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암시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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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암시장 #3
낡은 고서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가 가진 정보를 원하는 건가?”
나와 라디는 7계층에서 한 달이란 기간을 살아남았다. 정확히는 28일이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식량과 의복을 조달했으며, 괴조의 둥지까지 도달한 걸로도 모자라 끝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A랭크 파티가 얼마나 오랫동안 7계층에서 머물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이 발견된 시기를 고려하면 우리보다 길게 체류하지는 않았을 터.
만일 그들이 다시금 8계층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할 수도 있다.
나름 타당한 정보를 근거로 추측하고 있자니 라디가 내 그릇에 살코기를 덜어주며 말했다.
“글쎄요... 제 생각도 같긴 한데... 하이랭커 중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러게... 솔직히 좀 걱정되는데...”
기절할 당시 투구를 쓰지 않았으니 그 여자는 내가 검은 머리라는 걸 알고 있다. 용건을 마치자마자 위해를 가하려 들 수도 있는 노릇.
불법 노예, 집단 린치, 인신 공양 등 불길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네. 지금 자네가 여기 있는 것도 다 그녀 덕이니. 애초에 구출을 의뢰할 때부터 자네의 인상착의를 알고도 서슴없이 나서주었으니 말일세.”
“저도 그 점은 동의해요. 조금 독특한 분이시긴 해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지금 저희가 이렇게 느긋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그분이 편의를 봐줘서 그런 거고요.”
라디가 트라함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그 여자 길드의 일원이라는 건 들었지만, 이외의 설명은 아직 못 들었다. 사람을 꺼리는 라디도 썩 스스럼없이 대하는 걸 보니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데...
라디가 내 의문을 눈치채고 곧바로 보충해주었다.
“도란님이 누워 계시는 동안 트라함 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숙소 선정부터 식량이나 여분 의복 조달까지... 지금 도란님이 신고 있는 신발도 다 트라함 씨가 저희를 대신해서 사와 주신 거고요.”
“...고마워. 아까 일은 다시 한번 사과할게.”
“괜찮아, 덕분에 나도 핑계를 대고 일과를 뺄 수 있었으니까. 아니스 님이 직접 명령한 일이기도 했고.”
그가 달관한 듯 무심하게 읊조렸다. 신기한 사내다. 라디의 종족이나 내 머리에 대한 편견도 없고,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말을 붙이기도 편하다.
...지나치게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식당 주인한테 보여준 건 뭐야?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던데...”
“...아, 이거?”
그가 품에서 붉게 덧칠된 은판을 꺼내 내밀었다. 모험가 패와 비슷한 크기. 하지만 그와 비교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고급진 외관.
특별한 글귀가 쓰여 있는 것도 아닌데 뭐지..?
적색 배경 위에 양각된 은빛 매 문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라디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붉은 매 길드의 상징패에요. 아니스 님이 통솔하는 붉은 매 길드의 전투원은 전원 A랭크지만, 비전투원은 A랭크가 아닌 사람도 입단할 수 있거든요. 물론 까다로운 자격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요.”
“...아카이아 길드나 크누트 길드하고는 많이 달라?”
“음... 아무래도 그렇죠? 아카이아는 불특정 다수가 모인 전형적인 모험가 길드고 크누트 길드는 용병 고용이나 정보 거래소 성격을 많이 띠는 반면에, 붉은 매 길드는 아니스 님을 필두로 한 대형 전투 파티나 다름없으니까요. 하지만 대장장이나 짐꾼은 물론이고 요리사까지 있을 정도니 저희 같은 일개 모험가하고 비교하면 곤란해요.”
“...장난 아니네. 진짜배기 하이랭커는 아예 노는 물이 다르구나...”
“네, 전투를 마치는 즉시 몬스터 부산물을 매입하는 전문 상단도 있다더라고요.”
“.....”
규모부터가 격이 다르다.
과연 ‘파티’가 아닌 ‘길드’를 자처하고도 남을 정도.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해왔던 건 소꿉놀이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강한 모험가 몇 명이 합심해 조금 더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고작일 줄 알았는데...
하기야 A랭크 모험가가 여럿 있다면 인건비쯤이야 우스울 테고, 굳이 전투 외적인 요소에 신경을 쓸 바엔 마물을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게 이득이겠지.
사냥하고 떨어지는 콩고물만 해도 상당히 짭짤할 터, 장사치들이 목숨 걸고 들러붙는 것도 이해가 간다. 노예를 쓰지 않은 건 전문성을 중시해서 그럴 테고.
“그러면... 트라함 너는 마물 사육 담당이라고 했었지? 그건 무슨 역할이야?”
길드 패를 돌려주며 묻자, 녀석이 그릇에서 눈을 떼며 답했다.
“...그냥 마굿간지기가 하는 일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먹이 주고 관리하고 그런 거지. 항상 마물만 취급하는 건 아니고 가끔 대장일이나 제혁 공정도 담당하지만.”
“대장일에다 제혁까지?”
“그래, 우리 길드는 생산직이라도 여러 보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거든. 만약 전장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급하게 빈자리를 메꿀 수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입단 조항에 최소 2개 이상 직업 조합에서 실적을 쌓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거고.”
“...장난 아니네.”
어쩌면 이 녀석도 상당한 엘리트가 아닐까.
하긴, 오지 한복판에서 몬스터에게 치여가며 하이랭커를 만족시킬 수완을 내려면 굉장한 실력이 필요할 테니.
천천히 숟가락을 떠올리며 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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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스튜도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이후로도 잡다한 대화를 나누며 과일로 입가심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설원에서 생존하며 겪은 이야기를 해주자 말톤이 눈동자를 빛내며 흥분했다. 특히 울시가 나오는 대목에선 당장 7계층으로 달려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트라함도 턱을 짚으며 경청하는 게 썩 흥미로워하는 눈치고.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을 무렵, 한 남성이 거칠게 천막을 젖히며 들어왔다.
“야, 트라함! 여기 있었냐!! 한참 찾... 그쪽은?”
“.....”
반사적으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테이블 아래 숨었으나 들킨 모양이다.
트라함이 허리를 빼고 날 내려다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니스 님이 돌보라고 지시한 사람이야.”
“아 그 7계층에서 주워왔다던 F급 모험가? 별난 놈이네. 아니스 님은 대체 무슨 생각...”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 맞다. 저 사람 일어났으면 막사로 데리고 오래. 전했으니 난 이만 간다! 곧 광장에서 희귀 소재 경매가 있다더라, 그럼 수고해!!”
“.....”
붉은 매 길드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청년이 나타났던 기세만큼이나 빠르게 뛰쳐나가자 트라함이 피로에 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주름이 펴질 새도 없이 좀전의 청년이 다시금 천막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또 왜.”
“아, 이번엔 너 아냐. 말톤님, 르마리아님이 찾고 계시던데요? 오 분 안에 안 뛰어오면 온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뽑아버린다고 그랬어요.”
“뭐, 뭣이..?!!”
쿠당탕!
말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기립했다.
“어, 언제 말인가..?!!”
“그러니까... 한 삼십 분쯤 전...?”
“그걸 왜 이제 말하는가!!!”
“음 그게... 저도 까먹었지 뭐예요. 헤헷...”
“젠장!! 나중에 보세 도란!!!”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말톤이 쏜살같은 기세로 천막을 뛰쳐나갔다. 의자에 벗어두었던 로브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
황망한 표정으로 녀석이 떠나간 입구를 쳐다보던 중, 음식점 주인의 코 고는 소리에 이성을 되찾았다.
빼꼼 테이블 위로 고개를 내밀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슬그머니 도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쟤는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저렇게 허둥대는 말톤은 처음인데... 대체 르마리아란 사람이 누구길래.”
“음... 그게.. 말톤님도 여러 사정이 있었나 봐요. 대충 듣기로는 이곳에서 옛 지인을 만난 모양이더라고요...”
“옛 지인? 말톤한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못 들어봤는데...?”
“아마 곧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분도 붉은 매 길드의 전투원 중 한 분이시니까요. ...이제 그쪽으로 가는 건가요?”
라디가 트라함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골칫덩이를 한 아름 떠안은 표정으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슬슬 움직이죠. 아니스 님이 찾고 계신 모양입니다.”
“네, 저희도 이제 일어나죠 도란님.”
“...그래.”
트라함의 등을 쫓아 점포에서 나오자 따스한 햇볕이 눈가에 내리쬐었다.
모포 너머로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라디가 내게 말톤의 로브를 여며주었다.
“...고마워.”
“천만에요. 이제 걸을 수 있죠?”
“그래.”
애정을 담아 마주보자 녀석이 살가운 눈웃음으로 화답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누가 봐도 수상한 커플 탄생이다.
“...따라와, 복잡하니까 놓치지 말고.”
트라함이 담담하게 턱짓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필연적으로 시장통을 거슬러 나아가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그리 고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든든한 후드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항상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오는 라디가 곁에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한몫했으리라.
‘나도 아직 멀었구나...’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언젠가 이 트라우마를 떨쳐내는 날이 올까?
그렇게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노점을 구경하며 나아가던 중, 한 가지 묘한 점을 눈치챘다.
“깃발?”
요기도 저기도 그 어디를 둘러봐도 홍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짙은 장미 빛깔의 배경 중심에는 금실로 자수를 놓은 매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트라함의 길드 패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형태.
점포 차양막에 달린 붉은 휘장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꼬맹아, 저거 붉은 매 길드 상징 맞지? 왜 모든 가게가 저 엠블럼을 달고 있는 거야? 저 사람들이 전부 붉은 매 길드의 일원도 아닐 텐데...”
“아, 그건 붉은 매 길드가 이곳 암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장악했다고? 뭐 무력으로 점거하기라도 한 거야?”
“음... 아뇨, 조금 달라요.”
라디가 후드 아래로 눈동자를 빛내더니 검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저희가 처음 암시장의 존재를 알았을 때 도란님이 던전 외부에서 가져온 물건으로 수익을 올릴 수 없냐고 물었었죠? 가령 생필품이라던가...”
“그랬.. 지...?”
“왜요, 틀려요?”
“아니, 그때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도란님하고 같이 던전에 들어온 첫날이었잖아요. 잊어버렸을 리가 없죠. 그때 제 손도 잡아주셨는데...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하지.”
...막상 그때는 무심코 한 행동이었지만.
하여간 그 말대로, 지상에서 들여온 물건을 매매해 수익을 올릴 생각을 하긴 했었다. 이렇게나 큰 던전이라면 필연적으로 도중에 물자를 보급해야 할 테니까. 나날이 마모되어 가는 칼날과 찌그러진 흉갑, 점점 줄어드는 해독초 따위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모험가들이 암시장에 몰려드는 건 불가피한 일. 여기서 한 몫 제대로 챙기면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우리가 그러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혹시라도 세력 다툼에 휘말렸다간 큰일이니까.’
달콤한 과실에는 응당 파리가 꼬이는 법. 시간이 지나면 암시장을 통제하려는 세력이 생길 테고,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상당수의 수입을 강탈해갈 게 뻔했다. 상인들처럼 아예 작정하고 대량의 물자를 가져오거나 믿을만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닌 이상 큰돈을 만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그때는 여러 세력이 대립하며 주도권을 노리는 무법 지대와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붉은 매 길드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난 뒤로부터는 아니스 가문의 이름 하에 이곳을 관리하고 있거든요.”
“...관리라 하면 뭘 하는 거야?”
“음... 일단 기존에 있던 무력 집단을 싹 몰아내고 물가를 안정화하는 거죠. 나라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아 일정량 세금도 거두니 이젠 암시장이라고 부르기도 사실 좀 그렇고요. 상인들도 처음에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날마다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시정잡배들이 사라지니 만족하는 분위기라나 봐요.”
“아니스라....”
그래서 아까 점포 주인이 트라함이 내민 길드 패를 보고 화색했던 건가.
라디의 말을 들어보면 참 좋은 사람 같은데...
“그런데 재밌는 점이 하나 있는데 아세요?”
“재밌는 점...?”
의아하게 되묻자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붉은 매 길드가 암시장을 장악한 시기가 8계층 진출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간 무렵과 맞아떨어져요.”
“..그 말은 즉...”
“도착했어.”
창졸간 몇 걸음 앞서 나아가던 트라함이 연장을 짤랑거리며 멈춰섰다. 그의 어깨너머엔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천막들이 줄지어 있다.
꿀꺽.
다홍색 천 너머로 별처럼 찌릿찌릿한 존재감이 여럿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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