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여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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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여흥 #3
좆 됐 다...!
완전히 좆됐다.
‘시발시발시발시발시발!!!’
대체 왜 저 여자가 이곳에...?!
노을이 드리운 물가처럼 생생한 홍연의 눈동자를 목도하자 숨을 쉴 수가 없다. 연청색 머리칼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어렴풋한 물향이 풍겨왔고, 하늘로 치솟은 두 뿔에선 강직한 면모가 느껴졌다.
구둣발에 너저분해진 진창조차 물망초가 만발한 습지로 바꾸어 놓을 듯 가려한 외모를 보아하니 그 인물이 틀림없다.
S랭크 수인 소녀. 카야.
문뜩 모험가 길드의 카렌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실, S랭크 중 한 명이 빠른 시일 내로 이 도시에 방문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어요.”
“이번에 발견된 던전 규모가 상당하다 보니 조사 차원에서 한 명쯤은 파견 올지도 모른다고...”
조사(?) : 명확히 알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
그 말은 즉...
‘이 던전을 탐색하러 온 거였어?!!’
그게 복선이었을 줄이야...!
기억 속에 내재된 두려움에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자니 그녀가 활시위에 힘을 실었다.
“당신... 어떻게...?”
“네, 네...?!”
“마법... 썼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
제기랄!
대충 문맥으로 유추해보면 결계라도 펼쳐두었던 모양인데...
내 알 바냐?! 나는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짙게 응축되어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루벨라이트색 마력 파장을 목도하고 있노라니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인간이 짐승처럼 안광을 내뿜는단 말인가.
뿌드드득...!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백광(白光) 편전이 언제라도 내 맥박을 끊을 것처럼 포악하게 맥동했기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지.. 지나가던 나그네올시다...!!”
서둘러서 말이 헛나왔다.
재빨리 뒷말을 덧붙여 수습했다.
“그, 그... 약초를 캐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오게 됐습니닷...! 식사를 방해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대로 얌전히 물러날 테니...”
“목소리... 들어 본 적 있어..”
“....!”
“당신... 누구..?”
“....”
젠장!!!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도란!!
상대는 규격 외의 강자. 자칫 심기를 거슬렀다간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끔살당할 거다. 어디 나뿐이랴. 마음만 먹으면 이 지역 일대의 모험가를 전부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S랭크란 그런 자들이니까.
그러한 괴물과 맞서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여자랑 마주친 전적이 있고, 석연치 않긴 하지만 무사히 빠져나왔었다.
즉 S랭크에 대한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이 소녀는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이, 일단 진정하세요! 저는 적이 아닙니다...!”
“후드... 벗어.”
“제가 사실 얼굴이 좀 많이 추해서... 로브를 벗으면 분명 화들짝 놀라실 거예요! 게다가 저는 진짜 진짜 밑바닥 떨거지 모험가라 그쪽 같은 귀인하고는 아무런 접점도...”
“...거짓말.”
투콰아아아아아앙!!!!!!!!!!!!!
찰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허, 허억...!”
파열한 대기로 흉흉한 기류가 몰아쳤다. 타닥거리는 오존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내 발치로 날아들었고, 40미터가량의 기다란 화염 골짜기를 형성하며 지형을 뒤바뀌어놓았다.
이거 설마...
‘내 그림자 속에 있던 여왕의 존재를 감지한 거야...?!!’
붉은 매 길드의 수뇌진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화르르륵...!
검게 그을린 샌들의 가죽끈을 보자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정체를... 밝혀..”
“자, 잠깐만요...!!”
“...다섯 셀 거야. ..그 뒤론 안 봐줘.”
“제기랄!!!”
어느새 새로 돋아난 광살(光)이 다시금 그녀의 손에서 아른거렸다. 완전한 영거리 사격. 이 거리에서 방금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다간 반드시 사망하고 말 거다.
그 붉은 눈동자엔 나에 대한 경계와 의구심, 이번엔 반드시 적중시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전해져왔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카야 님, 저 기억 안 나세요...? 저예요 저!”
“.....”
콰지직!!!
“히익...!! 자, 잠깐!! 아, 알았어요!! 후드 벗을 테니까 쏘지만 마세요!!”
젠장!!! 이 방법은 절대 쓰기 싫었지만...
황급히 푹 눌러쓴 후드를 젖히며 외쳤다.
“저, 저.. 접니다..!! 예전에 베라스틴 동쪽 숲에서 마주쳤던... 투, 투구를 썼던... 모, 모험가.”
“....!”
파아아앙!!!!!
“끼에엑!!!”
주, 죽을 뻔했다...!! 얼굴을 드러내면 안 쏘는 거 아녔어?!!!
총성에 놀란 참새처럼 엉덩방아를 찧은 채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 있자니 연분홍색 입술을 비집고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 실수...”
“...네?”
“놀라서...”
“....”
어색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녀가 어정쩡하게 활을 내리더니 내게서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힐끗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말문을 잃은 채 그녀를 마주 보았고.
불편한 공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붉은 눈동자가 좌우로 갈팡질팡하는 걸 보니 어째선지 이 여자도 내 얼굴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눈치인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참다못한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카... 아니... 모, 모험가 님? 저, 저는 이제 어떻게...”
“...이름.”
“네...?”
“이름.”
“....”
호칭이 맘에 안 들었나?
“네, 카야 님.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내 물음을 들은 카야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더니
“네 이름...”
“아... 제 이름 말씀하던 거였어요?”
끄덕.
“.....”
곤란한데...
아무래도 이 S랭크 모험가는 내 이름이 궁금하신 모양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나는 한낱 피라미와도 같은 존재니까.
“제 이름은 말톤이라고 합니다. 저 멀리 북방 대륙 출신이고 그때 베라스틴에서 봤던 건 잠깐 관광하러 들린...”
툭.
순간 품속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황급히 허리를 굽혀 주워들기도 전에 이미 그 물체는 그녀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나무로 된 목판. 내 인적사항이 적힌 모험가 패가.
‘어느새...?!’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성 베라스틴... 아카이아 모험가 길드... F랭크.. 도란.”
“....”
“....거짓말쟁이.”
“.....”
어, 어떡하지...?
비지땀에 등이 흥건해졌다.
본명이 들통난 거로도 모자라 길드명과 주소지까지 들켜버렸다. 이걸로 난 던전을 벗어난 뒤로도 목줄 메인 강아지나 다름없는 신세. 이 여자의 말 한마디면 온 도시가 내 신변을 노리고 협조해올 테니까.
말톤을 팔아먹은 업보인가...?
하지만 어떡하란 말인가! 녀석밖에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는 걸!
다시금 묘한 침묵이 내리깔려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기세로 보아 당장 위해를 가하지는 않으려는 모양이지만, 하이랭커란 본디 끓는 주전자 안에 담긴 물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하물며 S랭크는 오죽할까.
이번에 먼저 말문을 튼 것은 그녀였다.
“..왜 왔어...?”
“...약초를 채취하려고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저 끈끈이난초 보이시죠? 저거 가져가려고 왔어요.”
공터에 난 보랏빛 야생초를 가리키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초?”
“네.”
“저건... 약초가 아니라 허브... 아니야...?”
이 여자 설마...
“...끈끈이난초는 향신료가 아니라 물에 희석해서 환부에 바르는 약초에요. 진짜 뒤지게 쓰고 떫어서 사람이 먹을 게 못 된다고요... 심지어 그 먹성 좋은 고블린마저 꺼리는 풀인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제야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보라색 액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끈끈이난초를 물에 달이다 못해 바짝 졸였으니 그런 악취가 풍기는 것도 당연하지. 이 여자는 도중에 냄새를 맡고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걸까?
내가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엄청 예쁜 소녀와 다를 게 없는데...
아니, 이 또한 내 방심을 유도하려는 작전일 수도 있다.
“저... 괜찮다면 저것 좀 채취해가도 될까요..? 이래 봬도 급한 몸이라...”
“....”
“실례하겠습니다...”
그녀의 묵언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는 서둘러 근처에 돋아난 끈끈이난초를 채취했다. 어쨌든 위험한 고비도 넘겼겠다,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니.
내 머리를 보고도 관대한 건 다행이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느닷없이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한데 단검으로 약초를 흙째 퍼담는 내내 옆통수에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계속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예요?”
“....”
“혹시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
목격담조차 극히 드물어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했던가. 카야는 아까부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손안에 든 수정 비스름한 걸 꼬옥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마치 사자에게 사로잡힌 가젤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몸소 느끼고 있자니 적잖게 속이 쓰려온다.
채집망을 다 채운 뒤에도 반응이 없자 마지못해 말을 걸었다.
“저기... 저는 이만 가보려 하는데... 가도 되는 거죠...?”
“....”
“저기요?”
“....”
카야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자 눈동자가 움찔했다. 잠든 것도 아닌 모양인데... 그녀의 시선은 내 머리칼과 얼굴에 못 박힌 듯 떠날 줄을 몰랐다.
마치 오랫동안 애타게 찾아오던 대상을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떡하지..? 이대로 가기에는 마음에 좀 걸리는데...’
괜한 여지를 남겨두었다간 곤란하다. 무엇보다 이 여자는 이제 내 이름과 주소지를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앙심을 품었다가 나중에 베라스틴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라도 하면...
아...! 그게 있었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허리춤의 수납 주머니를 뒤져 나뭇잎에 쌓인 물체를 꺼내들었다.
“받아요.”
“이건...?”
“노점에서 산 벌꿀 쿠키랑 꿀빵이에요. 원래 엄청 비싼 거지만 특별히 주는 거니 그렇게 아세요.”
“쿠키... 먹는 거야...?”
뭐야 이 사람. 정말 숲속에서만 살았나?
“네, 한 번 먹어봐요.”
내가 손짓하며 재촉해도 그녀는 머뭇거리며 주저했다.
“...독 같은 건 안 들었으니 걱정 마세요. 더한 것도 평소에 먹고 다니면서... 하나 줘봐요.”
“앗...!”
내가 나뭇잎 봉지 안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들자 카야가 옅은 탄식을 흘렸다. 아니, 내가 준 건데 고작 하나 빼갔다고 아쉬워하는 건가?
파삭!
“...맛있네. 조금 식었긴 하지만 여전히 먹을 만할 거예요.”
“.....”
그녀도 내가 먹는 걸 보고 천천히 귀퉁이를 오독 베어 물었다.
혹여나 갑자기 돌변해 ‘S랭크인 내게 이딴 싸구려 서민 음식을 대접하다니!’라고 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 홍안이 살짝 벌어지는 걸 보니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알기 쉽네.
“...달아.”
“그럼 달지 쓰겠...”
“고마워 도란.”
“.....!”
불그스름한 뺨에 피어오른 따뜻한 미소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 찰나, 초롱꽃이 만개한 들판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에 현기증이 일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째서 이런 숲속에 외로이 혼자 있었던 걸까.
아니, 실상은 어린애 손목 비틀듯 도시 한두 개쯤 손쉽게 파괴하고도 남는 무지막지한 괴물이다.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그래... 그러면 나는 이제 가볼게... 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평소에도 좀 웃고 다니지... 밥도 좀 제대로 된 걸로 챙겨 먹고. 아무튼 전 이만 갈 테니 따라오지 마세요.”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공터를 뒤로했다. 무성한 수풀들 너머로 어렴풋한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들었지만 듣지 못한 척했다. 이제 그녀와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S랭크와 마주치는 경험은 인생에 두 번이면 충분하고, 얽혀서 좋을 일이라곤 서로 전무하다.
...뭔가 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또 봐 도란..’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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