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29화 (129/375)

〈 129화 〉 암시장 #9

* * *

[129] 암시장 #9

땅거미가 진 하늘.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오솔길을 걷자 본 적 있는 공터가 나왔다. 낯익은 천막을 눈에 담자 비로소 집에 온 듯한 편안함이 인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야시장은 색다른 정취가 풍겨 하마터면 한참을 더 헤맸을지도 모른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풀밭을 가로질러 가림천을 젖혔다.

“꼬맹아, 안에 있어?”

­....

조명 하나 없는 숙소에는 냉랭한 한기만이 맴돌 뿐, 그리운 체취는 묘연했다.

“...아직 안 왔나 보네..”

살짝 적적한 심경으로 양손에 가득한 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보따리에서 호롱을 꺼내 때죽나무 기름을 채우고 불을 붙이자 천막 안이 일시에 화해졌다.

어렴풋한 불빛이 어둠을 쫓아내자 텐트 구석에 숨죽였던 벌레들이 허겁지겁 달아난다.

“미리 저녁 준비라도 하고 있을까...”

따로 장 볼 게 있다더니 라디는 조금 늦는 모양이다.

나는 냇가에서 간단히 씻은 뒤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침 노점이 막 문을 닫기 전에 양질의 양고기를 얻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허브와 과일즙으로 잡내를 제거하고 모닥불을 피우자 은은한 별구름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밤하늘 아래 모닥불을 쐬고 있자니 잡다한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얼마 전만 해도 약초 채집이나 하수도 청소 의뢰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지금은 일류 모험가들에게도 인정받을 정도로 성장했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노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사랑하는 여자와 동거를 앞두고 있다.

­쩔그덕.

품속에서 금화를 꺼내들었다. 동전 표면에 새겨진 비스마르크 성채를 손가락으로 매만지자 기분이 오묘했다. 고작 이 작은 물건이 뭐라고 그간 쉼 없이 달려왔단 말인가. 또 그에 구원받을 내 신세는 또 어떻고.

“경제적 자유라... 그러고 보니 말톤에게 술 사기로 약속했던 것도 잊고 있었네..”

던전에 온 것도, 돈을 벌게 된 것도, 심지어 라디와 만나게 된 계기도 다 말톤 덕분이다. 지금쯤 녀석은 뭘 하고 있을까?

이곳에서 나가면 기필코 최고의 술을 선사하기로 약속하며 망연하게 한숨을 내쉬자 오솔길 너머에서 나뭇가지 밟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다녀왔어요 도란님. 저녁 준비하고 계셨어요?”

“그래, 조금 늦었네?”

“네, 이것저것 사 오느라고요. 기왕이면 같이 준비하시지... 제가 좀 거들어 드렸을 텐데..”

“됐어 뭐 힘든 일이라고. 어서 와서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자 라디가 찰싹 달라붙어 살갑게 미소지었다. 시야 언저리로 내려다본 그녀의 두 손에는 아까 보지 못했던 천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라디가 보따리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아, 별거 아녜요. 그냥 갈아입을 옷 몇 벌하고 술을 좀 사 왔어요.”

“술?”

“네, 이따가 한잔해야죠. 오늘 같은 날은 마셔도 되지 않겠어요?”

“그야 물론이지.”

기념할 만한 날이다.

하이랭커와 안면을 텄고, 술독을 처분해 어마어마한 거액을 벌었다. 무엇보다도 라디와 함께 7계층에서 생환한 후 온전하게 맞이하는 첫날이다.

손을 씻기 위해 냇가로 향하는 그녀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꼬치에 꽂은 살코기와 야채를 모닥불 위에 얹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조금 뒤, 내 옆자리로 돌아온 라디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우와... 이건 무슨 고기에요? 향이 엄청 좋은데..”

“양고기라나 봐. 아까 산 허브랑 향신료로 미리 밑간 좀 해뒀지. 어때, 괜찮지?”

“네, 엄청 기대돼요!”

그녀가 눈동자를 빛내며 해맑게 미소지었다. 밤이 무르익어 갈수록 꼬치구이 또한 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갔고, 지글거리는 기름이 타닥 튈 때면 모닥불에서 노란 불똥이 피어올라 야경을 수놓았다.

허기진 위장을 틀어쥐며 화염을 응시하고 있자니 라디가 손깍지를 어루만지며 물어왔다.

“...무슨 생각 해요?”

“그냥... 감회가 새로워서.”

“그러네요...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죠..”

그녀가 살며시 무릎을 끌어안으며 별을 올려다봤다. 그 투명한 눈망울에 가을 별하늘이 담기자 애틋한 분위기가 공터를 메웠다.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홀로 고생해 왔으니 복잡한 심경일 테지.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읊조렸다.

“우리 던전 나가면 조금 쉬자. 집도 알아보고.. 가구도 고르고... 그래, 네가 말했던 왕도도 한 번 가보자.”

“좋아요... 저 근데 한 가지 말씀드릴 게...”

라디가 머뭇거리며 뒷말을 주저하자 상냥하게 귀를 쓰다듬어주었다.

녀석은 살짝 의기소침하게 내 눈동자를 응시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베라스틴에 정착하기 전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요.”

“다녀올 장소?”

“네... 이전에 살던 마을에 놔두고 온 짐이 좀 있거든요.. 이사하기 전에 수도원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인사를 드리고 싶고요.”

“뭐야.. 그런 거였여?”

난 또 뭐라고...

라디의 허리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빼고 내게 몸을 맡겼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고기를 뒤집으며 물었다.

“그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달 정도? ...설마 두 달?”

“아, 아뇨 그렇게까진... 한 보름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그냥 인사만 하고 올 테니 도란님은 먼저 베라스틴에 가 계세요.”

“왜 같이 안 가고..?”

“말했잖아요. 인사만 드리고 바로 나올 거라고. 같이 가면 좋겠지만... 도란님은 슬슬 길드에 얼굴을 비춰야 하지 않아요? 너무 오랫동안 의뢰를 받지 않으면 모험가 자격이 박탈될 수도...”

“아...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길드의 페널티 시스템. 모험가로 등록만 해두고 혜택만 뽑아 누리는 사람을 막기 위해 일정 기간 퀘스트를 수행하지 않으면 자격이 박탈된다.

라디는 E급인 만큼 기한에 여유가 있겠지만, 나는 F랭크라 더욱 자주 길드에 얼굴을 내비쳐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베라스틴에 돌아가면 아카이아 길드부터 들려야겠네..”

“네, 다시 등록하려면 상당히 번거로울 테니까요... 도란님은 먼저 가서 좋은 주택 매물이 있나 찾아보고 계세요. 저도 곧바로 따라갈게요.”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이제 슬슬...”

“네, 잠시만요. 제가 다녀올게요!”

라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총총거리며 냇가로 향했다. 이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냇물에 담가두었던 와인병이 들려 있었다. 무려 유리로 만들어진 고급 제품.

“오... 힘 좀 썼는데? 너 원래는 이런 데 돈 잘 안 쓰잖아.”

“...저는 불필요한 지출을 싫어하는 거지, 써야 할 땐 쓸 줄 안다고요. 그리고 이건 제 사비로 산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공동 경비로 사도 됐는데...”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군것질할 돈조차 아까워하던 녀석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조금은 여유가 생긴 걸까.

“그럼... 이것도 꺼내야겠네.”

그렇다면 나도 그에 호응해야지.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들자 라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란님, 그건..!”

“왜?”

“...정말 중요한 날에만 쓰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오늘이 바로 그날 아니겠어? 이럴 때 안 마시면 언제 마시자는 거야.”

“...그것도 그러네요.”

라디가 쿡쿡 소박한 웃음을 흘렸다. 녀석과 함께 마개를 비틀자 황홀한 향기가 퍼져나가 취운을 형성했다. 유적에서 발견한 술. 비아투스 영감에게 술독을 건네기 전에 내용물을 조금 퍼담았었다.

라디가 사 온 와인과 유적에서 발굴한 술을 각각 잔에 따른 뒤, 꼬치구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자, 이제 더 늦기 전에 먹자!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아~ 해보실래요 도란님?”

“어디 그럼 나도...”

입으로 고기를 식힌 뒤 라디와 마주보았다. 조금은 낯뜨겁게 웃으며 서로에게 고기를 먹여주자 입안 가득 감칠맛이 느껴졌다.

“오..! 괜찮은데..?”

“어, 엄청 맛있어요!!”

기름진 양고기와 야채의 조합이 가히 환상적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육즙이 터져나와 입을 즐겁게 했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파와 버섯이 느끼함을 잡아주었다.

느슨하게 볼을 늘어뜨린 라디를 보니 밑간을 해 두길 잘했다.

“자, 짠하자.”

“네!”

붉은 액체가 넘실거리는 잔을 맞부딪히자 맑은 음색이 울려퍼졌다. 찰랑이는 물결에 담긴 별빛이 아름답게 부서지는 모습에 가슴이 들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얼마만의 음주던가. 그동안 여유가 없어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으니.

하물며 이곳은 몬스터도 없겠다, 오늘은 마음껏 빈 병이나 만들어 보련다.

“크으... 독하네요.”

“그러게.. 와인치고는 도수가 꽤 높은데?”

“나름 유명한 상표인가 봐요. 술은 잘 안 마셔봐서 모르겠지만...”

“그래? 조금 의외네... 보통 모험가에게 낙이라고 하면 일 마치고 주점에서 화포 푸는 것밖에 없잖아. 가끔 마시는 정도면 술값이 그렇게 부담되지도 않았을 텐데.”

“음... 그렇긴 하지만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고... 알다시피 전 독성에 면역이 있잖아요. 알코올 마찬가지인지 한두 잔 정도로는 안 취하더라고요. 쓸데없이 쓰기만 하고 한푼 두푼 나가는 돈도 아깝다 보니 자연스럽게 안 마시게 됐어요.”

“그래? 하긴...”

잔을 기울이며 힐긋 녀석을 훔쳐봤다. 적적한 모닥불이 기울어진 그녀의 고아한 얼굴에는 절벽 위에 돋아난 야생초처럼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감돌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반사하는 회색 머리칼은 바람에 옅게 휘날려 연연한 광채를 흩날렸다.

이제 슬슬 말할 때도 됐지.

나는 술잔을 기울이며 라디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시답잖은 이야기, 모험가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 앞으로의 계획과, 다분한 추억이 서린 기억까지.

“그래서 얼마나 웃겼던지... 그때 말톤님 표정을 도란님도 봤어야 했는데...”

“.....”

술기운에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순수한 웃음이 밤하늘에 맴돌고, 새하얀 입김에 취기가 차올랐다.

한참 분위기가 농익었을 무렵ㅡ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디야.”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별 맺힌 하늘을 올려다보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와 내 눈동자에 머물렀다. 언제나처럼 짙은 바다의 취향이 정체하곤 했던 푸른 눈길은 내 마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 잔잔한 물결을 자아냈다.

“도란님.”

“.....”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거죠?”

뜸을 들인 뒤,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각오했지만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라디는 그런 나의 손등을 부드럽게 맞잡아주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올곧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내리깔고 알음알음 뒷말을 찾아나섰다.

어릴 적, 지구에 살았을 시절의 이야기를.

“.....”

별들이 기울어져 지평선 아래로 쇠락했다. 현현한 창공의 불빛이 공터에 둥근 잔향을 피워냈다. 어스름한 소슬바람이 들판 위를 스칠 때면, 여치의 울음소리와 개울의 물 향기가 어우러져 아련한 아취가 반개한다.

꿈결같이 흘러만 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가슴속에 찬 말들을 토해내었다.

몇 번이고 말이 헛나왔고, 몇 번이고 숨이 막혔다.

그런 내가 말을 끝마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그녀가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보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허해질 때까지 진실을 토로하고 나자 예정된 침묵이 찾아왔다.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고요함이 두렵기도 했다.

라디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렴풋한 미소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 온화한 입꼬리 아래에 감춰진 의미를 알 수 있는 순간이 올까.

그녀의 다정함이 무서워 고개 숙인 내 뺨에 온기가 맞닿았다.

라디가 날 끌어안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고생했어요.”

“.....”

“그간 많이 외로웠죠? 낯선 외지에 홀로 떨어져서...”

“....”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 도란님은 혼자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계속.”

“제가 당신 곁에 있을게요.”

“사랑해요 도란.”

내 사랑.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별빛이 번져들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