예요. 저도 직접 볼 일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한테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까마득하게 솟은 기둥.

불길한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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