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21화 (121/375)

〈 121화 〉 암시장 #1

* * *

[121] 암시장 #1

모르는 천장이다.

이런 진부한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에서 타는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오랜 습관대로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투구는 만져지지 않는다.

­삐걱.

“크헉...!”

몸을 뒤척이다 보니 짧은 부유감이 덮쳐왔다. 지면에 엎어지자 축축한 풀잎이 뺨에 들러붙는다. 곧바로 일어나고자 했지만 도통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잔디에 고개를 처박았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차츰차츰 두 눈이 어둠에 적응될 즈음, 서서히 실내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긴...”

천막...?

유목민의 부락에서나 볼 법한 원형 텐트. 이음매 실밥 사이로 비쳐 들어온 햇살이 규칙적인 문양을 자아냈다. 바닥에는 푸른 잔디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등유 랜턴에선 희미한 빛이 뿜어나왔다.

더욱 자세히 주변을 살폈다.

뒤를 돌아보자 방금 내가 굴러떨어진 간이 침대 두 개가 보였다. 천막 구석에는 익숙한 배낭이 기대어져 있으며, 탁자 위에는 육포와 수통 따위가 놓여있다.

“제길...”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거지?

평소 신세를 졌던 말톤의 텐트와는 크기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그저 잠을 잘 뿐인 여느 텐트와 달리 장기간 체류를 목적으로 설계한 의도가 엿보인다. 하물며 이런 크기에 두 명분의 침대밖에 없다니, 대체 얼마나 비용을 들인 걸까.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여자...”

수정 거미의 숨통을 끊기 직전에 나타났던 적발의 여자. 곡도가 드리웠던 목둘레에선 아직도 날붙이의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상처...! 상처는...?”

주섬주섬 셔츠를 들춰봤으나 그곳엔 매끈한 복근만이 있을 뿐, 수정 거미에게 당했던 흉터는 온데간데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

“제길...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슈화아아악!

손아귀에 힘을 주자 단도가 나타났다. 영문 모를 상황이지만 익숙한 칼자루를 쥐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된다. 결박된 흔적도 없고 짐도 그대로 있는 걸로 보아 납치되었을 확률은 적지만, 아직 모르는 일.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라디가 신경 쓰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두꺼운 천 너머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들어 좀처럼 듣지 못한 새소리와 풀벌레의 울음, 바람결에 살랑이는 나뭇잎 사이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존재가 느껴졌다.

하지만 곧 풀잎이 뭉개지는 불협화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발소리.

“.....”

단도를 틀어쥔 채 숨죽였다.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고 천막 귀퉁이에 밀착했다. 곧 천을 늘어뜨려 둔 입구가 젖혀지고, 눈부신 역광을 등지며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슬슬 일어날 때가... 어?”

­투확!!!

사내의 배후를 덮쳤다. 무방비하게 천막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뒤통수를 붙잡아 잔디밭에 처박았다.

무릎으로 손가락을 찍어누르자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질문. 라디는 어디 있지?”

“자, 잠깐 진정...!”

“묻는 말에만 대답해.”

“크윽...!”

체중을 늘리자 사내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고자 애를 썼지만, 목덜미에 드리운 단도를 보자 섬짓 숨을 들이켜며 저항을 멈추었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검 손잡이에 힘을 실으려던 찰나,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난 적이 아냐!! 말톤 씨가 보내서 왔어!!”

“뭐, 말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망연히 팔뚝에서 힘을 빼자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그에게 단도를 겨누었지만, 사내는 태연하게 옷에 달라붙은 잔디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말톤 씨가 그쪽 상태 좀 확인해 달라더라. 싸울 생각은 없으니 진정 좀 해.”

“....말톤은 무사해?”

“뭐? 당연하지. 요즘은 탐색도 안 나가니까. 대신 그만큼 르마리아 님에게 허구한 날 쥐어뜯기는 것 같긴 하지만...”

르마리아...?

알 수 없는 인명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는 말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날붙이를 목전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니.. 상당한 담력이다.

딱히 강해 보이진 않은데...

“...네가 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해칠 생각이 있었으면 진작 해치웠겠지. 너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알아? 꼬박 일주일이야. 어찌나 곤히 자던지 죽은 줄만 알았다. 상부의 명령이 없었으면 그냥 숲속에 버려뒀을걸.”

“....”

천천히 단도를 거두어들였다.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적의가 없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 말대로 해코지할 의향이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살려 둘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아니면 내게 다른 용건이 있거나.

언제든 발도할 수 있도록 단도를 소맷자락에 숨기며 한숨 돌리자 비로소 남자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축 늘어진 다갈색 직모 아래 눈동자는 피로에 찌들어 초췌했고, 멜빵으로 대충 고정한 가죽 작업복에선 사용감이 물씬 묻어나왔다.

누가 보아도 생산직에 종사하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는 차림이지만, 두 달이 되어가도록 던전에서만 생활해온 나로선 위화감이 앞섰다.

그가 천막 밖으로 발길을 돌리자 허리춤의 홀스터에 일관성 없이 늘어진 연장들이 쩔그덕거렸다.

“일어났으면 따라와. 신발은 저기 샌들 신고. 조금 쌀쌀할 수도 있으니 담요라도 걸치던가.”

“....”

차마 붙잡기도 전에 사내가 텐트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진 입구에서 눈을 돌리고 침대로 다가가자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샌들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내 발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치수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잠시, 침대 위의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시가를 입에 문 사내가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오 분이면 되니까.”

“...담배?”

“오, 이게 뭔지 알아? 이 지역 근방 사람들은 다들 생소한 눈치던데. 담배라고 하면 대부분 원시 부족의 미개한 풍습인 줄 알더라고... 한 모금 줄까?”

“...사양할게.”

“아쉽네.”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독한 연무를 내뿜었다. 아버지와 함께 중남미를 여행할 때 맡았던 대마초의 냄새. 먼 수풀 너머를 적적하게 응시하는 암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좀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까는 미안했어. 느닷없이 칼을 겨눠서...”

“괜찮아. 손가락이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내 상관 중에는 더한 사람도 많거든. 비번인데 대뜸 숙소에 쳐들어와서 일거리가 생겼으니 당장 출근하라고 하질 않나... 사정도 제대로 안 설명해 주고 두 사람이 머물 거처를 수배하라고 하질 않나.”

...나와 라디 얘긴가.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야? 7계층에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는데... 설마 6계층...?”

포근한 온기를 자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막이 위치한 공터 주변에는 침엽수 대신 활엽수가 우거졌고, 선선한 산들바람이 수런수런 들판에 물결무늬를 수놓았다. 조금 떨어진 시냇가에선 은빛 물고기들이 간간이 튀어올랐다.

들꽃 위를 비행하는 벌과 나비를 멍하니 응시하던 중, 사내가 다용도 파우치에서 주머니칼을 꺼내들었다. 순간 긴장하며 단도를 움켜쥐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붙은 시가 끄트머리를 잘라 소형 철제 케이스 안에 갈무리하고는 턱짓하며 걸어나갔다.

“자, 가자.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설명해 줄게. 동료들 보고 싶지?”

“....”

그의 뒤를 쫓아 공터 외각 오솔길을 거닐었다. 울창한 산림 속을 나아가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이 사내는 내 머리칼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이미 질릴 정도로 봐서 그런 건가?

턱 끝까지 차오른 의문을 삼키며 관목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시야가 탁 트이며 낯선 전경이 드러났다.

“이건...”

인파.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인파가 눈앞을 지나갔다.

일체의 통일감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개중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중전사가 있는가 하면, 가벼운 레더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도 있었고, 온몸에 기묘한 문신을 새긴 수상쩍은 무리와 꼬리를 드러내고 활보하는 건강한 수인이 한데 섞여 쏘다녔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공통점이라곤 전부 한가락 할 듯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으며 노점이 빽빽하게 들어찬 골목 내부를 활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뭐해, 거기서 멀뚱멀뚱.”

“.....”

발길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리에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사내는 난처하게 목덜미를 긁적이곤 무심하게 발길을 돌렸다.

“...멍하니 있지 말고 따라와. 한 번 놓치면 그대로 끝이니까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

속이 울렁거린다.

투구도 없이 이렇게나 많은 인파 속을 나아가는 게 얼마 만인가. 하지만 내가 발길을 주저하든 말든 사내는 매정하게 행렬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그를 놓쳐버릴 터.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한 손에는 담요를, 다른 손에는 단도를 거머쥔 채 인간의 파도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얇은 천 너머로 밖의 풍경이 비쳐 보인다.

“만드라고라의 뿌리가 단돈 48실링!! 지상에 가져다가 팔면 은화 70닢은 거뜬한 물건입죠!!! 다들 한 번씩 보고 가세요!!”

“4계층에 출몰하는 강철 아르마딜로의 갑각 전량 매수합니다! 다른 곳보다 비싸게 쳐드려요!!”

“거기 당신!! 혹시 돈이 필요하시지 않으십니까? 베니스 상인 길드에서 어음을 발급해드립니다! 금전이 급하신 분들은 이곳으로!!”

“이봐, 그 토륨 주괴는 내가 먼저 입찰했어. 눈독 들일 생각이거든 저리 꺼져.”

“어허... 이거 왜 이러실까. 일단 이거 좀 놓고 말하지? 뒈지기 싫으면.”

“금일 인시(??)에 서쪽 시장에서 희귀 마물 소재 경매가 열립니다! 모쪼록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에 귀청이 아플 지경. 온갖 구두와 군화가 짓밟고 지나간 시장 바닥은 난잡하게 늘어선 노점과 호객하는 상인, 멱살을 붙잡고 드잡이질하는 모험가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모포를 부여잡고 행렬을 가로지르던 도중,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나왔다.

“이봐!!”

“──!!!”

“뭐야, 왤케 놀라? 그래 너, 천 쪼가리 뒤집어쓴 수상한 놈.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야... 이거 떨어뜨렸어, 가져가.”

“그건...”

“뭐야, 이 모험가 패 네 거 아냐? 어디 보자... 아카이아 길드 F랭크 도란...”

“가, 감사합니다.”

험상궂은 대머리 남성이 목패를 내밀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말톤에게 맡겼던 물건. 내가 잠든 사이 품에 넣어준 걸까.

나는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나무토막을 받아들고 갈색 머리 사내를 뒤쫓았다.

“이봐...!”

“.....”

“야!!”

“...뭐야, 불렀어?”

“그래...! 대체 여긴 어디야?! 라디는 어디 있고!!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해서 말해줄게. 얼마 안 남았어.”

“제길...”

부모와 떨어진 다섯 살배기 아이처럼 고개를 홱홱 돌리며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수런대는 행인의 목소리가 언제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쏟아졌고, 번뜩이는 시선들 앞에선 얄팍한 천 따위 무용지물이었다.

‘시발.. 시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공황 장애의 초기 증세. 노점 곳곳에 비치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자 현기증이 일었다. 소리와 색채가 긴 파문을 남기며 공회전을 거듭했고, 머리 위에선 햇살이 지독하게 피부를 타고 늘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되풀이된다.

“...도착했으니까 이제 진정해.”

“.....”

끔찍했던 시간이 지나고,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을 즈음에야 목적지에 다다랐다. 인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공터에는 크고 작은 텐트가 잔뜩 세워져 있었으며, 그 앞에는 모험가들이 흙바닥에 주저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날 그중 한 천막 안으로 끌고 들어가 목제 의자에 걸터앉혔다.

“여긴...”

“식당이야. 들어올 때 팻말 못 봤어?”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왜긴 왜야. 여기서 다들 모이기로 했으니까 그렇지. ...아, 잠시만.”

사내가 냉수를 들이켜다 말고 일어나 가게 구석으로 향하더니 주인장으로 추정되는 한 중년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중년은 사내의 말을 듣고 썩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그가 품에서 붉은 패를 꺼내 보이자 돌연 태도를 바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영업 종료 팻말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가는 주인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니, 사내가 허리춤의 연장을 짤랑거리며 되돌아왔다.

“사람들을 물렸으니 이제 모포 벗어도 돼. 잠깐이면 되니까 여기서 쉬고 있어. 말톤 씨를 불러올게.”

“....너 정체가 뭐야.”

“나? 나는 별거 아냐. 좀전은 그냥 내가 몸담은 길드가 좀 특별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거짓말.”

천천히 모포를 들치며 일어났다.

흉흉한 기운이 흐르는 단도를 그의 턱 밑에 들이대며ㅡ

“...네게서 마물 냄새가 나. 그것도 얼마 안 된.”

“네 진짜 정체는 뭐지?”

사내가 마른침을 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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