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암시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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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암시장 #4
“...뭐 하세요?”
“아니 혹시 냄새 때문에 불쾌할까 봐...”
소매에 얼굴을 들이대고 코를 킁킁거리고 있자니 라디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메케한 연기로 가득한 점포 내부에 있었다. 혹여나 로브에 냄새가 배어들었으면 큰일. 이제 곧 A랭크 일행을 만나러 가는데 음식 냄새를 폴폴 풍기며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혹시 예법 같은 걸 갖춰야 하나?”
조심스레 묻자, 트라함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스 님은 상당히 털털한 분이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
콰아아아앙!!!!
“뭐, 뭐야?!!”
돌연 우렁찬 폭발음과 함께 막사 인근에서 거뭇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노도의 기세로 흙과 잔디를 뒤엎으며 눈앞을 스쳐지나간 그 인물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나서야 멈춰섰다.
“커허흑....!”
“아니 잠깐만... 말톤...?”
“도, 도란... 자네인가..?”
갈색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았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녀석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은 까치가 파먹은 듯 산발이 되었고, 천옷 곳곳에선 검은 그을음이 피어오르는 중이다. 심지어 소맷자락에는 투명한 살얼음이 잔뜩 껴있다.
“이게 어찌 된...”
“나, 나중에 설명하겠네...!”
말톤이 다급하게 무릎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이내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막사 한구석을 응시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흙의 장벽이 솟아올라 퇴로를 원천 차단했다.
“무, 무슨...!”
저벅.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풀잎이 살랑이며 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
엘프.
황금을 잘게 부숴 수놓은 듯 반짝이는 금발 아래 짙은 초색 눈동자. 백옥같이 새하얀 살결은 설원을 연상시킨다.
라디와 비슷할 정도로 작은 신장이지만,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범상치 않은 패기를 품고 있었다.
그녀가 말톤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들고 알 수 없는 말로 소리쳤다.
“..........!!”
“.......!!”
뭐라는 거지?
“엘프들의 언어인가 봐요.”
“엘프의 언어라...”
과연.
최근에는 베라스틴 인근에서만 활동하다 보니 좀처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들을 일이 없었다. 모험가가 되기 전, 비스마르크 어를 배워둬서 다행이었지...
소녀에게 사정없이 구레나룻을 잡아뜯기는 말톤을 관망하자니 안쓰러운 심경이 들었다. 하지만 차마 나서지는 못하고 방관하자 녀석이 내 이름을 외치며 애달픈 시선을 보내왔다. 구원이라도 바라는 눈치인데...
아니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불똥이 튈세라 깔끔하게 고개를 돌리자 말톤의 눈동자에 절망이 서렸다. 녀석도 감당 못 하는 상대를 내가 어쩌하겠는가. 보나 마나 말톤이 잘못했겠지.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을 대로변에서 드러내고 다녔다거나...
다만 문제는
“도란? 그 F랭크 모험가?”
엘프 소녀의 입에서 익숙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말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자 어색하게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가 크게 벌어지며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족..?”
“그...”
“뭐야... 잘못 봤나.. 네가 그 애 맞지? 아실리가 6층에서 주워왔다던. 뭐해 빨리 안 들어오고.”
그녀가 시큰둥하게 턱짓하며 말톤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천막 안쪽으로 사라졌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나도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가.
로브자락을 틀어쥐며 머뭇거리고 있자니 트라함이 하품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럼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잘 해봐.”
“너, 넌 안 들어가?”
“내가 왜. 내 역할은 너희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뿐이야.”
“....들어가죠 도란님.”
“젠장...”
이제 와서 내뺄 수는 없다.
어쨌든 나와 라디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들이기도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소맷자락에 숨겨둔 단도의 감촉을 확인한 뒤, 천천히 발을 옮겼다.
크게 심호흡하고 붉은 천을 젖히자 묵직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
중압(??).
막사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후드에 내리꽂혔다.
천막 중심엔 대형 원목을 통째로 갈라 만든 테이블이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고, 열에 가까운 미목수려한 남녀들이 저마다 편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커다란 랜스를 짊어지고 비스듬히 발을 올린 무뚝뚝한 남성, 온화하게 눈꼬리를 휘며 따뜻한 미소를 보내오는 여인, 험상궂게 노려보지만 눈가에는 웃음 주름이 자글자글한 드워프와 표범 무늬 꼬리를 흔들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수인 소녀 등.
전부 각양각색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같이 미려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
공기 중에 맴도는 희미한 찻잎 향을 자각하며 상석을 올려다보자 수정 거미를 물리칠 때 보았던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보였다. 저 사람이 바로 아니스겠지. 과연 어마어마한 기백이다.
“.....! ....!!”
그들을 응시하던 도중, 다급하게 소매를 잡아끄는 손길에 옆을 내려다보니 라디가 내 후드를 초조하게 눈짓하고 있었다.
‘...제길.’
이대로 있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건가.
나는 크게 숨을 머금고, 천천히 후드를 젖혔다.
““......””
정적.
머리칼을 드러내자 한밤의 서재보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수많은 시선이 화살촉으로 변모해 내게 꽃혀들었다.
무심히 랜스를 손질하던 사내도, 느긋하게 홍차를 음미하던 여성도 지금만큼은 나를 돌아보았고, 시간이 정지한 듯 육중해진 공기의 밀도가 호흡을 틀어막았다.
보글보글 끓는 찻주전자와 구석에 박혀 끙끙대는 말톤의 신음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으나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갈라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떨리는 시선을 바로잡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로브 아래 숨긴 칼자루를 단단히 틀어쥐려던 찰나─
“뭐, 뭐야..! 엄청 잘생겼잖아!! 아실리! 왜 미리 말 안 했어?!!”
“흐흐... 일부러 비밀로 했지. 어때 꽤 반반하지?”
표범 수인 소녀가 자리를 박차며 소리치자 상석에 앉은 아니스가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확실히...”
“...인물이 좋군. 단련도 열심히 했나 본데...”
“에이... 디론처럼 우스꽝스럽게 생겼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뭐라고? 넌 코볼트랑 판박이다 이년아!!”
“머리숱이 적어서 안 들리는데?”
“풍성해서 좋겠다!!!”
곳곳에서 감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행색을 유심히 눈여겨보는 남성과 나를 두고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궁사, 멍하니 입을 벌리고 상체를 기울이며 쳐다보는 여성 창술사까지.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반응도 가지각색이었으나 대부분 호의적인 눈치다. 특히 여성진에서의 반응이 좋다.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피하자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라디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넌 왜 우쭐해 하는 건데.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불편하게 서 있자니 표범 수인이 성큼 다가와 킁킁거리며 체취를 맡았다.
난처하게 두 손을 들어올리자 아니스가 굽이치는 적발을 매만지며 내뱉었다.
“니아, 그쯤 해 둬. 꼬마가 곤란해하잖아. 너희들도 품평은 그만하고.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네네~.”
표범 수인 여자가 장난스레 내 어깨를 붙잡고 빈자리에 끌어앉혔다.
뿌드득...!
‘...으윽.’
괴물.
어마어마한 완력에 근육이 삐걱거렸다. 제 딴엔 나름 힘 조절을 한 거겠지. 자각이 없는 걸까.
수인 소녀의 입꼬리에 맺힌 순진무구한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라디는 그 모습을 목격하곤 황급히 뒤따라 의자에 주저앉았다.
“.....”
제길.
대화가 끊기자 다시 또 어색한 침묵이 드리웠다.
긴장을 머금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사제복을 입은 한 여성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라디 앞에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겁낼 필요 없단다 애야. 아픈 덴 없니?”
“네...?”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복부를 가리켰다.
“회복되긴 했어도 아직은 무리하면 안 된단다. 신성력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겠구나.”
“아... 그럼 혹시 절 치료해주신 사람이... 고맙습니다.”
“그래, 후훗..”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내 흑발을 상냥하게 쓸어내리고는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구나.
고개를 들어 상석에 앉은 적발의 여성과 시선을 마주하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스 님, 우선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
“입에 바른 소리는 됐어.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자고 부른 게 아니니까.”
그녀가 내 말허리를 자르며 와인잔을 응시했다. 이어 단숨에 들이키곤 내 쪽을 돌아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도란, 내가 왜 너를 불렀는지 알고 있어?”
“....”
그간에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7계층의 지형과 괴조.. 카쟈드 이글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닙니까?”
확신했다.
만일 붉은 매 길드가 계층 진출을 완전히 포기했더라면 암시장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거다. 이 던전 말고도 사냥할 장소는 널려있으니까.
커다란 몸집 탓에 하루 유지비만 해도 상당할 붉은 매 길드가 이곳에 체류하며 암시장을 장악했다는 건, 그 과정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힘과 자원을 비축해 재도전할 기회를 노리는 게 아닐까.
그런 와중에 들려온 나와 라디에 대한 소식은 상당히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틀렸어.”
“네...?”
그녀가 와인 글라스 아래 찰랑이는 잔흔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카쟈드 이글 따위 별거 아냐. 정비할 시점이라 그냥 물러났을 뿐. 우리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고 소문이 와전된 모양인데..”
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흘리고 다니는지, 콧방귀를 뀐 그녀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는 진홍색 눈동자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7층에 대한 지형 조사도 이미 오래전에 끝냈어. 그래서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올 때 출구에서 딱 맞춰 대기할 수 있었던 거고. 무엇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8계층 진출이 아니야. 그건 그저 부차적인 과정에 불과하지.”
“그럼 대체 어째서...”
눈앞의 사람들은 명실상부 최강의 반열에 오른 자들 중 하나다. 사실상 볼 일이 없는 S랭크나 막강한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칼른베니아 제국의 강자들이 아니라면 모험가 중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사람들이 왜 귀중한 시간을 들여가며 날 불러내...
“너 때문이야.”
“....네?”
“다 너 때문이었다고. 도란.”
분위기가 일변했다.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훑었다.
칼자루를 움켜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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