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암시장 #8
* * *
[128] 암시장 #8
“...정말로 이게 스노우 타이거의 소재로 만든 거라고?”
“네! 물론입니다! 여기 희끗희끗한 털 보이시죠? 칫솔모도 다 해당 마물의 신체를 쓴 겁니다. 이 경우에는 꼬리털이 들어갔죠!”
“...그냥 개털을 뽑아다가 표백한 거 아냐?”
“그럴 리가요! 여기 품질보증서도 있습니다! 무한단물 협회라고 저희 상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상단이 발급해준 증명 서류입니다!”
“...도란님, 그냥 다른 곳에서 사는 게...”
“잠깐만.”
이건 기회다.
입매를 들어올리며 가소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상인이 반 발자국 물러났다.
“왜, 왜 그런 눈빛으로 보십니까?”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가짜잖아. 스노우 타이거는커녕 아예 호랑이 뼈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제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겁니까?”
남자가 미간을 움찔하며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참으로 알기 쉬운 사내. 상인으로선 실격이지만.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그가 돌연 태도를 바꿔 본색을 드러냈다.
“아니, 안 살 거면 썩 꺼지쇼! 돈이 없으니 어떻게든 깎아보겠다고 트집 잡으려는 거 아냐!! 이런 고얀 심보를 봤나...! 이게 가짜라는 증거 있어?!”
“그냥 딱 보면 알잖아. 뼈 색깔도 똥밭에 한 번 구른 것마냥 누리끼리하고 칫솔모도 그쪽 정수리처럼 듬성듬성한데. 3실링이면 몰라도 80실링? 염치가 있어야지.”
“뭐, 뭐?! 너 이 자식 지금 뭐라 했어?!! 지금은 이래도 젊었을 땐...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당신 험한 꼴 좀 보고 싶어? 모험가라 배운 게 없어서 힘만 믿고 설치는 모양인데... 나 이래 봬도 붉은 매 길드하고도 아는 사이야!!”
“오... 진짜?”
“암! 그, 그래!! 너도 이곳에 온 이상 붉은 매 길드에 대해선 들어봤겠지!! 나는 그중에서도 무려 아니스 님과 독대하는 사이라고!! 게다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델 님과 니아 님하고도 한 다리...!”
“오케이 거기까지.”
콰직!!!!!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매대를 짓밟자 산산조각 난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주변에서 몰려드는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재차 진열대를 짓뭉갰다.
콰지직!!
“이, 이게 무, 무슨...!!”
상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길길이 날뛰었다.
“이게 무슨 행패야!! 내 싹수가 좋은 모험간 줄 알고 호의를 베풀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아?! 경비병! 경비병은 어디...!”
“자.”
“네놈 따위 한 주먹... 이.. 이, 이건...?!”
내가 품에서 한 물체를 꺼내자 남자의 낯빛이 오트밀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붉은 매 길드의 엠블럼이 새겨진 은판. 아니스가 내게 주었던 물건이다.
“...어지간히도 배가 부른가 봐? 대놓고 사기를 치는 걸 보니. 게다가 뭐? 아니스랑 독대하는 사이? 참나... 진짜 뒈지고 싶어 환장했네.”
“으윽?! 죄, 죄송합니다!!! 로브를 입고 계셔서 설마 붉은 매 길드의 일원이실 줄은... 부, 부디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돈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내가 왜?”
“제, 제발..! 집에 절 기다리는 딸아이가 있습니다...!”
“그런 놈이 이따위로 장사를 해? 철면피에도 짝이 있지. 이번 일은 아니스 님에게 직접 보고할 테니 그렇게 알아.”
“으흑...! 흑... 제발!”
상인이 물에 젖은 볏짚처럼 무너져내리더니 내 발목을 부여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귀족, 그것도 공작가의 친분을 사칭한 죄는 단순 벌금 정도로 그치지 않을 테니까. 과한 재물을 탐한 자의 말로다.
요란한 통곡 소리에 구경군들이 몰려들자 라디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글쎄... 널 용서해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네, 넷...?! 대, 대체...!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신발이고 뭐고 뭐든 핥을 테니 제발...!!”
“됐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물건으로 사기를 치려 했으니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야겠지?”
“따흐흐흑...”
*
“크흐흐... 어때 꼬맹아, 제법 괜찮지 않았어?”
양손 가득한 짐 꾸러미를 앞뒤로 흔들며 입꼬리를 히죽거렸다.
악덕 상인을 공갈한 덕에 칫솔은 물론이고 다른 물품까지 공짜로 넘겨받았다.
어디까지나 양도다 양도. 강탈이 아니라.
라디가 도끼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쳐 정말... 아니스 님에게 길드 패를 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런 식으로 써먹을 생각을 하다니... 그게 무슨 물건인지는 알고 계시죠?”
“뭐 어때, 그분도 이럴 때 쓰라고 준 걸 텐데. 원래는 그쪽에서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해준 거니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덕분에 우린 돈도 굳었고 상인도 하나 배웠으니 모두가 이득이지. 어때?”
“하여간...”
길드 패를 손끝으로 튕기며 음흉하게 미소짓자 라디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신음했다.
“분명... 예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던전 1층에서였나? 늪지대를 건너면서 사칭...”
“누군가 했더니 역시 도란님이셨군요...!”
“...!!!”
별안간 뒤쪽에서 호방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아, 당신은...?!”
제법 살집 있는 중년의 사내. 푹신한 초록 모자 아래로는 제법 넉넉한 기장의 케이프를 걸쳤고, 호주머니의 포켓에는 회중시계의 금줄 체인이 늘어져 있다.
전형적인 대상인의 상.
굉장히 낯이 익는데 어디서 봤더라...
황급히 기억을 뒤집고 있자니 라디가 슬쩍 내 표정을 살피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아무르 님. 여기서 또 뵙네요.”
“오...! 라디 님도 반갑습니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두 분 다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무르...?
‘아...!’
기억났다. 던전까지 오면서 호위했던 오필리아 상단의 상인 중 한 명. 1계층에서 습지를 건널 때 무상으로 뗏목을 대여해주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암시장에 같은 상단이 상주하고 있다고 했던가.
재빨리 악수를 건네며 살갑게 인사했다.
“아무르 씨도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또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그런데 뗏목 장사는 어쩌시고 이곳에...?”
“아, 그 사업은 이제 그만뒀습니다. 이미 벌 만큼 충분히 벌었기도 하고, 얼마 전에 발탄 길드에서 다리를 건설했거든요! 덕분에 이제 소정의 통행료만 내면 손쉽게 왕복할 수 있답니다. 소식이 느린 걸 보니 도란 님 일행은 계속 임무에 몰두하셨던 모양이로군요?”
“아 네 뭐... 하하..”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지.
대충 웃으며 둘러대자 그가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야... 이거 다시 뵙게 되어 정말로 반갑습니다. 옷차림이 바뀌셔서 긴가민가했는데 목소리를 듣고 단박에 확신했죠! 라디 님의 미모도 여전하시군요. 한데 말톤 님은 어디에...?”
“아... 걔는..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 따로 행동하는 중입니다. 신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홋! 그거참 다행입니다! 하기야... 그렇게 활을 잘 쏘시는 어디 가실 리 없겠지요. 말톤님이 단신으로 도적단을 싹 쓸어버리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물론 도란님도 무지막지하셨지만요!!”
“활...?”
라디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말톤이 활 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구나.
나는 살며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럼 아무르 씨도 이곳에 와 계신 걸 보니... 새로운 사업이라도 하고 있나요?”
“하하 물론입죠! 진정한 상인은 지옥 문턱에서도 장사를 하는 법이니까요. 어디 제 점포에 구경이라도 하러 오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뭐든 싸게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또...”
그가 말하다 말고 목소리를 낮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붉은 매 길드의 신규 일원을 푸대접해선 안 되겠지요!!”
아.
그걸 또 보고 있었냐.
“크흠흠... 아,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비밀입니다...! 제가 붉은 매 길드에 입단하게 된 건 아직 대외로 공표되지 않았으니까요...!”
“네, 넵! 물론입죠!! 절대로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도란님이십니다!!! 왕실 특무부대 업무로도 모자라서 붉은 매 길드까지 잠입하시다니...!!”
“.....”
라디가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발등 위에 무게를 싣는 그녀의 부츠가 조금 통렬했다.
*
“자, 바로 저곳입니다!!”
“오... 생각보다 훨씬 큰데?”
“.....”
노점이 몰려있는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 제법 커다란 천막이 지어져 있었다. 편안한 인상을 주는 녹색 외피의 상단에는 오필리아 상단을 상징하는 마크가 떡하니 박혀있다.
잘 정돈된 잔디와 야생초를 바라보며 내심 감탄하던 중, 라디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그런데 도란님, 아무르 씨는 왜 이렇게 인적이 드문 장소에 점포를 세웠을까요..?”
“...그러네?”
만일 거처를 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왕래가 뜸한 장소에 가게를 차려서 얻을 이득이 전무하다. 관록 있는 상인인 그가 이렇게 기본적인 걸 실수할 리 없는데...
의아하게 아무르를 쳐다보며 걷고 있자니 점포 입구에서 한 쌍의 커플이 튀어나왔다. 로브를 푹 눌러쓴 수상한 남녀는 가게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잰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법 마약이라도 파는 건가...?
“자, 들어오시죠!!”
우리는 곧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이건...!”
“...이게 뭔데요?”
점포 내부, 어두컴컴한 진열장에 가득 늘어선 상품을 보며 경악하자 라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물컹거리는 주머니를 순진무구하게 매만지는 라디에게 아무르가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이것들은 전부 성인용품입니다. 혼자서 욕구를 해소하거나 남녀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죠.”
“네? 성인.. 용품...?”
라디가 멍하니 고개를 떨궈 손안에 든 물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용도를 짐작했는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재빨리 낚아채자 라디가 손가락을 오므리고 소리쳤다.
“모양이...! 질감이!!!”
“...처음 봐?”
“다, 다 다.. 당연하죠!! 그러는 도란님은..! 도, 도란님은 저런 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뭐, 해봤자 그냥 장난감이잖아.”
여러 영상 매체로 접해 본 적이 있기도 하고.
“호오... 이곳에 처음 방문한 고객들은 놀라는 반응이 대부분인데.. 역시 대범하십니다 도란님!”
아무르가 장부를 살피다 말고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에게 라디가 내동댕이친 물건을 돌려주며 물었다.
“아니, 근데 어쩌다가 이 장사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흔한 상품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던전 한복판에서...”
“흐흐... 무릇 사람이라면 욕구가 쌓이기 마련이죠. 이는 던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란님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지 않으십니까? 한낱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 파티원을 덮쳤다던가...”
“...그건 그렇죠.”
의외로 제법 번듯한 사유에 내심 놀라던 중, 그가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되지 않습니까!! 이거 원, 생각보다도 훨씬 짭짭합니다! 지금은 한적하지만 밤만 되면 불나방처럼 손님들이 득시글하게 몰려든다고요..! 나름 이 암시장의 숨은 명물입니다!!”
“아... 예, 예..”
그럼 그렇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뼛속까지 장사치인 이 사람이 돈 벌 기회를 마다할 리가.
그래도 외설적인 물건만 판매하는 건 아닌지 나름 번듯한 제품도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중소규모 상단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장사라 조악하기 짝이 없던 암시장의 상품과는 달리 제법 품질이 그럴싸하기까지 하다.
“이건... 스모키 모스 분말이네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기억하시죠? 크누트 길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도란님 면전에 뿌렸던 스프레이의 원료에요. 한 번은 실수로 말톤님을 맞추기도 했었고요...”
“그 잘못 맞으면 실명한다는 그거? 다시 생각해봐도 끔찍하네.... 어? 허브 종류도 팔고 있잖아? 7계층 숲속에서 차 끓여 마실 때 생각난다. 그때는 울시도 있었는데...”
“그러네요...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이젠 다 추억이네요. ....도란님, 저기 나가의 심장도 있어요.”
“원물이네... 섬뜩하게도 생겼다.”
라디가 점포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소나무 선반에선 송진 냄새가 솔솔 풍겨왔고,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자아내는 음영이 아늑한 정취를 만들어 마치 골동품 상점에 온 것만 같다.
라디는 진열된 물건을 들여다보며 주저리 말을 늘여놓았지만...
“...신경쓰여?”
“네, 네에? 뭐, 뭐가요..?!!”
“시야 구석으로 힐끔거리는 거 다 알아. 지금까지 얼마나 같이 지내왔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냐.”
“아, 아니거든요?!”
“진짜 아냐?”
“.....”
정곡을 찔렸는지 라디의 귀가 부산스럽게 쫑긋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완전히 처음 접해본 물건이니 궁금할 만도 하겠지. 워낙 지식욕이 왕성한 녀석이기도 하고.
“...난 관심 있는데, 같이 안 볼래?”
“으...”
녀석은 내 배려를 눈치챘는지 푹 고개를 내리깔았지만,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라디의 손을 잡아끌고 성인용품이 진열된 별개의 장소로 이동했다.
“괜찮아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
“괜찮대도.”
“....”
라디는 내 손을 꽉 움켜쥐고 한참을 망설였지만, 한 번 부끄러움을 떨쳐내자 곧 적응하고는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이 돌기는 왜 있는 거예요?”
“그건... 더 큰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 일걸?”
“이건 왜 두 갈래에요?”
“음... 글세다.. 그건 나도 잘...”
“촉감이 이상해요. 굉장히 인위적인 느낌인데...”
“.....”
라디가 원통형 물체를 집어들었다.
녀석은 그 물건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내 시선을 의식하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거가 더 기분 좋아요.”
뭐가.
“제가. 더. 기분 좋게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데서 경쟁하지 마.”
“흐음...”
녀석은 진열품을 유심히 둘러보다 문뜩 뭔가를 깨달았는지 구석에 서서 관망하던 아무르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르 님, 근데 여기 있는 것들은 전부 왜 이렇게 작아요?”
“네...? 저희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사이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만... 라디 님이 지금 보고 계신 상품은 저희 점포에서도 제일 큰 물건입니다.”
“흠...”
라디는 턱을 괴고 손안에 든 막대기형 물건을 요리조리 조명에 비춰가며 확인했다.
이내 내 쪽을 힐끗힐끗 곁눈질하더니 폭탄 선언을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도란님 게 더 큰데...”
““.....””
아무르가 질겁하며 반걸음 물러났다.
“그... 도, 도란 님은 대체 얼마나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계시길레...”
“....”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얼버무리자니 라디가 재차 질문했다.
“그런데... 여기는 여성용 제품보단 남성용 제품이 더 많네요?”
“아, 그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수요 때문입니다.”
“수요?”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모험가란 직업 특성상 남성분이 더 많으니까요... 대신 여성 고객을 위해선 이런 제품을 구비 중입니다.”
“이건...”
아무르가 옆 선반에서 작은 환약을 꺼내 보여주었다.
“정력제입니다. 보통 애인이 있으신 여성 모험가들이 많이들 사가시죠. 이 밖에도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진통제나.. 피임약 같은...”
“....”
“꼬맹아..?”
“네, 왜요?”
“....아니야.”
방금 표정이 좀 묘했는데...
“...뭐, 대충 다 둘러봤으면 이제 슬슬 필요한 물건 사고 가자. 나는 요리에 쓸 향신료를 좀 구하고 싶은데...”
“네, 좋은 생각이에요. 식후에 마실 찻잎도 좀 구매하는 건 어때요?”
“그거 좋다. 아무르 씨, 혹시 추천하시는 제품이...”
“이쪽으로 오시죠! 원가나 다름없는 금액에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가 호쾌하게 외치며 정중하게 손짓했다. 아무리 과거에 인연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꾸준히 호의를 베풀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고 묵직해진 짐꾸러미를 움켜쥔 채 점포를 빠져나와 막 암시장 거리에 접어들 무렵
“아...! 어떡하지? 가게에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요! 빨리 다녀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디가 재빨리 지나온 길을 되짚어 달려나가더니 잠시 후 모습을 드러냈다.
“...뭐 샀어?”
“아뇨, 아무르 씨 자리에 없던데요?”
달그레 뺨을 물들이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