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33화 (133/375)

〈 133화 〉 여흥 #1

* * *

[133] 여흥 #1

“어서 옵쇼! 푸른 꼬리 원숭이의 발바닥이 단돈 50페니!!”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모든 장비를 새것처럼 수리해 드립니다! 오늘만 특별 할인!! 흉갑 1실링! 각반은 80페니!!”

“거기 아가씨들, 혹시 젊음의 비약에 관심 있나? 저명한 연금술사 라프노가...”

“회복초 팝니다!! 환약도 있어요! 다들 보고 가세요!!”

“어우... 시끄러...”

한낮에 다다른 시각. 3계층이 제일 뜨거울 무렵이지만 암시장에는 왁자한 활기가 맴돌았다. 발광 이끼가 제일 많은 조광을 내뿜는 시기라서 그런지 행인들의 만면에도 웃음이 가득하다.

­저벅저벅.

나는 막 자다 일어나 나른한 몸을 이끌고 길거리를 가로질렀다. 딱히 목적이 있는 건 아니다. 손안의 은화를 짤랑거리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무수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가판에 진열된 단검을 꼼꼼히 비교해보는 젊은 모험가, 호기롭게 대로를 거닐며 거들먹대는 전사 무리. 로브를 푹 눌러써 귀를 감춘 수인과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법한 꼬마아이...

“저, 저기...”

“....?”

소매를 잡아끄는 감각에 고개를 내려보니 웬 꼬마가 내 로브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꼬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부모라도 잊어버렸니?”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곧바로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던전에 아이를 데리고 올 부모는 없으니까.

꼬마는 잠시 심호흡하며 뜸을 들이더니 또박또박 국어책을 읽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저, 저희 점포에서 싱신한 가, 과일을 판매 중입니다..!”

아무래도 잘 안되는 듯했지만.

“...상인 견습이니?”

­끄덕끄덕!

한쪽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눈높이를 맞추자 꼬마가 고개를 연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가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건지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서서히 번져나간다.

“과일이라... 그래, 마침 달달한 걸 찾고 있었는데 잘됐네. 괜찮다면 안내해 줄 수 있어?”

“넵! 이쪽이에요!”

꼬마가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도도도 길을 가로질렀다.

신이 나 앞서나가는 녀석을 부지런히 뒤쫓자 얼마 안 가 자그마한 점포들이 모인 장소에 도착했다.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공터는 중심 거리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머지 인적이 드물었지만, 달콤한 향기에 이끌린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성이고 있었다.

‘이건... 빵 냄새?’

“여기에요!”

꼬마가 한 노점을 가리키며 멈춰섰다. 차양막 아래 단출한 매대에는 싱그러운 기운을 머금은 형형색색의 과일이 나무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있다.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는 품질에 내심 감탄하고 있자니 가게 안쪽에서 한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과일을 판다고 해서 와봤어요. 제법 상태가 괜찮네요?”

“네, 잘 찾아오셨어요. 저희는 아티팩트를 써서 냉장 보관을 하고 있거든요. 여기 이 통 보이시죠? 이 안에 담긴 빙결 마석과 바람 마석으로 차가운 공기를 발생시키는 거예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된 저희 점포의 자랑이랍니다!”

“마석이라...”

어쩐지 상품 상태가 좋더라니. 별로 큰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었지만, 던전에서 이 정도의 품질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옛적에 뱃사람들이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지 못해 괴혈병에 걸렸듯이, 아무래도 과실류는 장기간 보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니.

나중에 라디와 함께 살게 되면 조금 돈을 들여서라도 마석 제품을 구비해볼까? 내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조합해보면 냉장고 비슷한 물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매대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우두커니 서 있자 상점 주인이 앞치마를 단정하게 고치며 물어왔다.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과일이 있으신가요? 신 걸 찾으신다거나.. 요리에 곁들여 먹을 종류를 찾고 있다던가.”

“음... 딱히 정해놓은 건 없는데... 달콤한 과일 위주로 골라주실 수 있나요?”

“달콤한 과일이라... 혹시 여성분을 위해 사 가시는 건가요?”

“아, 어떻게 아셨어요?”

돈을 주고 생과일을 사 먹는 건 처음이라 망설이던 중, 눈을 크게 뜨며 되묻자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통 남성 모험가님은 과일을 잘 안 사가시잖아요. 제 그이도 나무 열매 따위를 돈 주고 사 먹을 바엔 술 한 잔이라도 더 걸치겠다고 농담 삼아 말하는걸요? 길거리 가로수에도 널린 게 과일이라면서.”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네, 그럼 제가 임의로 골라드리도록 할게요! 어디 여성분이 좋아하실 만한 과일이... 코코 열매랑... 큐바...”

그녀가 싱싱한 상품을 골라내 널찍한 나뭇잎에 담기 시작했다. 과일 밑면에 남은 흠집까지 살피며 추려내는 걸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

나는 한시름 던 심정으로 매대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살폈다. 한가로이 공터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코끝에 와닿는 이 달달한 향기의 출처가 궁금해졌다.

“저기... 이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예요?”

“냄새요?”

“네, 꼭 빵 굽는 냄새 같은데... 이 근처에 화덕이 있나요?”

“아..! 저희 바로 뒤 매장에서 갓 구운 빵과 쿠키를 팔고 있거든요. 과일도 사주셨고 하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조금 싸게 제공해드릴게요. 이 공터 점포는 전부 다 같은 친척들이 운영하고 있어요!”

“와 정말요? 그럼 정말 감사하죠! 부탁드릴게요.”

“후훗, 애인분이 부럽네요.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손님 말고도 한 남성분이 들려서 선물을 사 가더라고요. 그분도 엄청나게 잘생긴 분이셨는데... 자, 다 됐어요. 로나야, 이 오빠 좀 안내해 주겠니?”

“네!!”

여인이 건넨 과일 꾸러미를 받아들고 구리 동전으로 값을 지불하자 꼬마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쫄래쫄래 앞서나갔다. 지나치면서 본 점포들에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거로 보아 여인의 말대로 가족들끼리 상단을 꾸린 모양. 이 세계에서 자식이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거나 혈연끼리 뭉쳐 동업하는 경우는 흔하니까.

꼬마를 쫓아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냄새의 근원지에 다다랐다.

아무리 소형이라고 해도 몇백 킬로그램이나 나갈 화덕을 어떻게 던전 안에 들고 왔을지 궁금했지만, 직접 제빵 과정을 보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땅을 파서 화덕을 만들었구나...’

흙이 고스란히 노출된 열 평 남짓 부지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다. 한 구덩이에서 불을 피우면 땅 아래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그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구조. 효율 좋게도 일부 화덕의 위쪽에는 빵 안에 넣을 속으로 추정되는 고기와 야채 따위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후화아아악!!

“오오...! 저것 좀 봐! 진짜 맛있겠는데?”

“이야... 여기서도 갓 구운 빵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한 땀투성이 사내가 화덕의 뚜껑을 열자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치솟으며 구경꾼의 감탄이 들끓었다. 고열 탓에 유리화가 진행되어 검게 번들거리는 화덕 내부는 인도의 전통 화덕 탄두르를 연상시켰고, 찰기 있는 빵 반죽이 벽면에 붙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어... 뭐야, 말톤 네가 왜 여깄어?”

“도란...? 자네가 왜 여기 있는가?”

느슨하게 입꼬리를 올린 인파 속 한 남성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원형 공백이 이루어져 있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수군거리는 여성 모험가들의 시선 끝엔 수려한 외모의 말톤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든 과일 보따리를 보자 대충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야... 상점 주인이 말했던 잘생긴 남자가 너 말하는 거였어? 넌 대체 뭐 하고 다니길래 요 며칠간 코빼기도 안 보이냐. ...아, 그리고 네 로브 유용하게 쓰고 있다.”

“잘 쓰고 있다니 다행이군. 회담 때 보고 난 뒤로 나흘만인가? 도중에 찾아가지 못한 건 미안하네. 요즘 너무 여유가 없어서 말일세.”

“아니... 대충 들어보니 붉은 매 길드랑 무슨 협업 같은 걸 하고 있다면서. 그 엘프랑 관련된 거야...?”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꽤나 수척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껴있을뿐더러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져 있다.

여전히 그 A랭크 엘프 소녀에게 쥐어뜯기고 있는 걸까.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냥 옛 인연일세. 자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으니 신경 쓰지 말게나. 한데 그쪽도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군. 어쩐지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라디는 같이 안 나왔나?”

“...라디는 아파서 잠깐 쉬고 있어. 그래서 과일이나 좀 사 가려고.”

“라디가 아프단 말인가? 이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내 병문안이라도...”

“아, 아니..! 심각한 건 아니고 요 며칠간 격하게 운동했더니 근육통이 도진 것 같아. 쉬면 나을 거야.”

“다행이군...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자네들은 7계층에서 탈출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할 걸세.”

말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쳐다봤다. 동료 하나는 끔찍이도 아끼는 녀석이니까.

이내 그가 점포 주인에게서 과자가 든 주머니를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비아투스에게 술 건은 들었네. 좋은 가격에 잘 처분한 모양이더군.”

“오 소문이 빠른데? 그래, 그분이 정가보다 훨씬 더 얹어줘서 엄청 벌었지 뭐야. 네 몫은 나중에 나눠줄게. 잊어버리면 곤란하니까 금화 주머니는 숙소에 두고 왔...”

“내 몫은 필요 없네.”

“...뭐?”

고개를 들어 말톤을 마주 보았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크게 떴지만, 그의 진녹색 눈동자에서는 일말의 장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끄덕.

“...너 얼만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물론이네. 13골드 아닌가. 감정가는 더 낮았지만 비아투스가 꽤 얹어준 모양이더군. 성미가 급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참 좋은 친구지.”

“아니 너 그걸 알면서도... 우리 두당 몫으로 나누면 4골드야. 그 금액이면 몇 달 동안 일하지 않고도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뭐... 어짜피 도란 자네가 아니었다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유적이었네. 게다가 비아투스가 얹어준 웃돈은 내가 아니라 자네와 라디에게 선물한 걸세. 그 금액을 제외하면 내 몫은 1골드 남짓인데... 내가 겨우 그 정도 푼돈에 아쉬워할 것 같나? 자네와 라디는 앞으로도 지출이 많을 텐데 살림에나 보태게나.”

“너...”

그의 입가에 맴도는 선선한 미소를 보자 감정이 북받쳤다. 그래... 이놈은 처음부터 이런 녀석이었지.

라디에 이어 말톤까지. 어쩌면 이 세계에 떨어지고 겪어온 나날들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협소한 목구멍을 비집었다.

“...나중에 술이라도 사게 해줘. 던전을 나가면 뭐든 쏠 테니까. 그러고 보니 크누트 길드에서의 설욕도 아직 못 했잖아? 나한테 입단주를 멕인 값은 톡톡히 치러야지.”

“물론이네. 기대하고 있겠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말이네.”

“....무슨 일 있어?”

“별거 아니네. 단지 붉은 매 길드랑 같이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이번에 자네들이 지상으로 올라갈 때 같이 맞춰서는 못 나갈 것 같네. 그뿐일세.”

“....너 혹시 무슨 일에 말려들기라도 했어? 예컨대 그 엘프랑 관련된 거라던가. 그 과자랑 과일도... 너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전부터 궁금했다. 녀석이 아니스에게 나와 라디의 구출을 의뢰할 때, 과연 아무런 대가도 없었을까?

아니스는 무려 공작 가문 출신 하이랭커에 길드의 수장까지 맡고 있는 거물이다. 아무리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순 선의만으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말톤은 손을 내저으며 단숨에 의혹을 불식시켰다.

“당치도 않으니 걱정 말게나. 물론 자네들의 구출을 의뢰하면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건 맞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내가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니. 자네가 봤던 엘프도 내게는 그저 동생 같은 아이지... 안쓰러운 녀석일세.”

“.....”

동생치고는 좀 많이 험악해 보이던데.

아무튼, 말마따나 부당 계약을 맺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먼 하늘을 응시하며 옛 기억을 반추하는 말톤의 눈은 너무나 성숙해 보여서, 그가 보아왔던 세월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녀석은 내 시선을 눈치채자 짐짓 헛기침하더니 짐꾸러미를 고쳐 쥐며 말했다.

“크흠...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더 늦으면 꾸지람을 들을 테니 말일세. 조만간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래, 잘 지내고. 시간 나면 놀러 와. 우리 숙소 위치는 알지?”

“물론이네. 자네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기절해 있을 때 자주 방문했었네. 나는 붉은 매 길드 야영지에서 체류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하게.”

“그래....”

녀석이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사연을 간직한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조금 생소해 보였다.

*

오솔길을 걸어 익숙한 공터에 도착했다.

나는 햇볕에 건조 중인 스노우 타이거 모피를 지나쳐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라디야 나 왔어.”

“아, 다녀왔어요 도란님?”

“그래, 몸은 좀 어때?”

“...조금 아프긴 한데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시장에 다녀오신 거예요?”

“그래, 달콤한 걸 먹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과일이랑 이것저것 사 왔지. 고기소를 채운 파이도 있고, 쿠키랑 꿀빵도 있는데 지금 먹을래?”

“네! 좋아요!! 정말... 제가 단 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내가 모를 리 없잖아.”

텐트 안쪽으로 들어서자 라디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해사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녀석은 발을 딛고 일어나 내게 안겨들려고 했지만, 이내 아랫배를 매만지며 도로 주저앉았다.

문양이 새겨진 두 뺨이 살짝 달아오른다.

“...무리하지 마.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고.”

“고마워요...”

라디의 옆자리에 앉아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운 연색 머리칼 아래 애틋한 눈동자와 마주쳐 자연스럽게 키스를 나눈 뒤에는 탁자를 가져와 침대 앞에 붙였다.

시장에서 사 온 짐을 풀자 달곰한 향기가 모락모락 퍼져나갔다.

“와아...! 이거 설마 벌꿀이에요?”

“그래, 어때?”

“너무 맛있어 보여요...! 게다가 따뜻해... 던전에서 이런 걸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비싸진 않았어요?”

“생각보다 얼마 안 하더라고. 우연히 좋은 가게를 찾았어. 얼마든지 더 사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네 좋아요!!”

만면에 함박웃음을 짓는 라디를 보니 그간의 피로가 씻은 듯이 날아갔다. 이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갖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

손가락으로 쿠키를 집어 손수 그녀의 입속에 넣어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보니까 좀 전에 시장에서 말톤이랑 만났어.”

“말톤님이요?”

“그래 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라고. 걔는 볼일이 있어서 던전에 조금 더 체류할 예정인가 봐. 그리고 술독 처분 건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돈을 안 받겠다네.”

“네...? 설마 금화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 자기는 필요 없으니 우리 살림 꾸리는 데 보태라던데?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굳히고 있었나 봐.”

“그런...”

라디가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고개를 내리깔자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금화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꼭 식사라도 대접해야겠어요. 우리 집에 초대해서...”

“그래, 그러자.”

다정하게 라디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정말 큰 빚을 졌다. 목숨을 구원받은 것부터 던전에서 활동하는 내내 도움을 받은 것까지. 따지고 보면 라디와 만난 것도 다 그가 인연을 맺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라디와 피부를 맞대고 있자니 따뜻한 감정이 샘솟았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였던 건지­

“저... 그.. 도란님?”

“...왜 그래 갑자기.”

“그... 지금 당장은 좀 힘든데... 오, 오늘 밤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갑자기 덮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

“그, 그래요..?”

라디가 귀까지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 조금... 아주 조금이라면 괜찮은데...”

아.

못 참겠네.

“꺅...!”

녀석을 끌어안고 침대에 눕히자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얇은 원단의 잠옷 너머로 라디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그대로 전해져온다.

“저... 일단 천막 좀 내리고...”

“그래, 잠시만.”

행위에 몰입하기에 앞서 텐트 입구에 고정해놓은 가림천을 내리고자 다가간 순간,

“라디 씨...! 도란! 거기 있어?!”

트라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솔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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