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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27화 (127/375)

〈 127화 〉 암시장 #7

* * *

[127] 암시장 #7

“아니 이, 이게 말이 됩니까...?!”

“크흐흐...”

“웃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뭐 어떤가, 자네가 주는 것도 아닌데.”

“아, 아무리 그, 그래도 이건...”

턱이 벌벌 떨렸다.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구슬 같은 땀방울을 훔치며 재차 확인해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천막 내부, 휘황한 마석등의 불빛이 드리운 적색 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가득들어 있었다.

미약한 현기증이 일어 머리를 어지렵혔다.

“축하해 도란, 성공했네?”

“...축하해.”

옆에선 아델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쳐주었다. 트라함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쳐다봐온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리자 입을 벌린 채로 바짝 얼어붙은 라디가 보였다.

“저기 트라함... 호, 혹시 물 좀 줄 수 있어?”

“자.”

“..고마워.”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고 메마른 입술을 축이자...

­푸흡!!!

“콜록! 콜록..! 뭐, 뭐야 이거 물이 아니잖아...?!”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자주색 액체가 묻어나왔다.

트라함이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읊조렸다.

“...비아투스 영감 숙소에는 술밖에 없어. 물을 마시고 싶으면 냇가까지 가야 해.”

“뭐, 그런...!”

“아, 잠깐만. 내 거 줄게!”

아델이 허리춤을 뒤지더니 은제 수통을 꺼내 건넸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표면에는 귀여운 동물들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거 정말로 받아도 되는 건가...?

“감사합니다.. 아델 님.”

“응!”

조심스레 수통 마개를 열고 목을 축이자 상큼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붉은 과실이 연상되는 맛. 과연 센스도 남다르다. 과일 청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향을 낸 거지?

“고마워요, 너무 목이 타서... 근데 이건 무슨 맛이에요?”

“응..? 무슨 맛?”

“네, 희미하게 과일 향이 나는 것 같은데..”

“....?”

아델이 수통을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입구 주변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뭔가 깨달았는지 희미한 신음을 내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지그시 깨문 그녀의 입술에는 붉은 발색이 맴돌았다.

과일 향의 정체를 깨닫자 괜스레 뜨거워지는 뺨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그, 그... 비아투스 어르신!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감정가는 분명 4골드...”

“그래, 내 손주들 같아서 용돈이라도 주는 게야!! 마음만 같아서는 더 얹어주고 싶지만 마누라가 알면 큰일이거든! 뭐 그래봤자 푼돈이지만 말야!! 크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탕탕 두드렸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지만 워낙 얼떨떨해서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주머니 안에 담긴 금화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영롱한 광채를 내뿜는 동전 13개를.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사실 4골드도 많이 쳐준 감이 없잖아 있다. 아무리 고대 유적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마시면 사라지는 기호품에 그 정도 금액이라면 어지간한 애주가가 아닌 이상 선뜻 지불하기 힘들 테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이 술을 판매하려면 대도시까지 가야 하는 건 물론, 부차 비용도 많이 들었을 터. 이 드워프가 그걸 모를 리도 없는 노릇이다. 한참 가격을 내려쳐도 모자랄 판에 장장 9골드라는 거액까지 얹어주다니 몸 둘 바가 없다.

연거푸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내 자네들한테 걸고 있는 기대가 크네. 만약 다음번에도 좋은 술을 발견한다면...”

“네! 무조건 가장 먼저 달려오겠습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그래 이제 다들 들어들 가봐. 곧 있으면 아실리 꼬마가 냄새를 맡고 찾아올 테니 그 전에 얼른 숨겨야 하거든!!”

그가 큼지막한 손바닥을 내저었다. 떨떠름한 심경으로 떠밀리듯 텐트를 나서자 짤랑이는 금화 자루와 뻣뻣하게 굳어버린 우리만 남았다.

한순간에 벼락부자가 된 기분이 어떻냐면­

“....실감이 안 나네.”

아무런 감흥도 없다. 아직은.

인간이 너무 큰 충격에 빠지면 백치가 되어버린다고 했던가. 지금 나와 라디가 딱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부를 얻었음에도 기쁨의 탄성 하나 내지를 여유조차 없었다.

“13골드면... 말톤 몫을 떼어주고도 8골드가 남네...”

내가 죽기 살기로 코볼트 킹을 잡고 얻은 돈이 11실링이었으니 그 백배가 넘는 돈을 단 한순간에 번 셈이다.

...진지하게 다시 유적에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간 가난에 굶주렸던 나날과 차가운 골목길에서 노숙하던 밤을 떠올리며 전율하던 중,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도란...!!”

“아, 아델님..?”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아델이 살짝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서 있었다.

“정말.. 몇 번이나 불렀는데... 자, 받아. 이건 내가 너희에게 주는 선물이야.”

“이건... 이게 뭐에요? 양피지...?”

“이곳 3층 약도야. 이것만 있으면 여기서 돌아다니는 데는 문제 없을 거야. 유용한 점포도 표시해놨으니까 참고하고.”

그녀가 새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아들고 펼치니 오밀조밀하게 묘사된 지형과 각주가 눈에 들어왔다. 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귀염성이 묻어나오는 글씨체.

“...설마 직접 그린 거예요?”

“어, 어 그런데 왜..?”

“아니 그냥... 이런 걸 저희가 받아도 되나 싶어서요... 다른 것도 아니라 아델 님이 직접 수기로 작성하신 지도를...”

“...그냥 취미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난 이미 외워서 필요 없기도 하고. 이것저것 새로 사야 할 게 많지? 그리고... 라디야 잠깐 이리로 와볼래?”

“저, 저요..?”

“그래. ..도란 넌 잠깐 저기로 가 있고. 트라함 너도 마찬가지야.”

“.....”

“그런 게 있어.”

“...네.”

하는 수 없이 뒤따라 나온 트라함과 함께 멀찍이 떨어졌다. 녀석과 함께 잔디 위를 거닐며 힐끗 곁눈질하자, 잔뜩 긴장한 채 경청하는 라디와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아델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비밀스럽게 나누는지...

업무가 있다며 떠나가는 트라함을 배웅해 준 뒤, 나무 둥치에 걸터앉아 금화 표면에 그려진 국왕 할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머잖아 발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네..? 네, 네...!”

“뭐야,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해.”

“...도란님은 몰라도 돼요. 트라함 씨는 가셨나요?”

라디가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수상한데.

“...그래, 할 일이 있다더라. 저녁은 우리끼리 먹으라는데, 혹시 배고파?”

“음... 아까 먹어서 딱히 배고프진 않는데...”

“...그래? 잘됐네. 그럼 따라와.”

가느다란 팔뚝을 덥석 잡아끌자 녀석이 살짝 움츠러들며 물었다.

“어, 어디 가시게요..? 아직 해가 중천인데...”

“....”

나는 로브를 뒤집어쓰며 대답했다.

“기왕 암시장에 온 거 조금은 즐겨야 하지 않겠어?”

*

“우와...! 도란님! 이거 좀 봐요!!”

“오... 몬스터 내장인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방울 꼬리 살모사의 독샘을 건조한 거예요!!”

“...그걸 어디에다 써?”

“은근 자주 쓰여요! 최근 원기회복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거든요. 너무 많이 복용하면 내장이 녹아내리지만요. 도란님도 한번 어...”

“절대 싫어.”

“정말요? 적당량만 복용하면 아무 문제 없는...”

“싫어. 꿈도 꾸지 마.”

라디와 함께 암시장을 거닐었다.

오후의 열기가 드리운 거리는 흥정에 열을 올리는 모험가와 목청껏 소리치며 손님을 끌어모으는 상인으로 북적거렸다.

정해진 규격 없이 들쭉날쭉한 노점의 가판대에는 던전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희귀 마물의 소재가 가득했고, 길거리마다 독특한 선전 문구가 적힌 팻말과 소규모 공연이 벌어져 지루할 새가 없었다.

라디가 멱살을 틀어쥐고 주먹다툼하는 모험가 무리를 흘겨보며 말했다.

“...돈 잃어버리지 않게 간수 잘하세요. 잊지 않고 잘 분산해두었죠?”

“당연하지, 뭣하면 네가 가지고 있을래?”

“...아뇨. 제가 그런 거액을 들고 있으면 뻣뻣하게 굳어서 걷지도 못할 것 같아요.”

“그래?”

피식 웃으며 라디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비아투스 영감에게 받은 금화는 몸 이곳저곳에 분산해두었다. 혹여나 소매치기를 만나 돈주머니를 통째로 강탈당한다면 그것만큼 낭패가 없으니까. 단순히 시장을 거니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부츠 속에서 짤랑이는 금화의 감촉을 느끼며 발치의 쓰레기를 넘어서자 라디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읊조렸다.

“그래도... 정말 잘됐어요. 덕분에 주택을 마련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으니까요. 원래는 제가 저축해둔 돈으로 전부 부담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나도 지금까지 저금해둔 돈으로...”

“도란님은 원래 알거지셨잖아요.”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난 애당초 무일푼 신세였지. 저축해둔 돈이 있을 리 없다. 코볼트 킹을 잡고 번 돈은 장비를 맞추느라 거의 다 써버렸고.

“그럼... 8골드 정도면 어느 정도 집을 살 수 있어? 세금이랑 가구를 들여놓는 것까지 고려하면 어느 정도 여윳돈을 남겨놔야 할 텐데...”

“음... 제가 있던 빌헴 마을에서 괜찮은 주택 한 채가 3골드가량 했던 걸 고려하면... 베라스틴의 물가가 훨씬 더 비싸긴 하지만 아예 못 살 정도는 아닐 거예요. 말톤님이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요?”

“말톤이라... 그렇네.”

녀석은 베라스틴에서 살아온 지도 꽤 오래됐으니까. 숨은 맛집이나 가게도 속속들이 꿰고 있을 정도고. 일전에 코볼트 단검을 주문 제작했던 대장간도 말톤의 소개로 간 곳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막상 녀석이 어디 사는지도 몰랐구나. 같이 의뢰를 수행할 땐 항상 모험가 길드 앞에서 약속을 잡았으니까...

“무슨 생각 하세요?”

“아니, 말톤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때 봤던 엘프 여자랑 혹시 동향 사람 아니야? 같은 부족 출신이라던가.. 꽤 스스럼없어 보이던데.”

“음... 아마 맞을 거예요. 이전에 제게 설명할 때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라고 했으니...”

“그러면 그 여자가 말톤이 엘프 마을에서 뛰쳐나온 이유도 알지 않을까? 옛날부터 궁금했거든.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엘프가 흔한 건 아니잖아.”

“음... 그렇지만... 그분은 어쩐지 말을 걸기가 좀 무서워서...”

“하긴...”

복날 개처럼 얻어맞던 말톤을 떠올리며 침음하자니 시야 구석으로 생필품을 취급하는 점포가 보였다.

라디를 데리고 허리를 굽혀 차양막 안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뭐, 나중에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자. 캐묻는 것 같아도 미안하니까. 일단 필요한 것부터 사려고 하는데... 우리 칫솔 없지?”

“네, 트라함 씨가 가져다준 게 있긴 한데 장비 손질용도 하나 필요해요. 기왕이면 그쪽을 재활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매대를 들여다보았다. 목제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받침대에는 온갖 생활 집기가 종류별로 늘어서 있다.

뻣뻣한 짐승 털을 아교로 접착시켜 만든 솔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긴 튜닉을 입은 상인이 두툼한 손바닥을 맞비비며 외쳤다.

“어서 옵쇼 모험가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네, 칫솔로 사용할 솔을 좀 보고 있는데요.”

“아이고! 잘 찾아오셨습니다!! 여기 종류별로 있으니 한 번 둘러보시지요! 싸고 튼튼한 놈부터 고급지고 때깔 좋은 놈까지 다 있습죠!!”

상인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나는 묘하게 정적인 눈꼬리를 힐끔 응시하며 물었다.

“...가장 많이 팔리는 건 뭐예요?”

“모험가님들은 이놈을 제일 많이 사갑니다! 저렴하지만, 아주 가성비가 좋은 물건입죠!!”

“....”

남자가 두 손으로 건넨 칫솔을 받아들었다. 다듬지도 않은 울퉁불퉁한 나뭇가지에 멧돼지 털을 접착한 물건. 스컹크처럼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칫솔모도 듬성듬성하다.

“이거 말고 더 좋은 건 없어요?”

“오오!! 역시 안목이 남다르십니다! 더 좋은 품질을 원하신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그가 다른 상품을 권해왔다.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된 물건이 나왔다. 얇은 대나무에 이름 모를 몬스터의 털을 꼽아 만든 칫솔. 여전히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그럭저럭 쓸 만은 해 보인다.

나는 라디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뒤, 다시 상인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내뱉었다.

“아저씨, 그냥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보여주세요.”

“아이고...! 이거 제가 귀한 분을 몰라뵙군요!! 죄송합니다! 곧바로 대령하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찰나, 남자가 호구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며 매대 밑에서 나무곽을 꺼내들었다. 이어서 조심스레 뚜껑을 들어 올리자 우윳빛 광택이 살짝 엿보였...

­탁!

상인이 도로 뚜껑을 덮으며 속삭였다.

“크흠... 흠.. 이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스노우 타이거란 마물의 소재로 만든 제품입니다! 저 멀리 추운 북방 대륙에서만 서식한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마물입죠! 이 몬스터가 포효하면 천지가 진동한다고들 합니다...! 아우 무서워라! 원래는 아무한테나 안 파는 물건이지만, 모험가님의 인품을 높게 사 특별히 오십.. 아, 아니 팔십 실링에 팔겠습니다...!”

“.....”

오호라...

“...잠시 봐도 될까요?”

“네, 네...! 물론입죠!! 대신 만지는 건 안 되고 꼭 눈으로만 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귀한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그가 광대를 들썩거리며 곽을 내밀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는 건가?

그가 건넨 케이스의 뚜껑을 제치고 내용물을 엿보자...

“도란님 이거...”

“...그래.”

너 딱 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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