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탈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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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탈출 #7
쿨럭...?!!!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플래시 골렘의 핵이 시야를 앗아갔고, 폭음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단절시켰다.
내게 남은 유일한 감각이라곤
“────!!!!”
고통.
비명 섞인 외침이 핏물 섞여 튀어나왔다. 처절한 울음이 두개골을 타고 전해진다.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생소한 통증이 온몸을 유린했고, 역병처럼 창궐한 이명이 정신을 좀먹었다.
조각나 회전하기 시작한 사고 속에선 정신을 부여잡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퍼어억!!
신경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감각과 함께 단단한 물체에 부딪혔다. 세포를 짓이기는 듯한 통증 사이로 어렴풋하게 풀잎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잔디밭 위를 구르고 있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난폭한 충격이 전신을 덮쳤고, 온몸에서 서서히 스며나오는 탈력감과 함께 시야가 돌아왔다.
“쿨럭...”
아프다.
무기력하게 쓰러진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지면을 적셨다. 피로 물든 수면에 라디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황혼의 붉은 광휘가 내려앉은 세계 속에서 그녀는 수정 거미에 대항하는 중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위태위태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푸른 다리줄기에 얻어맞자 허공을 가르며 나무에 부딪혔다.
축 늘어진 머리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흘러나온다.
“안 돼!!!!!”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바닥을 박찼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나아갔지만 얼마 못 가 쓰러졌다.
“크.. 윽...!!”
그제야 내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복부 한가운데 뚫린 구멍. 피거품 섞인 가래를 내뱉자 찢겨나간 가죽옷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울컥 게워나왔다.
“염병...”
폐 속에 찰랑이는 선혈이 차올랐다. 기관지를 다친 걸까.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가 없다.
비척거리며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온몸이 수정으로 뒤덮인 거미 마물. 놈의 신장은 내 두 배를 웃돌 정도로 거대했고, 전신에서 비범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설마 몸 전체가 골렘의 핵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건가.
딸칵...! 딸칵....!!
거미가 앞니를 달싹이자 주둥이에서 검푸른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찐득한 분비물을 뒤집어쓴 이름 모를 야생초는 액체질소에 노출된 꽃잎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놈이 앞다리를 내디디자 하얗게 물든 들판이 깨져나갔고, 등껍질 위에 돋아난 고드름과 물이끼에선 짤랑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네놈이... 마지막이냐...?”
괴조의 둥지를 지키는 파수꾼. 골렘들은 단순한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았을 터. 눈앞의 거미는 폭발의 충격파를 정면으로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건재해 보였다.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라디는...”
다행히 죽지 않았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흉부를 보며 안도했다. 가벼운 뇌진탕은 입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사가 엇갈릴 수준은 아니다. 목숨의 기로에 선 인간은 수십 번도 넘게 봐왔으니.
정신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손을 거머쥐자 검은 아지랑이와 함께 단도가 나타났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익숙한 질감.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가운 여덟 눈동자와 마주하며 눈빛을 갈무리했다.
“그래... 네가 마지막이라 이거지...”
이놈만 죽이면 된다.
눈앞의 이 마물만 해치우면 나와 라디 둘 다 살 수 있다.
비로소 완연하게 그 지독했던 7계층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거미가 탐욕스럽게 주둥이를 딸칵거리며 다가왔지만
“좆까. 이 새끼야.”
나는 입안 가득 강혈을 내뱉으며 비릿하게 이빨을 드러냈다.
*
공터에 아스스한 전운이 감돌았다.
차가운 냉기와 녹음이 어우러져 피어나는 취운이 발치를 타고 흘렀다.
이 순간, 과거에 말톤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는 나를 타들어가는 도화선에 빗대었다.
전투에 임하다 보면 적 이외에는 안중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몸 위에 덧씌워지는 혈흔과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그에게는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나는 어째서 내게 이러한 증상이 생겼는지 알고 있다. 이는 모두 아득하게 느껴지는 상흔으로부터 비롯된 열병일지니.
한때 나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야만 했고, 하루하루 시체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정의 껍데기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뒀으며, 그 덕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정말로 온전했을까?
“...야.”
딸칵!
“너 좀 거슬린다.”
슬슬 허물이 벗겨졌다. 그간 내가 겪은 부조리, 고통, 허기, 추위. 모두 내 얄팍한 가식을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는 라디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지만, 그녀가 없는 지금 이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딸칵! 딸깍..!
거미가 주둥이를 달그락거리며 비웃는다. 그 싸늘한 눈동자에 담긴 저의를 읽지는 못했으나 내 전신을 훑어보며 깔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길 기다렸으나 놈은 그저 관망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가고.”
복부에서 스며나오는 피를 무시하고 질주했다. 한 보씩 내디딜 때마다 붉은 선혈이 넘실거리며 잔흔을 남겼다. 허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쓰러지기 전에 놈을 쓰러뜨리면 그만인걸.
키이이익!!!!
놈이 몸체를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지면에 앞다리를 내리꽂았다. 공성 병기를 연상시키는 푸른 창날이 삽시간에 흙바닥을 뒤엎는다. 단단한 토사류가 삽시간에 쇄도했으나 나는 측면으로 도약했고, 날카로운 다리가 관자놀이를 향해 빗발쳤지만 이 또한 높게 뛰어 회피했다.
쿠륵!!
거미가 즉각 반응했다. 놈은 내가 공중에 체류하는 틈을 타 기민하게 나머지 다리를 뻗어왔다. 플로라이트처럼 새파란 궤적이 다각도로 치달아온다.
내 복부를 꿰뚫었던 일격.
가소롭다.
급격하게 몸을 비틀자 환부에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몰아쳤다. 붉은 꽃잎이 허공을 수놓자 짙은 혈향이 피어나 비강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짧은 도신이 자아내는 원심력을 무게추 삼아 앞발을 비껴내었고, 날렵하게 자세를 낮춰 착지했다. 묵직한 가죽 부츠로 얼어붙은 풀잎을 짓밟자 유리가 깨져나가는 듯한 파쇄음이 비산했다.
기회.
큰 동작 뒤엔 반드시 틈이 생긴다. 그 일순간의 경직을 노려 공격한다.
찰나의 호흡에 몸을 맡겼다. 이제는 익을 대로 익숙해진 보법으로 거미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다. 이어서 신속하게 하단으로. 청록빛 광물 덩어리가 줄지어 늘어선 복부로 향했다.
투명한 몸체에 힘껏 단검을 찔러넣고 도려내자 격렬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거미가 발광하며 지면을 휩쓸었다. 재빠르게 놈으로부터 거리를 벌리자 미친 듯이 앞니를 딸칵거리며 몸부림친다. 기다란 다리가 지면을 깊숙하게 파고들 때마다 지반이 뒤집어졌고, 등 뒤 가시처럼 돋아난 고드름에서 풍경종처럼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돌연 거미가 몸을 웅크리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
예상 밖의 동작. 나는 오른손에 단도를 쥐고 전방으로 내밀어 다음 수에 대비했다.
방심하지 않고 미세한 관절의 움직임까지 주의 깊게 관찰하던 중, 혈흔이 흘러나오는 복부에서 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도약해 물러나자 발밑에서 얼음기둥이 솟구쳤다.
푸화아아아아아악!!!!!!!!!!
수정 다리가 땅에 박힌 지점부터 하얀 냉기가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빙판으로 변모한 공터 곳곳에서 푸른 수빙이 무수하게 자라났다.
“...그게 네 노림수냐.”
과연 괴조로부터 파생된 마물이라 그런지 하는 짓도 판박이다. 사방에 돋아난 얼음덩어리로부터 흘러나오는 한기가 서서히 폐 속으로 침투했다. 이대로 가다간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기도 전에 얼어붙고 말 터.
하지만 그 전에 끝내면 되는 일이다.
전장에 발을 내디뎠다.
얼음 칼날이 솟구쳐 앞길을 가로막자 민첩하게 선회했다. 미끄러운 박빙 위를 활보해 발아래 자라나는 고드름을 뛰어넘는다. 빙판 위에서도 이토록 기민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 놈이 눈을 크게 떴지만, 나는 입꼬리를 올려 응수했다.
몬스터의 길을 걸었던 나는, 평범한 사냥감하곤 궤가 틀리니까.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엑!!!!!!!!!!!
단도로 거미의 몸통을 꿰뚫자 돌연 놈이 공격 일변도로 태세를 전환했다. 점점 뻗어나가는 냉기를 등에 업고 무자비하게 다리를 내둘러온다. 상단에서 베고, 찌르고, 측면으로부터 치솟고, 휘두르며 시차 없이 강습해오는 청색 궤적.
이전의 나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테지만ㅡ
“백은보(白??)!!!”
발치를 맴돌던 검은 연무가 솟구쳐 육신을 감쌌다. 단도의 기운으로 잠시간 세상에서 나의 기척을 지웠다. 스승님에게 배운 기술. 정말 짧은 편각(??)에 불과했으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덟 눈이 끔뻑거리며 검은 머리 사내를 쫓았을 땐, 나는 이미 놈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늦었다.”
키르륵?!!!!
강타.
검푸른 파편이 흩날린다. 놈의 두개골이 벌어지며 수정 조각이 터져나왔다. 거미가 귀청을 찢는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발광했지만, 나는 즉각 단도를 회수하며 미끄러져 체절에 일격을 박아넣었다.
허리를 비틀며 강하게 칼자루를 걷어차자 청아한 소리와 함께 다리가 찢겨나갔다.
놈이 반쪽밖에 남지 않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키리리리리리릭...!!
“왜, 억울해?”
검면으로 수정 기둥을 두드리며 도발하니 푸른 안구에 맺힌 살기가 더욱 부풀어올랐다. 거미는 앞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며 분개했지만, 곧 내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꾸덕한 선혈을 목격하고는 조소를 머금었다. 이대로 가다간 머잖아 내가 자멸할 거라 생각한 걸까.
“틀렸어.”
사납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녀석이 공터에 냉기가 차오르길 기다렸듯, 나 또한 이 순간이 찾아오길 고대했다. 단도에 정신을 집중하자 한기가 발끝을 타고 오르다가도 무형의 기운에 휩쓸려 흩어졌다. 전투를 개시했던 순간부터 알음알음 퍼져나갔던 그림자는 지금 이 순간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와라.”
울창한 수목들이 움츠러들었다. 우거진 고목 사이로 검은 형체가 횡횅한다. 푸르렀던 녹음이 생기를 잃고 우중충한 회녹색으로 번져나갔으며, 평화롭던 숲속에 망자들의 잔상이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키르륵...?!
거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뒷걸음질쳤다. 눈앞의 사내가 내뿜는 기백은 여지껏 만나보았던 어느 상대와도 달랐을 테니.
슬슬 이 정체불명의 능력도 짐작이 간다.
내 핏줄기를 탐스럽게 집어삼키는 시꺼먼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 간다.”
지면이 폭사했다.
폭발적인 힘이 두 다리에 서렸다. 수정이 솟아올라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대로 파괴해 돌파했다. 시야가 미치지 않는 각도로 푸른 궤적이 쇄도했으나 단도를 솟구쳐 막아냈고, 그대로 들숨에 힘을 실어 베어내자 앞다리가 터져나갔다.
콰르르르륵!!!
자세를 낮춰 땅을 기듯 쾌주했다. 놈의 하단으로 파고든다. 거미의 뱃속에 알을 낳는다는 대모벌처럼 단도로 놈의 갑각을 꿰뚫었고, 난폭하게 힘을 가해 내부를 박살냈다.
검은 잔상을 흘리며 복부 아래를 빠져나오자 놈이 빙판 위에 엎어졌다.
키르르르르르르르르!!!!!!!
돌연 거미가 괴성을 내질렀다. 놈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돌무더기를 파헤치자 그 아래서 크고 작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나와 라디를 끈질기게 추격해왔던 새끼 거미 떼.
쳇 혀를 끌며 끈질기게 눌어붙는 수정 거미들을 떨쳐내려던 찰나
키르륵! 케륵!!
쿠르륵!!!
돌연 놈들이 먹을 뒤집어쓰고 미끄러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에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엎드린 라디가 보였다.
그녀의 왼팔에 달린 쇠뇌가 은근한 빛을 내뿜었다.
‘...고마워.’
눈빛으로 감사를 전하고는 전장을 가로질렀다. 검은 아지랑이를 자아내며 역수로 쥔 단검을 휘둘렀다. 수정 조각을 걷어차고 높게 뛰어올라 사선에서 벗어났고, 급격하게 강습하며 등딱지에 단도를 박아넣었다.
습윤한 공터에 검명음이 울려퍼질 때면, 칠흑빛 음영이 푸른 수정과 맞물려 찬란한 빛무리를 자아냈다.
쿠루루루루루룩!!!!!!!!
최후의 저항.
거미가 숨겨왔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상황을 반전시킬 한 수. 꽁무니를 높게 솟구쳐 치명적인 은사를 퍼붓지만
“백랑보(白??)!!!!!!!!!”
나는 공간을 뛰어넘어 놈의 목덜미에 도달해 있었고ㅡ
“강림하라!!!!!”
도처에서 숨죽이던 칠흑빛 덩굴에게 명령했다.
내 생명의 원천과 맞바꾼 공격.
이건 좀 아플 거야.
단도에 서린 어둠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그래, 네가 바로 그 소문의 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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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내린 공터.
산산조각 난 잔해.
박살 난 수정 거미의 몸체를 밟고 선 적발의 여자가 초승달 같은 비소를 자아냈다.
내 목에 드리운 기다란 곡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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