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탈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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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탈출 #5
“조심해, 올라올 수 있겠어?”
“네, 잠시만요...”
통로가 시작되는 부근에 다다랐다. 성인 두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법한 너비의 갱도는 내 머리보다 한 뼘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스노우 타이거의 소재로 가득한 배낭을 먼저 밀어 넣은 뒤, 살얼음이 낀 바위를 기어올랐다.
이윽고 라디마저 끌어올려 주자 녀석이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고마워요... 워낙 미끄러워서..”
“그래, 어디 다친 덴 없지?”
“네, 덕분에.”
라디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발돋움해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후 새침하게 머리칼에 쌓인 눈을 마저 털어낸다.
“....너 가끔 보면 엄청 치사하다.”
“맨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멍하니 뺨을 매만지며 읊조리자, 라디가 새초롬한 웃음을 흘리고는 배낭을 주워들었다.
“긴장 풀지 말고 계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래, 알고 있어.”
허리를 굽혀 호랑이 털가죽을 들쳐멨다.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는 지게를 만들어 고정해 두었다. 여태까지는 배낭에 묶어 짊어지고 다녔지만, 비좁은 갱도 내에선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라디의 의견에 따라 짐을 분산하기로 했다.
발치를 유심히 살피며 계층 탈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런 길은 딱 질색인데...”
나선형 돌길을 따라 전진하자 날카로운 냉기가 엄습해온다. 천연 암반을 일일이 손으로 깎아 만든 갱도는 도구의 흔적으로 보이는 상흔으로 가득했다. 바위 사이사이 틈새에는 두터운 서리와 거뭇한 때가 덕지덕지 끼어 시간의 흐름을 짐작게 한다.
마치 오래전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시베리아의 폐광을 거니는 듯한 기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정 힘들면 말하고.”
“...괜찮아요. 이 정도는...”
라디가 다소 핏기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갱도의 한쪽 벽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무저갱의 심연이 곧바로 내려다보았다. 저 밑은 도대체 어디로 이어질지 짐작도 안 간다. 감히 예상하건대, 마그마가 비치지 않는 거로 보아 최소 9계층이 아닐까?
반 발자국 옆으로 도사린 낭떠러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움찔하는 라디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계속 가자, 밑에는 보지 말고.”
“네...”
부지런히 나아갔다. 실수로라도 헛디디지 않도록 온 주의를 기울이며 발길을 옮겼다. 하다못해 작은 난간이라도 있었더라면 염려를 덜었겠지만, 고대인들은 겁도 없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뭐가?”
“난간 말이에요. 이거 보세요.”
라디가 바닥에서 나뭇조각을 하나 주워들었다. 비록 오랜 세월에 부식되고 풍화되어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움푹 파인 중심에는 못으로 추정되는 검갈색 쇠붙이가 불거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문드러진 모양이에요. 평범한 목제로는 그간의 세월을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라디가 손끝에 살짝 힘을 준 것만으로도 나무토막이 젖은 마분지처럼 으스러졌다. 그 광경을 목도하자 고대인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바위가 아니라 목재로 갱도를 건설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이 탈출로를 포기하고 다시금 설원을 가로지르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배낭끈을 붙들고 협소한 갱도를 하염없이 나아가던 도중,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큰일이네요.”
통로 중간이 끊어졌다.
오래된 갱도이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긴 세월 동안 혹한의 추위와 칼바람에 시달린 통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갈라져 불안정한 상태였으니.
“못 건너갈 정도는 아닌데...”
짧은 공백 너머 다시 시작되는 돌길이 눈에 들어왔다. 내 신장을 살짝 웃도는 정도의 틈새. 평소라면 도움닫기로 건너갔을 테지만, 사방이 온통 미끄러운 살얼음으로 덮인 탓에 자칫하다간 발을 헛디딜 수도 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라디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꼬맹아.”
“저, 저도 알아요..!”
라디가 성큼성큼 앞질러 나가더니 바닥을 내려다보며 심호흡했다. 녀석에게 이 정도 높이는 조금 힘겹겠지.
“...무서워?”
“.....”
라디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새하얗게 틀어쥔 주먹으로 내면에 몰아치는 갈등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큰일이네...”
응당 인간이라면 저마다 두려워하는 게 하나씩은 있기 마련. 부드럽게 녀석의 손을 맞잡아주려는 찰나, 라디가 먼저 내 쪽을 돌아봤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도 저만의 색채를 잃지 않은 눈동자는 차가운 설국의 풍경과 맞물려 감파란 빛을 띄었다.
굳은 결의에 찬 입술이 벌어지며 내게 고했다.
“...도란님, 절 통로 너머로 던져주세요.”
“괜찮겠어...?”
“그 방법밖엔 없어요. 저 혼자 뛰어넘으려고 했다가 자칫 움츠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떨어질 거예요. 도란님이 던져주시는 게 훨씬 확실해요.”
“그건 그렇지만...”
충분히 일리 있는 계획이지만 까딱 실수라도 했다간 그대로 추락하고 말 거다. 나에게 온전히 목숨을 맡기는 행위. 하지만 두 눈에 피어오른 신뢰의 빛에는 일말의 의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틈새를 건너기에 앞서 등에 멘 짐더미를 건너편으로 던지고 나자 라디가 내 앞에 섰다.
녀석이 두 팔을 벌려보이자 둥글게 몸을 말라고 조언했다.
“...이렇게요?”
“그래, 좀 더 웅크릴 수 있어? 그래야 던지기 편하니까.”
“잠시만요...”
라디가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았다. 두 팔로 종아리를 끌어안은 녀석을 들어올리자 솜털처럼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 한데 자세가 살짝...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자 간다...!”
앞뒤로 흔들어 반동을 가한 뒤, 라디를 통로 너머로 내던졌다.
녀석은 꺄악 귀여운 비명을 흘리더니 엉덩방아를 찧기가 무섭게 배낭을 끌어안았다.
이윽고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도란님 이제 건너오...”
“그래 잠... 피해!!!”
찰나
푸른 궤적이 쇄도한다.
*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은 갱도. 발광 이끼도 희박한 이곳에선, 두터운 어둠이 한밤중 농작물을 덮친 서리처럼 빛을 거두었다.
시야를 밝히는 채광이라곤 머리 위 비좁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녹음이 전부. 기껏해야 그 희미한 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살얼음이 있을 뿐이다.
가시가 확보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사건이 터지는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젠장!!!!”
지면을 박차며 석벽에 단도를 박아넣었다. 그대로 검날을 회수하며 벌어진 간극을 뛰어넘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틈새 건너편에 도달해 있었고, 라디를 덮친 검푸른 형체에게 치닫는 중이었다.
있는 힘껏 상대를 걷어차자 발바닥으로부터 둔탁한 통증이 전해져온다.
“크윽...! 괜찮아?!!”
“네, 네...!”
다행히 라디는 조금 놀랐을 뿐,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막 발로 밀쳐낸 대상을 노려보았다.
“저건...”
생소한 생김새.
1미터 남짓한 키에 두꺼운 팔다리. 짜리몽땅한 체형은 드워프를 연상시켰지만 전신이 푸른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져 특유의 호방함을 찾을 수 없다.
뇌리를 간질이는 기시감에 위화감을 품은 것도 잠시, 라디가 경고해왔다.
“조심하세요! 능선을 오르면서 봤던 그 얼음이에요!!”
“젠장.. 어쩐지...”
차가운 냉기를 발하는 몸체가 산등성이에서 보았던 얼음덩어리와 판박이다. 틀림없이 그 망할 괴조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크기가 작은 만큼 그때만큼의 오싹한 한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바닥을 강하게 내려쳐 신발 밑창에 들러붙은 살얼음을 깨트리며 입을 열었다.
“꼬맹아...! 저놈 약점이 뭐야?”
“분명 동력원이 되는 핵이 있을 거예요. 그 부분을 파괴하거나 육체에서 분리해내면...”
“....저긴가.”
골렘의 가슴팍 중심, 야구공 크기의 푸른 불빛이 은은하게 점멸했다. 저걸 깨부수면 거동을 멈추겠지.
약점만 안다면 해치우는 건 금방이지만
‘...까다로위.’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다.
지속해서 냉기를 뿜어내는 적의 특성상, 근접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상을 입는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했다간 갱도 아래로 떨어질 테고, 짧은 단도로는 단박에 핵을 꿰뚫기가 힘들다.
이럴 때 장검이 있었더라면...
칼자루를 세계 움켜쥐며 기회를 엿보고 있자니 라디가 뒤에서 속삭였다.
“도란님, 여기선 제가 선공할게요.”
“뭐...? 상성이 너무 나쁘지 않아? 쇠뇌도 안 먹힐 텐데...”
“괜찮아요. 다 방법이 있으니까.”
라디가 전방을 응시하며 크로스보우에 볼트를 장전했다.
이어서 격철이 울리기 직전, 내가 목격한 건,
‘주머니...?’
철컥!
단조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은빛 궤적이 피어났다. 미약한 파공성을 자아내며 치달은 볼트. 골렘의 안면에 정확히 육박한 대못은 적중하는 즉시 끈적한 액체를 흩뿌려 놈의 시계를 앗아갔다.
볼트 끝에 매달려 바닥을 구르는 천주머니를 멍하니 바라보자 라디가 쇠뇌를 내리며 말했다.
“매머드의 힘줄을 가열해 나온 그을음을 송진과 배합한 물건이에요. 용기는 헌 옷을 찢어서 만들었고요. 늑대들과 함께 지낼 때 제작해뒀어요.”
“...대단하네.”
볼트를 이런 식으로도 응용할 수 있을 줄이야.
얼굴에 시꺼먼 먹을 뒤집어쓴 채 허우적거리는 골렘을 보며 감탄하자 라디가 덧붙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도란님이 대신 숨통을 끊어주실 수 있어요? 되도록 핵을 파괴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야 간단하지.”
단도를 움켜쥐고 도약했다. 반격당할 여지가 줄어든 이상 상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빨리 바닥을 미끄러져 골렘의 배후로 이동했고, 훤히 드러난 등짝에 단도를 박아넣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새하얀 냉기가 검신을 타고 올라왔지만, 손을 놓고 발바닥으로 칼자루를 내려찍자 자갈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콰르르르!
“앗...!”
푸른 빛을 내뿜는 핵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라디가 황급히 몸을 날려 붙잡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라디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건 왜 파괴하지 말라고 한 거야?”
“아, 골렘의 핵은 돈이 되거든요. 안에 내재된 마력이 많거나 희귀할수록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여길 벗어나서 다른 모험가와 마주쳤을 때 교섭 용도로 쓸 수 있을지.”
“하긴... 우리만의 힘으로 지상까지 올라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현명한 판단이다. 6계층, 혹은 5계층을 전전하다 다른 파티를 만나게 되면 골렘의 핵을 지불하고 안전한 장소까지 동행해달라는 제안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스노우 타이거의 소재가 있긴 하지만 가진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쉬운 건 이쪽이니.
턱을 짚으며 수긍하자 라디가 골렘의 핵을 배낭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지만요. 저걸 보세요.”
“....젠장.”
천천히 고개를 들자 머리 위, 갱도를 배회하는 푸르스름한 도깨비불이 눈에 들어왔다.
“쉽지만은 않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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