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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25화 (125/375)

〈 125화 〉 암시장 #5

* * *

[125] 암시장 #5

“니아.”

“응!”

­콰드득!!!

일순간.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테이블 위에 처박혔다.

수인 소녀가 날 짓누르며 소맷자락에서 단도를 빼갔다.

“미안해 소년. 악감정은 없...”

­파지지직!!!

“호오...?”

내 손을 떠난 단도에서 검은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말톤조차도 어쩌지 못했던 힘. 이거라면 분명 그녀도 단념...

“얍!!”

­프스스....

“.....!!!”

수인 소녀가 발랄한 기합을 내지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자 불똥이 꺼져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봐도 그녀의 새하얀 손바닥에는 아무런 흉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네~! 이건 대화가 끝날 때까지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표범 수인이 가슴골 사이에 단검을 집어넣었다. 순간 다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단도는 더 이상 사나운 기운을 내뿜지 못했다.

“....시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경솔한 행동은 삼가야 할 상황이지만, 다행히도 내 태도를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호의가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

다시금 자리에 착석해 아니스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뭔가 착오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는 평범한 신출내기 모험가입니다. 랭크도 F밖에 안 되고, 모험가로 전향한 지도 반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래, 네 말마따나 막 모험가에 입문한 신출내기가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렸다는 말이지? 반년이라... 디론, 네가 비슷한 마물을 사냥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어?”

“나...? 갑자기 나는 왜...”

“그냥 묻는 말에나 대답해.”

“흠...”

등 뒤에 커다란 대궁을 짊어진 남자가 턱을 괴며 고민에 잠겼다. 조금 전 머리숱이 적다고 놀림당했던 바로 그 남성.

사내가 부자연스러운 머리칼을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블루 와이번 정도면 얼추 격이 맞겠지... 내가 B랭크일 때 쓰러뜨린 놈이니 모험가로 데뷔한 지 한 10년쯤 지났을 무렵일 거야. 그때도 성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던 걸 고려하면...”

아니스가 어떻냐는 듯 내게 턱을 기울였다.

“.....”

입을 굳게 다물며 침묵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너를 찾았냐고? 그래, 어디부터 이야기해주면 좋을까. 우리가 재정비를 위해 7계층에서 물러났다고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 끊겼기 때문이야. 왜 제때 와야 할 물자가 오지 않았는지 알아?”

“...그것이 저랑 연관이 있습니까..?”

“보급부대가 전멸했거든. 아니,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표현이 올바르겠지만, 보급병이 물자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선 전멸이라고 봐도 되겠지. 목숨만 간신히 부지해서 도망쳐왔더라고. 상위 계층도 아니라 겨우 1층과 2층을 잇는 통로에서. 나름 강자들이었는데..”

“....”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그림자 소녀가 벌인 짓이 분명하다.

바로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막사 안, 환한 빛을 내뿜는 마석등을 의식하며 라디가 로브 자락으로 내 그림자를 덮자, 아니스가 원목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전원 C랭크 이상으로 구성된 나름 출중한 인재들이었어. 그런 녀석들이 완전히 탈탈 털려서 돌아왔다고. 그것도 단 한 마물에게. 당연히 빡이 돌지 안 그래? 그래서 우리가 7계층 공략도 중단하고 직접 던전 1층으로 향했는데... 이게 웬걸?”

­꿀꺽.

무슨 말이 이어질지 짐작이 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맹금류 같은 시선으로 날 바라봐왔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알아? 우리 길드의 보급부대를 전멸시킬 정도로 강했던 마물이 이미 토벌됐다더라고. 고작 한 모험가에게. 하이랭커면 말도 안 해, 한낱 F등급 풋내기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처음엔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건 그 모험가가 투구를 썼다는 점뿐이었고.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다 보니까 반쯤 포기상태였는데...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더라고. 아델.”

­툭.

비스듬히 창을 걸머진 묘령의 여인이 양피지로 된 보고서를 건넸다.

아니스는 우아한 손길로 받아들고는 그 아래 적힌 내용을 읊어나갔다.

“동짓달 열하루 자시(子?) 무렵. 던전 2계층 중심부 절벽 위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 오십이 넘는 도적 무리가 모험가 일행을 급습하였으나 도중부터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 공멸. 그리고 몬스터를 물리친 존재가... 음.. 너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모릅니다.”

진실이다.

나는 라디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직후 의식을 잃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게 끝난 뒤였다.

아니스가 무심하게 양피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아.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신빙성이 떨어지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투구를 쓴 모험가가 이곳에 있었다는 거야. 우리는 그 남자가 이번 사건의 핵심을 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 뒤로 소식이 없어서 또 오리무중으로 빠지나 했는데... 그때 누가 나타났는지 알아?”

“.....”

그녀가 텐트 구석을 눈짓했다. 별개의 의자가 마련된 그 자리에는 뚱한 표정을 지은 말톤과 한숨을 내쉬는 엘프 소녀가 있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고 생각했지. 나는 이미 7계층 탐색을 마친 시점이었고, 덕분에 그 낭떠러지가 어디로 이어지는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설원을 일일이 탐색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서 6계층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너라면 분명 탈출해서 그리로 올 줄 알았거든. 그리고 수정 거미와의 전투를 보고 깨달았지.”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다는 걸.”

그녀가 사납게 입꼬리를 올리자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났다.

확신의 찬, 승리자의 웃음.

긴 추적 끝에 사냥을 성공한 암사자의 노호(??)를 목도하며 나는 버겁게 입을 열었다.

“...제게 뭘 바라는 겁니까.”

아니스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너, 우리 길드에 들어와라.”

*

“...조금 놀랐어요.”

“그러게....”

냇가에 걸터앉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냇물에 발을 담그자 뒤숭숭했던 머릿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멍하니 구름 너머를 응시하며 라디의 손을 어루만지자, 그녀가 상활한 감청색 눈동자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러셨던 거예요?”

“뭐가.”

“왜 입단 제의를 거절하셨어요..? 이런 좋은 기회는 흔치 않을 텐데...”

“아 그거...”

나는 피식 웃은 뒤 살포시 그녀를 끌아안았다.

“너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붉은 매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유혹을 떨쳐내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건 인정한다. 지구로 따지자면 공짜로 대기업에 입사시켜준다는 제안이나 다름없으니까. 상당한 명성과 선망의 시선은 물론이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디가 없는데.

붉은 매 길드에서 활동하면 필연적으로 그녀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다. 그간 이 세계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고통받던 와중 간신이 찾아낸 행복을 내칠 수 있을 리가. 그녀를 만나기 전 겪은 외로움, 박탈감, 모멸, 멸시, 굶주림...

내 가슴에 난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 건 라디뿐이다.

그리고­

“....?”

“...아무것도 아냐.”

나의 능력.

붉은 매 길드에 들어가는 게 능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능력은 여타 다른 모험가들처럼 일반적인 경로로 성장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검은 기운의 정체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목이 따라붙는 대형 길드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머리 때문에 길드원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고.

라디의 어깨를 끌어안자 그녀도 다소곳이 체중을 실어왔다. 다정하게 깍지 낀 손을 어루만지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렇게 반짝이는 시냇물의 물살이 일렁이는 옆얼굴을 훔쳐보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중, 불현듯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단두대 앞의 핏줄기처럼 굽이쳐 흐르는 적발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니스 님...!”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제안을 거절한 뒤라 그런지 얼굴을 보기가 거북하다. 자칫 귀족에 대한 모독으로도 비출 수 있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는 듯 휘휘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지 않아도 괜찮아. 딱딱한 건 싫어하거든. 아니면 너도 내 동료들처럼 본명인 아실리아라고 부를래?”

“제, 제가 어찌 감히...”

“어쭈, 아까는 두 눈 부릅뜨고 바락바락 노려보더니. 그때의 패기는 어디로 갔어?”

“그, 그건... 아얏!!”

아니스가 내 볼따구를 꼬집자 통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격식을 차리는 것도 잊고 울상을 지으며 뺨을 매만지자 그녀가 나와 라디를 따라 구두를 벗고 냇가에 발을 담갔다.

귀족에 대한 편견과는 달리 꽤나 허물없는 모습에 멍하니 쳐다보자,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고 있구나?”

“네?”

“내 제안을 거절해서 혹시 불이익을 당하진 않을까... 그런 표정인데?”

“....”

완전히 속내를 들켜버렸다.

얼떨떨하게 뒷말을 고르자니 아니스가 피식 실소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괜찮아,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야. 아직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고.”

“네...?”

“....뭐야, 그럼 고작 한 번 거절당한 걸로 단념할 줄 알았어? 앞으로도 계속 유혹할 거야. 다음번에는 더 달콤한 미끼를 던져서... 그래도 강압적인 방법은 쓰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아... 그...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당돌한 선언에 무심코 여지를 주고 말았다. 티 없이 솔직한 미소를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이 여자도 외견상으론 내 또래 여자애와 별 차이가 없구나.

아니스가 나와 라디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곳에 있는 동안은 편하게 즐겨. 지상으로 나가고 싶지? 며칠 뒤에 보급부대가 물자를 수송하러 떠나니 그때 같이 나가.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야.”

“이건...”

그녀가 허리춤에서 은빛 매가 음각된 붉은 금속판을 내밀었다. 트라함이 가지고 있던 바로 그 길드패.

“원래는 우리 길드원만 소유할 수 있는 거지만.. 예외로 하지 뭐. 이걸 이곳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여러 편의를 볼 수 있을 거야. 지상에서도 가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테고. 너희는... 아무래도 자주 말썽에 휘말릴 듯해 보이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귀한 걸 저희가 받아도 될...”

“그냥 줄 때 받아. 맘 돌리기 전에.”

“가, 감사합니다.”

얼떨결에 은판을 받아들었다. 아니스의 윙크를 뒤집어쓰자 이상하게 내가 더 부끄러웠다.

그녀가 벗어두었던 구두를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올라간 치마 사이로 톱날 단검이 언뜻 비쳐보였다.

...잠깐, 저 단검 분명히 어디선가..

“아 맞다.”

아니스가 막사 쪽으로 향하던 중,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며 말했다.

“저번에 수정 골렘을 해치울 때 네가 썼던 힘. 그거 왠지 좀 불길해. 나도 꽤 오랫동안 전장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그런 능력은 처음 봤어. 그래서 마지막 일격도 일부러 내가 가한 건데... 아무튼 조심해. 힘에 먹히지 말고.”

“....감사합니다.”

“그래, 그리고 비아투스가 찾는 모양이니까 한번 가 봐. 너희 둘에게 할 말이 있다더라.”

“비아투스...?”

“아까 보았던 드워프예요.”

라디가 귓가에 속삭였다.

“드워프라...”

나와 아니스가 대화하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그 풍채 좋은 할아버지 말인가. 대체 어떤 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눈가에 가득한 웃음 주름으로 보아 평소에는 유쾌한 성격인 듯싶은데...

아니스에게 고개 숙여 작별하고 막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라디가 길드 패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말했다.

“그래도... 결국 아니스 님은 좋은 사람이었네요.. 저도 깊게 대화를 나눠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러게... 원래 저런 귀족도 흔해?”

“그럴 리가요. 귀족들 중엔 평민을 하대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더군다나 아니스 님처럼 지위가 높으면 더더욱. 공작 가문 출신이셔서 상당히 완고하실 줄 알았는데...”

“...역시 공작 가문이었나.”

예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인물이었다. 만일 그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내 행동을 꼬투리 잡아 불경죄로 처형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 아니, 면전에서 단도를 꺼내들었으니 반역죄를 적용해도 할 말이 없다.

그녀가 주고 간 길드 패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저 멀리서 갈색 머리의 사내가 연장을 쩔그럭거리며 다가왔다.

“여, 트라함!”

“....이야기는 잘 끝났나 보네.”

“그래, 고맙다. 너희 단장 좋은 사람이더라.”

“....”

그가 말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한 걸 보니 막 일을 마치고 온 걸까?

“그런데 비아투스란 사람이 우릴 찾는다는데 어디 있는지 알아?”

“....데려다줄게.”

그가 곧바로 발길을 돌리려 하길래 손을 휘저어 만류했다.

“바쁘지 않으면 조금만 쉬었다 가자. 너 좀 지쳐 보인다.”

“.....”

그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한가롭게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떠내려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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