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탈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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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탈출 #6
“젠장...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은 죽여도 죽여도 끊이질 않네...”
“예상보다 지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여기까지 왔네요.”
“그러게... 처음에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골렘의 몸체에서 단도를 뽑으며 읊조렸다. 짧은 외날의 검신이 짙푸른 흉곽을 가르자 은은하게 점멸하는 핵이 굴러나왔다. 괴조, 속칭 카쟈드 이글의 마력을 한껏 머금은 광석은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비범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라디가 핵을 건네받아 배낭 깊숙이 밀어넣으며 올려다봤다.
“조심하세요. 언제 갑자기 덮쳐 올지 모르니까요.”
“그래, 혹시라도 뭔가가 접근하는 게 느껴지면 말해주고.”
통로를 나아가는 족족 골렘과 조우했다. 이따금씩 천장이 돌출될 때면 머리가 부딪히기 십상인 나와는 달리, 비좁은 갱도를 드나들기에 최적인 크기. 심지어 생명체가 아닌 탓에 기척을 감지하기도 어렵다.
반투명한 몸체 내부의 핵이 내뿜는 불빛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는 있었으나, 가까이 다가가야만 비로소 활동을 개시하는 녀석들도 있어 자칫했다간 기습을 당하기 일쑤였다.
“..올라가면 장검부터 하나 마련해야겠네...”
오른손을 둘러싼 토끼 가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냉기를 차단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터, 벌써 드문드문 얼어붙은 부위가 눈에 띄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갱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교체해야 할 게 분명하다.
“도란님, 잠시만요.”
“왜, 골렘이라도 있어?”
“아뇨, 골렘은 아니지만 둥지가 멀지 않았어요. 뭐가 나올지 모르니 대비하도록 하죠.”
“그래.”
한층 짙어진 어둠에 고개를 들자 큼지막한 음영이 보였다. 기둥 상단부에 위치한 괴조의 보금자리는 칠흑의 회명 속에서도 중후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치 처음 갱도를 건설할 때부터 고려한 듯 주변 환경과 자연스레 녹아든 지형.
...설마 저것도 고대인들이 만들었나..?
“어쩐지 점점 골렘들이 많아지는 느낌인데...”
“기분 탓만은 아닐 거예요... 아마...”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적과 마주치는 빈도도 덩달아 늘어났다. 일렬로 통로를 가로막은 골렘 네 마리를 응시하며 혀를 차자 라디가 쇠뇌를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제가 해결할까요?”
“...아니, 여기선 내가 처리할게.”
수량이 한정된 만큼 라디의 공격 수단은 최대한 아껴 두어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이제는 이 갱도를 빠져나간 뒤의 일도 고려해야만 한다.
차분하게 토끼 가죽을 말아쥐며 기다리자 골렘이 점점 다가왔다. 무뚝뚝한 몸체는 침입자를 말살한다는 목적만으로 움직였고,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냉기로 하여금 괴조의 존재감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곧 제일 앞선 놈이 두꺼운 팔을 휘둘러온다.
슈우우욱!!!
“....!!”
반걸음 물러나 회피했다. 묵직한 냉기가 턱밑을 훑고 지나간다. 협소한 갱도 내에서 우회할 공간 따위는 전무. 그렇다면 앞뒤로 거리를 벌려 공격에 대처한다.
콰드드득!!
놈이 공격해온 틈을 노려 단도를 내려찍자 사방으로 얼음 파편이 흩날렸다. 골렘은 한쪽 팔꿈치가 박살이 나 잠시 기우뚱했지만, 곧바로 다른 팔을 내질러 응수했다.
나는 즉시 단검을 손에서 놓고 미끄러져 잇따른 타격을 흘려낸 다음, 이음매에 박힌 칼자루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파장창!!!
날카로운 파쇄음이 갱도에 메아리쳤다. 터져나간 파편이 오싹한 빛무리를 퍼트리며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눈앞의 골렘은 순식간에 오른팔의 절반 이상을 잃었지만, 통각이 없는 마물답게 표정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삐거덕거리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제길...’
새하얗게 뻗어오는 냉기를 의식하며 놈의 우하단으로 파고들었다. 살얼음을 타고 미끄러짐과 동시에 단도를 난폭하게 박아넣자, 텅 빈 몸통에 뿌연 금이 퍼져나갔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부츠 겉창으로 균열을 후려차자 몸통이 산산조각나며 푸른 구슬이 굴러 나왔다.
“일단 한 놈.”
무너져내리는 잔해를 뛰어넘었다. 손아귀에서 단도를 회전해 역수로 쥐고 뒤엣 놈에게 치달았다. 골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자 있는 힘껏 가속해 반투명한 면상에 밑창 자국을 새겨넣었다.
콰르르르르!!!!
통쾌한 타격감. 공에 적중한 볼링핀처럼 골렘이 균형을 잃고 떠밀렸다. 녀석은 잇따라 다가오던 동료들까지 넘어뜨리고 난 뒤에야 멈춰섰고, 나는 놈이 중심을 되찾기 전에 도약해 발목을 내리찍었다.
콰지지지지직...!!!
곧바로 얼음 팔뚝이 육박했지만 칼날로 응수해 관절을 분질렀다. 단단하게 압축된 얼음의 강도는 돌덩어리에 비견됐으나, 내 단도에 대적할 바는 아니었다.
으레 해왔던 것처럼 가슴팍에 도신을 박아넣고 연거푸 내리밟자 골렘들은 한낱 파편이 되어 갱도를 수놓았다.
“...또 시간만 잡아먹었네.”
가죽 덮인 손으로 핵을 주워들었다. 피복 곳곳에 붙은 살얼음을 떼어내고 단도를 갈무리하자 라디가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도란님...”
“왜?”
“그... 용케도 이런 곳에서 잘 뛰어다니시네요? 저는 미끄러워서 도저히 못 달리겠던데...”
“아 이거? 스승님한테 배웠거든. 질리도록 설산을 타고 오르다 보니 알아서 적응하게 되더라.”
수련에 매진한 나흘, 지겹도록 눈 덮인 바위를 활보했다. 나도 늑대처럼 발바닥에 육구가 달려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수백 번.
...그러고 보니 그때 배운 보법은 아직 한 번도 안 써먹었네.
지금으로선 최대한 쓸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지만.
하얗게 피어나는 입김에 잡념을 흘려보내고는 호랑이 털가죽을 짊어지자 라디가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곧...”
“꼬맹아.”
“네, 네?!”
“뭘 그렇게 놀라. 저기 봐, 이제 곧 둥지야.”
“그러네요... 여기서부턴 제가 앞장설게요.”
라디가 쇠뇌를 치켜들고 앞서나갔다. 나선 형태로 기둥의 상단부를 향해 소용돌이치던 갱도는 어느덧 막바지 부근에 이르렀고, 머리 위에서 쏟아지던 푸른 녹음 또한 확연하게 짙어졌다.
“...조심해.”
“네...”
둥지에 다가갈수록 긴장이 샘솟았다. 무려 A랭크 모험가 파티를 궤멸시켰던 마물의 둥지다.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불확실하면서도, 동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보물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술렁거렸다.
서늘한 공기를 타고 전해져오는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나아가던 중, 둔턱 위로 발을 내딛자 드디어 윤곽으로만 보였던 괴조의 보금자리가 드러났다.
“이건...”
“.....”
알.
거대한 둥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석재 구조물 안에 있던 건 다름 아닌 괴조의 알이었다. 평범한 새는 물론, 지구에서 제일 큰 조류인 타조가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의 알 내부에는 은은한 청색 광채가 간헐적으로 점멸했다.
라디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도란님... 저거 보여요...? 껍데기 안쪽에...”
“...그래.”
만년빙과 유사한 재질로 이루어진 패각 안쪽으로 둥글게 웅크린 유체들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아직 부화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일 저 녀석들이 깨어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새끼의 울음소리를 감지하고 돌아온 괴조에게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발육 정도로 봐서는 거의 다 자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으면 위험했겠네...”
“그러게요... 부리도 돋아있고 솜털도 삐죽삐죽 자라나 있어요. 아마 이 마물도 성장하면서 외형의 변화를 겪나 봐요. 저희가 봤던 모체는 전신이 얼음으로 뒤덮여있었으니...”
“아무튼, 여기선 조용히 지나가자. 건드려서 좋을 게 없겠어. 챙겨갈 만한 게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발소리도 죽여가며 맥동하는 알들을 지나쳤다. 이 중 하나라도 지상으로 가지고 올라간다면 떼돈을 벌 테지만, 너무 커다래서 들고 갈 엄두조차 못 낸다.
혹여나 원한을 품은 어미가 쫓아올지도 모르고.
결국, 우리가 완전히 둥지를 벗어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단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던 중 라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저 알 말이에요. 안에 새끼가 들어있는 거로 보아 유정란이 분명한데, 그럼 적어도 성체가 두 마리 존재한다는 뜻이잖아요. 단성생식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암수 한 쌍은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러네.”
그런 무지막지한 마물이 한 마리로 끝이 아니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울시와 얼음동굴에서 봤던 괴조는 이번에 본 개체보다 훨씬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야 아래로 내비치는 알을 구경하며 얼마 남지 않은 탈출구를 향해 발을 내딛던 도중
툭!
돌연 발치에서 미미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의아하게 고개를 내리자 눈송이처럼 공기에 녹아드는 흰색 실타래가 보였다.
“.....?”
“왜요 도란님?”
“아니 방금 여기 뭔가...”
툭!
“어...?”
“...봤어? 얇은 실 같은 게...”
툭!
툭 툭!!
툭툭툭툭툭툭툭!!!
““.....!!!””
사방에서 파열음이 울려퍼졌다.
황급히 주위를 살피자 발아래 늘어져 흩날리는 실선이 보였다. 주변 환경과 동화되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던 실들이 미약한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했고,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발동하며 걷잡을 수 없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기둥 내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꽉 잡아!!!”
“대, 대체 무슨 일이...!”
“씨발! 어쩐지 순탄하다 했지!!”
역시 이렇게 순순히 우리를 내보내 줄 리가 없다.
어둠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발한 진동은 점점 넓게 퍼져나갔고, 이내 기둥 전체를 집어삼키기에 이르렀다.
쿠구구구구구구구!!!!!!!
“도란님 이쪽으로!!!”
“낙석이다!! 머리 조심해!!!”
라디를 끌어안고 통로 구석에 움츠리자 머리 위에서 큼지막한 바위들이 굴러떨어졌다. 안 그래도 낡았던 갱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통로를 배회하던 골렘들은 팔다리를 휘저으며 공동 아래로 추락했다.
무저갱의 심연으로 가라앉아가는 푸른 얼음덩어리들을 보고 있자니, 저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번뜩였다.
“저건...?”
“도란님!! 위험해요!!”
“...잠깐 나 좀 잡아줄 수 있어?”
라디가 만류했지만,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 보호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갱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새까만 심연으로부터 시퍼런 무언가가 천천히 점등했다.
하나.. 둘.. 셋... 여덟.
제단 위의 촛대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어난 불빛.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골렘들을 제물 삼아 무언가가 태동했다. 그 생명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곧 기둥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고, 점점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 정체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씨발!!!!!!”
“도, 도란님....?”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해!!!”
“대, 대체 뭘 봤길래... 히끅?!”
라디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절벽 아래를 살피더니 딸꾹질하며 날 잡아끌었다.
전신이 푸른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미가 우릴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이어서 놈의 후방에서 새끼 거미 떼가 우르르 뛰쳐나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석벽을 기어올랐다.
“젠장 뛰어요!!!”
“거미잇!!!!!”
“불평은 나중에 들어줄 테니까 일단 뛰어요!!!!”
붕괴하기 시작한 갱도를 난폭하게 질주했다. 울렁거리는 지면을 딛으며 필사적으로 앞길을 헤집었다. 탈출구까지의 거리는 약 이백 미터. 무슨 일이 있어도 놈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다급하게 통로를 따라 내달리자 등 뒤로 잔해가 우수수 쏟아졌다. 발을 뻗기가 무섭게 지반이 무너졌고, 축축한 이끼와 진흙이 뺨에 튀었다.
절망적일 정도로 소름끼치는 파쇄음이 귓전을 메웠지만,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속 점점 강렬해지는 녹음의 푸른 광채는 우리에게 달콤한 희망을 속삭였다.
“얼마 안 남았어요!!!”
“염병할!! 이대로는 늦겠어!!!”
이대로 가다간 탈출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따라잡힐 터.
신속하게 단도를 소환했다. 왼손에 거머쥠과 동시에 측면으로 휘두르자 지척까지 도달한 거미들이 갈려나갔다. 정신없이 달음박질하며 연거푸 칼을 내질렀지만 반격이라도 하듯 번뜩거리는 수정 다리가 쇄도해 팔뚝을 옅게 찢었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거미의 물결이 반 발자국 뒤까지 따라붙었다.
“이 개새끼들이!!!”
끈덕지게 부츠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미를 걷어차자 녀석은 여덟 다리를 바둥거리며 절벽 아래로 낙하했다. 이어서 모조리 베어낼 심산으로 몸을 크게 뒤튼 순간, 놈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뭣...!!”
“조심해요!! 지능이 있는 놈들이에요!!”
라디가 쇠뇌를 겨누자 거미들이 일제히 산개한다. 점점 집요하게 몰려드는 거미 군단.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는 상대지만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무엇보다도...
타각타각타각타각타각타각타각!!!!!!!!!!!!!!!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시바알!!!!”
초대형 수정 거미가 육중한 몸체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추격해왔다. 놈의 눈동자에 서린 오싹한 한기와 마주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천장에서 흘러내린 녹음은 녀석의 등껍질에 덮인 눅눅한 이끼와 날 선 고드름을 비추었다.
“앞만 보고 달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제기라아아알!!!!! 이 지긋지긋한 7계층!!!!!!!”
탈출구까지 고작 몇 보. 눈이 부실 정도의 광채가 살랑이는 나뭇가지와 짙푸른 수풀을 뚜렷하게 망막에 새겨넣었다. 저기까지만 도달하면 드디어 이 끔찍한 마경에서 탈출할 수 있...!
키에에에에에에엑!!!!!!!!!
덥석!!!
“도란님!!!!!!!!!”
찰나
발목에서 둔탁한 감촉이 느껴지고, 서서히 불빛이 멀어져갔다. 놈이 날 다시 심연 속으로 끌어당기고자 했다.
하지만ㅡ
“이거나 쳐먹어!!!!!!!!!!!”
반사적으로 플래시 골렘의 핵을 이빨로 깨물고는 등 뒤로 내던지자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명멸하는 시야 속, 자그마한 손이 날 붙잡았고,
우리는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
셋이서.
“쿨럭....?!!”
길쭉한 무언가가 뱃속을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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