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암시장 #6
* * *
[126] 암시장 #6
“음... 그러니까 저기가 바로 비아.. 비... 비아그라...?”
“비아투스.”
“그래, 아무튼 그 드워프가 지내는 곳이란 말이지?”
트라함의 안내를 받아 큼지막한 텐트 앞에 도달했다. 이곳에서는 천 색으로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기라도 하는지 두꺼운 방수천 위에 덧데어진 검갈색 외피는 드워프의 억센 턱수염을 연상시켰다.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뜸을 들였다.
“트라함, 그 비아투스란 사람은 어떤 성격이야? 조금 사나워 보이던데...”
“사납다고?”
“어, 대화하는 내내 계속 인상 쓰고 있던데?”
“...그럴 리가, 잘못 본 거겠지. 그 영감만큼 성격 좋은 사람도 드물 텐데.”
트라함이 그럴 리가 있냐는 듯 고개를 저으며 텐트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아투스의 천막 입구는 그의 체형에 맞춘 탓인지 널찍했지만, 높이가 낮아 허리를 굽히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가죽으로 된 두꺼운 가림막을 젖히자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 꼬맹이 트라함 아닌가!! 무슨 일로 찾아왔어 그래! 또 공구가 말썽이야? 아니면 날삽 끝이 무뎌졌는가?!”
“아냐 영감, 이번엔 그냥 안내해주러 온 거야. 얘네들 찾았다며? ...디론 씨도 안녕하세요.”
“그래, 여전히 고생이 많네.”
천막 안에는 드워프 말고도 한 남성이 목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조금 전 막사에서 아니스와 대화할 때도 봤던 남자.
그는 무기에 결함이 생겼는지 비아투스에게 대궁을 맡기는 중이었지만
“저거...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머리카락이 몹시도 부자연스럽다.
가발을 거꾸로 뒤집어쓰기라도 했는지 뭍으로 올라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져 볼품없는 모양새. 어떻게 아직까지도 눈치채지 못했지...?
그가 쾌활하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 아까 그 꼬맹이들이잖아? 제법인걸, 그 설원에서 살아남다니. 이 천하의 디론도 그 추위엔 한 수 접어줬는데 말이야. 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겠지?”
“아... 네, 물론이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디.. 디...”
“디론 님, 만나서 영광이에요.”
“그래 그래. 힘들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디론은 굉장히 스스럼없는 성격인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의자를 빼내 주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라디와 함께 자리에 앉자 그가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그땐 제법이었어. 아실리아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모험가는 정말 오랜만이야. 제법 실력도 있는 모양이고.. 듣자 하니 무슨 요상한 기술을 쓴다면서? 오징어 수인마냥 촉수 같은 걸 다룬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네.. 뭐... 비슷합니다.”
“희한하네.. 길드 가입 권유는 왜 거절한 거야?”
“...붉은 매 길드처럼 대형 집단에 속해서 활동하는 건 시기상조라 생각했습니다. 제안은 정말 영광이지만 제게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그래? 아쉽네... 그런데 너 진짜 F랭크 맞아?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릴 정도면 최소 C랭크 이상 실력이잖아. 혹시 위장 계급이거나 그런 거야? 도시에서 세금 감면 혜택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 뭐, 너도 힘들었겠네..”
그가 내 머리칼을 의식했는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걸까? 아무리 날고 기는 A랭크 모험가라도 머리숱은...
“다 끝났네 디론! 이제 전처럼 쌩쌩할 거야!! 혹시라도 또 말썽을 부리면 다시 오게나. 그땐 아예 중통을 갈아줄 테니!!”
“오 땡큐 영감! 나중에 맥주라도 들고 찾아올게. 그럼 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너희들도 잘 지내고!!”
디론이 드워프에게서 대궁을 받아들더니 쏜살같이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남성 호르몬이 듬뿍 묻어나올 것 같은 외견과는 달리 제법 싹싹한 성격이다.
잠시 어색하게 의자에 앉아있자니 드워프가 제 앞에 있는 목제 침대를 턱짓하며 말했다.
“흠흠... 그래, 도란이라고 했던가? 이쪽으로 와서 앉아 봐. 거기 수인 꼬맹이도.”
“...네.”
“실례하겠습니다...”
라디와 내가 머뭇거리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자 삐거덕거리는 신음이 들려왔다. 원목을 그대로 깎아 만든 튼튼한 침상도 드워프의 체중은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중앙이 움푹 파여 있다.
그가 의자를 돌려 마주보더니 천천히 화제를 입에 담았다.
“....내가 왜 자네들을 불렀는지 알고 있나?”
강철 모루가 돌바닥을 긁는 듯한 저음.
조금 전까지 살갑게 굴던 태도는 온데간데없다. 짙은 흙색 눈동자가 날 똑바로 응시해왔고, 툭 불거진 광대뼈와 불룩한 코에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돌았다.
망치로 내리쳐도 끄떡없을듯한 팔뚝이 팔걸이를 움켜쥐는 걸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비아투스님. 혹시라도 저희가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우선 사...”
“그런 게 아닐세!! 정말 모르겠나?!!!”
“...!!”
눈앞의 드워프가 호통치자 라디가 귀를 움찔거렸다.
나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맞잡아주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바가...”
“허허.. 시치미 뗄 속셈인가... 그렇게는 안 봤거늘...”
그가 혀를 차며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이켰다. 저거 술 같은데...
‘제길...’
꼭 완고한 장벽을 대하는 것만 같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할 따름. 어미에 거친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그의 언사를 듣고 있자니 보다 못한 트라함이 다가와 술잔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영감, 내가 성미 좀 줄이라고 했지. 일단 차분하게 설명부터 해 봐.”
“흠흠...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미안하군. 조금 흥분해서 말이지...”
그가 손을 내저으며 몸을 굽히더니 탁자 아래서 꺼낸 물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어디부터 얘기하면 될까... 그 엘프 사내, 말톤이라고 했던가? 저번에 그놈하고 주점을 갔을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비아투스가 뜸을 들였다. 여기서도 말톤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대체 녀석은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기울이자...
“..자네들이 그걸 가지고 있다더군. 바로 ‘그것’ 말일세.”
“그것... 말인가요...?”
“그래그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군! 어떤가? 좀 구미가 당기는가?”
“...죄송합니다만, 아직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바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허...”
그가 몸을 젖히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술 말일세! 술!! 그것도 아주 굉장한 술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언제까지 발뺌할 셈인가!!”
아.
재빨리 돌아보자 라디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그래!! 그 귀쟁이 놈이 엄청난 술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해대더니만 도통 정체가 뭔지 입을 열지 않더군. 뭐, 카베르나산 포도주라도 되는 겐가? 아니면 제네시 꼬냑?”
비아투스가 침을 튀기며 언성을 높였다. 그게 그리도 분했던 걸까.
뭐, 괜찮겠지.
슬며시 운을 뗐다.
“음.. 그게... 유적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뭐, 유석? 그런 원산지는 처음 들.... 자, 잠깐...! 자네 지금 유적이라고 했나..? 서, 설마 고, 고대 유적을 말하는 겐가..?!!”
“네, 맞습니다.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와인입니다.”
“허억... 헉..”
비아투스가 과호흡 증세를 보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A랭크 모험가라고 하더라도 유적 출토품에는 한 수 접어주는 걸까? 하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수요가 모자라겠지. 황금이나 보석과는 달리 술을 비롯한 식자재는 보존 과정에서 대부분 썩어버렸을 테니까.
라디도 이때다 싶어 첨언했다.
“네, 무화과와 대추야자를 발효시켜 만든 와인이에요. 보존 상태도 완벽하고, 꿀이 섞여서 달콤하고 농도도 짙어요.”
“무, 뭤이...!!”
비아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호, 혹시 맛이라도 한 번만 보게 해줄 수... 아니, 아니지 아니야 암... 내가, 내가 전부 사겠네!!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쳐주지! 웃돈까지 얹어줄 테니 나한테 팔지 않겠는가?!”
“저 그게... 그러면 저희도 좋긴 한데...”
“왜, 왜...! 뭐가 문제인가?! 호, 혹시 다른 누군가가 먼저 찜했다던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우리도 여기서 처분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와인이 유적에서 출토된 걸 증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입수 경로를 밝혀야 하지만, 눈앞의 드워프 영감에게 처분하면 큰 소란 없이도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귀찮은 경매 과정을 건너뛰는 건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지출되는 수수료도 아낄 수 있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문제는...
“그게... 말톤이랑 함께 구한 물건이라 녀석하고도 얘기를...”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전번에 그가 자네들이 팔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지 넘겨줘도 괜찮다고 했으니 말일세!! 어때 구미가 좀 당기는가? 내 비아투스, 이 뮬디르를 걸고 맹세하지! 자네들이 만족할 만한 값을 치르겠네!!!”
그가 발치에 놓인 해머를 탕탕 두드리며 외쳤다.
“......”
나와 라디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
일이 진행되는 건 일사천리였다.
“오오오오옷!!! 이게 바로 그...!!!”
비아투스가 술독을 보자마자 손가락을 깨물며 어쩔 줄을 몰랐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방방 날뛰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실소가 새어나온다. 말톤이 잘 보관해 줘서 다행이다.
“...괜찮을까요? 혹시라도 알아채면...”
“에이.. 괜찮을 거야.”
도중에 작은 꼼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이 정도는 들켜도 애교로 봐주겠지.
“이야 이거 정말 훌륭하구먼! 내 많은 술을 봐왔지만 이처럼 독특한 건 처음이야!! 내 길드 감정사를 불렀으니 잠깐만 기다리게!”
그가 술독을 열고 슬그머니 냄새를 맡더니 황홀한 듯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드워프가 술을 좋아한다는 건 편견일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술의 출처에 관해 자세히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외뿔 안경을 쓴 감정사가 천을 젖히며 나타났다.
문제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
“야, 영감! 재밌는 소식이 들려오던데.”
“아, 아델..! 자네가 왜 여기에..!!”
단발 레이어드컷을 한 다홍빛 머리칼의 여성이 뒤따라 천막 내부로 들어왔다. 아니스의 막사에서 봤던 인물.
비아투스가 황급히 술독을 끌어안았지만, 그녀는 다 알고 왔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뚜껑을 열어젖혔다.
“이야... 이거 장난 아니네... 이런 걸 혼자 마시려고 했어 영감? ...저기 그... 도란 맞지? 이거 어디서 구했어?”
“...유적에서 구한 겁니다.”
“유적...?”
“....네.”
비아투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A랭크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기에는 내 간덩이가 그리 크지 않다.
아델이라 불리었던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턱을 괴며 차분하게 읊조렸다.
“유적이라... 유적... 여기 2층에 고대 문명이 있었구나... 몰랐는걸...”
“네?”
“...응? 왜?”
“아, 아니... 어떻게 방금 대화만으로 그걸...”
“아... 그거?”
그녀가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너희는 2계층에서 실종됐잖아. 3층의 명물인 암시장에도 처음 와 본 눈치고 던전에 이런 귀한 물건을 가져왔을 리도 없으니 1층이나 2층에서 구했다는 뜻인데.. 1층은 완전히 탐색 종료 선언이 났으니 답은 하나밖에 없겠지?”
“.....”
‘...미친.’
담백한 어조로 말하고는 있지만,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거기까지 유추해내다니 경이로운 통찰력이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붉은 매 길드 막사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맹렬하게 품어왔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저... 아델...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봐도 될까요?”
“어, 어 응...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뭔데?”
아델은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몸을 기울이며 경청해주었다.
나는 소심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
“그... 붉은 매 길드 사람들은 어째서 제 머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요..? 지금껏 제가 만났던 사람들은... 절 보면 악마의 혈통이라고 손짓하곤 했는데..”
“음.. 그건 말이지...”
그녀는 내 흑발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듯 눈매를 누그러뜨리더니 눈높이를 맞추고 천천히 속삭였다.
“...우리가 외견보다 더 오래 살아온 건 알고 있지?”
“....네.”
“살아가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과 만날 거야. 그중엔 널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소중한 인연도 있겠지.. 그렇게 미워하고 좋아하고, 또 용서하다 보면 깨닫게 돼. 겉모습은 단순히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까. ...어때, 조금은 위안이 됐어?”
“....감사합니다.”
푹 고개를 숙여 울컥 스며나오는 감정을 숨기자 비아투스가 말을 받아쳤다.
“그래 꼬마야!! 네 정체가 인간이든 악마든 이 비아투스 앞에선 한주먹거리지!! 맛 좋은 술만 가져다주면 그게 좋은 놈 아니겠나!! 크하하!!!”
“...어휴 저 주책..”
아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등을 펴며 내게 물었다.
“근데... 도란 나도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왜 입단 권유를 거절한 거야..? 나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길드에 들어가는 건 너무 이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 조금 아쉽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마음에 뚫린 천공으로부터 이전에 없던 조각 하나가 따스하게 차오르는 걸 느끼던 도중, 마침내 감정 결과가 나왔다.
“오 오 그래, 어떤가!! 분명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술이 맞겠지?!!! 얼마면 되겠는가?!!”
“비아투스 님...”
감정사가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