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암시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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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암시장 #2
시야가 탁하게 물들었다. 비단 텐트를 메운 훈연 때문만은 아닐 터다. 꿈틀거리는 의심이 서서히 피어올랐고, 발치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내 주위를 구축한 세계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러지?”
식당 주인이 꺼져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당황했다. 천막 안의 기류가 서서히 소용돌이쳤고,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그림자들이 속삭인다.
덩굴을 피워내 눈앞의 이 남자를 속박하려던 찰나, 그가 내 어깨를 붙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진정해!! 제길... 이래서 이 자식은 꺼림칙하다고 했는데...! 말톤 씨 불러올 테니 사고 치지 말고 여기 그대로 있어!! 그 단검도 좀 내려놓고!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사내가 서둘러 텐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뒷모습에선 상사에게 치이는 회사원에게서나 볼법한 애잔한 분위기가 풍겼다.
“.....”
남자가 사라지자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모포를 다시 끌어당겨 머리에 뒤집어쓰자 막 잠수를 끝낸 다이버처럼 무기력함이 몰려들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오른손을 들여다봤다. 순간 누군가가 기름을 들이부은 듯,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구쳐오른 살의에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다행히도 가게 주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차갑게 식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지만, 갈색 머리의 사내는 내게 생긴 변화를 짐작한 모양이다.
“젠장...”
손금을 움켜쥐었다. 나날이 검은 아지랑이가 선명해져 간다. 알다가도 모를 이 능력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의혹을 품기도 잠시, 다시금 탄식을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돌아버리겠네.”
얄팍한 모포 한 장으로 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중, 천막 밖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불현듯 불어온 바람이 연무를 흩트려놓은 순간, 어느새 내 정면에는 한 남성이 역광을 등진 채 서 있었다.
“도란...! 일어났는가...!!”
아.
노을이 기울어진 보리 이삭처럼 찬란한 금발. 울창한 정글을 연상케 하는 진녹색 눈동자. 길거리의 행인을 돌아보게 만드는 수려한 외모.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가 내 앞에 있었다.
“말톤!!!!”
와락 껴안았다. 나의 오랜 친구. 근 한 달 만에 만난 그는 말끔한 녹색 로브를 차려입고 있었고, 불에 탄 화상 자국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목제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래... 듣자 하니 굉장한 모험을 한 모양이더군. 자네가 깨어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네.”
그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분명 나보다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크게 느껴지는 내 자랑스러운 동료.
어느새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해후를 나누던 도중, 불현듯 어두운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녀석이라면 분명 라디의 행방을 알고 있을 터.
그에게서 떨어지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톤, 라디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디가 보이질 않아...! 분명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말이네..”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
다그치듯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말톤이 난처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설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쩌면 수정 거미에게 당했던 일격이 치명상이었던 걸까.
“아...”
실이 끊긴 목각인형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 세계는 내게 너무나도 잔혹하다.
이런 허망한 세계 따위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내면에서 피어오른 끈적한 분노가 시야를 덧칠하는 순간ㅡ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홀연히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턱을 들자
“말톤님! 제가 도란 오빠 건들지 말라고 했죠?! 트라함 씨도 보고만 있지 말고 말렸어야죠! 얼굴 창백한 것 좀 봐... 괜찮아요?”
붉은 후드를 걸친 그녀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어, 어떻게...”
우두커니 선 채 멍하니 응시하자 라디가 유심히 내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어떤 점이 그녀의 심기를 자극했던 건지, 곧바로 내게서 등을 돌리고는 말톤의 옷깃을 틀어쥐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톤님!!”
“지, 진정하게, 난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거 좀 보세요! 완전히 넋이 나갔잖아요!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니... 난 정말 아무것도...”
말톤이 억울한 듯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녀석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라디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라함 씨도 여태까지 안 말리고 뭐 했어요?”
“....죄송합니다.”
어느새 다가온 갈색 머리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는 세상 모든 억울함을 짊어진 것 같았다.
대체 내가 기절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디가 내 손을 잡아채며 상황을 불식시켰다.
“...이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도란님은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안정이 우선... 우.. 우세요?!”
“아, 아니거든...!”
“아니 누가 봐도 눈가가 촉촉... 아, 알겠어요! 안 울었으니까 일단 진정 좀 하세요...!”
라디가 내 머리통을 가슴께에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내 등을 토닥여주며 두 남자를 째려봤지만, 차마 말릴 겨를이 없었다.
잠시간 적막이 흐른 뒤, 어느 정도 진정된 내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 어떻게 된 거야...?”
많은 의문이 함축된 물음, 그 물음에 라디가 답했다.
“음... 그 전에 혹시... 배 안 고프세요?”
*
“이제 좀 진정되셨어요?”
“.....”
스푼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토 베이스에 갖가지 채소로 맛을 낸 고기 스튜. 근 한 달 만에 먹어보는 따뜻한 국물에 눈물이 찔끔 고여나올 지경이다.
라디가 부드럽게 내 손에 깍지를 끼며 흑발을 걷어주었다.
“정말... 누가 보면 애인 줄 알겠어요. 그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나 치고 다니고... 듣자 하니 또 한바탕하려고 하셨다면서요?”
“.....”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니...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잖아.. 애초에 말톤 넌 왜 입을 다물었던 건데.”
“자네가 제대로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혼자서 착각하지 않았는가? 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꼴이 얼마나 보기 안쓰럽던지...”
“.....”
재빨리 화살을 돌렸다.
“그, 그럼 그... 트라함 씨? 왜 그쪽에서 마물 냄새가...”
“트라함 씨는 길드에서 마물을 사육하는 직책을 맡고 있어요. 옐로우 리자드처럼 온순한 몬스터는 짐마차를 끌 때 유용하게 쓰이니까요.”
“.....”
트라함이라고 불린 사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한쪽 눈꼬리가 못마땅하게 올라가 있는 건 착각이 아니겠지.
허탈감이 몰려든다.
그 배를 뛰어넘는 수치심은 덤이고.
“그, 그럼 내가 완전히 오해한 거네...?”
“뭐... 그렇지 않을까 싶네만...”
“.....”
귀가 뜨겁게 달아올라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난데없이 신파극을 벌인 거로도 모자라 은인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추태까지 저지르다니.
두 번이나.
“저기... 그... 죄송합니다.”
“...괜찮아.”
“.....”
거북하다.
거북해서 체할 지경이다.
짐짓 헛기침하며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 그래서 여긴 어디야...? 던전 안에 이런 곳이 있었어?”
무수한 인파와 각양각색의 노점. 꼭 성문 앞 장터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하지만 푸른 하늘 너머 발광 이끼 특유의 발색을 보면 던전 내부가 틀림없는데...
말톤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여긴 암시장이라네. 던전 3층에 위치한 곳이지. 이전에 자네에게 말해줬던 적이 있네만, 기억하는가?”
“그래.. 역시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 이 정도로 사람이 모일 장소라면 그곳밖에 없겠지. 다만, 불법 약물 거래를 하거나 살인 청부업이 횡행하는 둥 어둡고 음산할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제법 활기가 넘친다. 규모도 크고.
숟가락으로 버섯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면 어쩌다가 6계층에서 단번에 이곳까지 오게 된 거야? 내 기억으로는 수정 거미의 숨통을 끊기 직전에 어떤 미치광이 여자가 나...”
“도란님...!”
돌연 라디가 손바닥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 트라함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스튜를 그릇에 퍼 담았다.
“...미안, 몰랐어. 그 여자가 누군지 좀 듣고 싶은데...”
“네, 안 그래도 마침 설명해드리려고 했어요.”
라디가 식탁 위에 흐트러진 식기를 가지런히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일단 그때 도란님이 보신 여성분은 아니스라고 불리는 분이에요.”
“아니스? 처음 듣는데... 유명한 사람이야?”
“....”
돌연 천막 안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트라함은 말없이 국물을 들이켰으며, 말톤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라디는 그런 말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허겁지겁 덧붙였다.
“왜, 왜... 내가 방금 이상한 말 했어...?”
“....아니스는 인명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왕국 7대 대귀족의 가문명 중 하나에요. 혹여나 저잣거리에서 속되게 불렀다간 불경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라디가 스푼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입으로 손을 옮겼다.
“....”
과연 그래서 아까 내 입을 틀어막았던 건가.
주의할 게 하나 더 늘었다.
“....그래서, 그 아니스란 분이 어쨌는데?”
라디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A랭크 모험가예요. 트라함 씨가 속한 붉은 매 길드의 수장이기도 하고요. 비스마르크 왕국 모험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그분이 말톤님의 의뢰를 받아서 저희를 구출해주셨어요.”
“뭐.. 말톤? 너 뭐 했어?”
“별 것 아닐세. 자네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 반드시 구하러 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나도 나름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방법을 강구했다네. 그러다가 운 좋게 그녀와 연이 닿아서 자네들의 구출을 의뢰하게 된 거고.”
“그런 일이...”
뜨거운 감정이 속에서 울컥 치밀었다. 담담한 어투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어떤 순간에서도 자신을 희생하여 동료를 지키는 숭고한 정신.
말톤은 결코 단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고마워.”
“천만의 말씀일세.”
녀석이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눈길을 거두고는 라디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 아니스라는 사람 덕분에 여기까지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는 거지? 그렇다면 어떻게든 감사를 표해야겠는데... 아니, 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우리가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폐가 되려나?”
“음... 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도란님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모양이니까요.”
“나? 나 말이야?”
“네.”
“왜...?”
어째서 굳이 나를?
대귀족 출신에 하이랭크 모험가, 나와 라디가 꽤나 고전했던 수정 거미를 단 일격에 박살 낼 정도의 강자다.
말톤의 의뢰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F랭크 모험가는 눈도 제대로 못 맞췄을 인물. 심지어 길드의 수장을 맡고 있을 정도면 하루에 소화할 일정도 빽빽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내게 관심을 품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라디가 쐐기를 박았다.
“그분이 8계층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했거든요.”
“8계층... 설마...”
“네 저희가 만났던 괴조, 카쟈드 이글에게 궤멸당했다고 알려진 파티에요.”
“....”
아귀가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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