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여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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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여흥 #4
“솔직히 말해봐요. 무슨 일 있었죠.”
뜨끔!
“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정말로요?”
“그러엄~! 물론이지!”
“흐음... 아무래도 수상한데...”
라디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보았다.
이내 허리를 쭉 펴며 내뱉었다.
“그저께 트라함 씨의 부탁을 들어준 뒤부터 조금 이상해요. 계속 생각이 딴 데 가 있고. 조그마한 일에도 불안해하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럼 당연하지. 난 평소랑 똑같은데? 완전 괜찮아.”
괜찮기는 개뿔.
불안한 게 당연하지. 내 모험가 패를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데.
이틀 전,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해 차마 목패를 챙겨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 되돌아가 ‘제 모험가 패 좀 돌려주시겠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 여자가 그걸 보고 베라스틴까지 찾아오면 어떡하지...?
뭐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넙죽 기어야지. 대검으로 내려찍어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여잔데.
‘제길... 그래도 별일은 없겠지...?’
라디에게는 카야를 만난 일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녀석이 알면 필시 걱정할 터, 당장 무리해서 이곳을 뜨고자 할 수도 있다. 아무리 고민해봤자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일로 라디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쓸데없고 미련한 아집이라는 건 알지만 나름 남자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있어.’
그녀는 분명 마법을 썼다고 했다. 타인을 꺼리는 성격과 말의 맥락으로 보아 사람을 물리거나 접근을 차단하는 결계라도 펼쳐둔 모양이지만, 내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나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조금 이상하다.
그야 평범한 모험가도 아닌 S랭크가 그런 걸 실수할 리 없으니까.
더군다나 후드를 젖히자마자 눈에 띄게 동요한 것도 그렇고, 즉시 적의를 거둔 것도 신경 쓰인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생판 남 아니던가. 어째서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걸까.
“...라디야.”
“네, 말씀하세요.”
“S급 모험가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거야?”
“네? 설마...”
최대한 의심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텄으나 라디는 위화감을 느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왜?”
“아니... 도란님이 뭔가를 물어보실 땐 다 이유가 있었잖아요. 이 시점에 갑자기 S랭크 얘기를 꺼냈다는 건...”
“.....”
“에이... 그래도 이건 너무 억측인가... S랭크가 그리 흔할 리도 없고... 근대 그건 왜요?”
“그냥... 붉은 매 길드가 A랭크잖아. 그 위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할까 싶어서.”
“음... S랭크라...”
라디가 턱을 괴며 읊조렸다.
“...일단 모험가 랭크도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죠?”
“물론이지. 길드가 한두 개인 것도 아니고 심사 방법도 제각각이잖아.”
그 말대로, 길드 간의 랭크에는 편차가 있다.
값비싼 통신 마도구라도 쓰지 않는 이상 데이터의 교류가 제한적인 이 세계에서 지역마다 정보의 격차가 생기는 건 필연이다. 내가 아카이아 길드에서 A랭크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왕국 반대편에 있는 다른 아카이아 지부에서 즉시 랭크를 반영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모험가란 직업의 특성 탓에 지역마다 획일적인 척도를 적용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모 길드에서 고블린 30마리 토벌을 E랭크 진급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하더라도 고블린 자체가 희소한 마을에선 실력과 상관없이 이를 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어려서부터 인간의 손에 자라온 맹수 중 일부는 야생성이 결여되듯이, 같은 몬스터 집단이라도 성장 과정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무력을 지니기도 한다.
지구에서도 5년간 가축 천여 마리를 사냥했던 로보라는 늑대가 존재했던 것처럼.
즉, 이러한 이유로 길드의 등급이 대략적인 척도가 될 수는 있어도 절대 지표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모험가 길드에 등록되어있지 않는 마법사나 기사도 많고, 말톤 또한 크누트 길드에서는 금 랭크이지만 아카이아 길드에서는 E등급밖에 안 되지 않던가?
라디가 입을 열었다.
“네, 같은 랭크라도 실력이 상향 평준화된 왕도의 모험가들은 훨씬 강한 것처럼, 모험가 등급의 기준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A랭크나 S랭크만은 예외에요. 그쯤 되면 일개 길드가 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왕국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승급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위업을 쌓아야 하고요.”
“위업...?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데?”
“글세요...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지만... 전쟁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공을 세운다던가, 아니면 정말로 강력한 몬스터를 쓰러뜨린다던가... 이를테면 저희 왕국에서 활동하는 S랭크로 유명한 카야 님의 경우... 도란님?”
“어, 어.. 어... 계속 말해! 카, 카야가 어쨌는데...?”
“....왜 그렇게 말을 더듬으세요? 땀까지 흘리시고...”
라디가 땀으로 흥건한 내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재빨리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 사람이 어쨌는데..?”
“...카야 님의 경우 포레스트 드래곤 아성체를 잡아서 S랭크에 등극한 걸로 알고 있어요. 같은 수인인 데다 성별도 같고 활을 다룬다는 점에서 제가 정말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에요. 저도 실력이 갖춰지면 언젠가 그분처럼 활을 다뤄보고 싶거든요.”
“....그 사람에 대해 더 아는 거 있어?”
“도란님...?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요? 혹시...”
“아니아니, 그냥... 궁금하잖아.”
“뭐... 모든 모험가가 선망하는 존재긴 하죠...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요. 워낙 신비로운 분이시거든요. 국적도 모르고 나이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공개된 정보로는 여러 신의 권능을 다룰 줄 안다는 점 정도...? 양 수인이란 건 알죠?”
“그래.”
“그럼 그게 전부예요. 가장 최근에 들었던 소식이 한 재작년 즈음인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나 예쁘다던데 딱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분명 매사에 완벽한 초인이겠죠?”
“.....”
아니 걔 요리 졸라 못해.
만일 그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되면 라디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니 녀석이 내 흑발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예전엔 이런 질문을 들으면 의아했는데 도란님의 출신에 대해 듣고 나니까 전부 이해가 되네요. 진작에 좀 털어놓지...”
“나한테는 엄청난 결단이었다고...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안 말했으니까.”
“그럼 그것도 제가 도란님에게 처음이었던 거네요. 왠지 그만큼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기뻐요.”
“...이상하지는 않아?”
“그럴 리가요. 매번 들을 때마다 신선하고 재밌어요. 그 놀이공원? 이라는 곳도 꼭 가보고 싶고... 또... 시부모님에게도 꼭 인사를 올리고 싶어서...”
“....그래,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살짝 떫은 홍차를 음미하며 라디를 껴안았다. 그녀의 말대로 언젠가 지구에 되돌아가게 되는 날이 올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이 오더라도 라디는 내 곁에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녀와 함께하리라는 것이다.
푸른 하늘, 상공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뇌까리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장 하루 살아남기도 급급하던 내가 이렇게 느긋한 감상을 품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게 다 라디 덕이다. 그녀가 내 존재를 긍정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있을 수 있다.
잔디 위에 드러누워 한가로이 시간을 때우던 중, 불현듯 옆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이게 왜 안 열리지...”
“...왜, 뭐가 안 돼?”
“네, 이 통을 열어야 하는데 너무 꽉 닫혀서 안 따져요.”
“그래? 그럼 이리 함 줘봐 도와줄게.”
라디가 건넨 원통형 목제 용기를 받아들였다. 과연 단단하게 밀폐된 탓에 여는 게 쉽지 않았지만, 허벅지로 바닥면을 받치고 팔뚝에 힘을 주어 비틀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딸려나왔다.
한데 그와 동시에 끔찍한 비린내가 치솟아 황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윽...! 야 이거 대체 뭐야...?! 냄새가 너무 지독한데...”
“붉은 가시 복어의 간이랑 알이에요. 자칫 피부에 닿으면 마비가 올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맹독이잖아!!”
“네, 듣자 하니 던전 어딘가에 해수가 있어서 복어가 서식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음식점에서 해체하고 버리려는 걸 우연히 발견해 공짜로 얻어왔어요.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잘만 정류하면 여기서 상질의 독을 추출할 수 있거든요.”
라디가 잠시 천막 안쪽으로 총총 걸어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나타나 독 추출에 쓸 기구를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무슨 요리라도 하나...’
녹이 슨 냄비와 멸치 육수를 우릴 때 쓰는 거름망, 나무 대야와 국자 등. 비주얼만 보면 어디 북어국이라도 끓이려는 모양새인데...
“보기에는 좀 민망하지만 던전 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은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니까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표정에 다 쓰여있었거든요? 뭐... 사실 요리랑 엄청 다르지도 않아요. 이 복어 소재를 망 안에 넣고 끓여서 진액을 우려낸 다음, 재차 가열해서 수분을 날리고 진하게 농축시키는 거예요. 복어 독은 고온에 가열해도 쉽게 변질하지 않거든요.”
“...끔찍하네.”
다시 한번 실감하지만, 나는 절대로 바람 따윈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 만약 라디가 원한을 품고 저녁 식사에 독약을 뿌려놓기라도 했다간...
오한이 엄습해와 부르르 몸을 떨던 중, 문뜩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근데 그거 끓이면 독 성분이 공기 중으로 퍼지는 거 아냐?”
“음... 아무래도 그렇죠?”
“아무래도 그렇다니...! 위험하잖아!! 자칫 코로 흡입하기라도 하면...!”
“에이 괜찮아요. 그 정도는...”
하긴... 라디가 그런 점까지 상정해두지 않았을 리 없...
“조금 마셔봤자 몸에 큰 지장은 없어요. 그냥 뒷목이 좀 땅기고 호흡이 불편한 정도? 아, 그래도 너무 대량으로 흡입하면 구토에 근육 경련이 오고, 혀가 마비돼서 말을 못 하거나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 응?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그런 위험천만한 물건이랑 같이 있을쏘냐!! 얼마나 걸려!”
“음... 한 세 시간 정도?”
“다섯 시간 뒤에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진 끝내둬!! 알겠지?!”
“네...”
서둘러 공터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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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그런 무시무시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독에 면역이 없다고...”
툴툴거리며 시장을 거닐었다. 마치 주말에 잘 쉬고 있는데 마누라 친구들이 놀러와 눈치껏 집 밖으로 빠져나온 기분.
“꼭 벌써 결혼이라도 한 것만 같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진짜로 결혼할 거지만...
...돌아갈 때 선물이라도 사갈까.
고개를 들자 활기가 맴도는 오후의 암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고 선선한 공기가 내려앉으니 행인들의 면면에도 여유가 드리웠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면 홍색 깃발과 천막이 요란하게 나부꼈고, 매대에서 굴러떨어진 상품을 주우러 다니는 상인과 모험가로 길거리가 혼잡했다.
시야 언저리로 여성 궁사에게 작업을 거는 전사 무리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노상을 걷고 있자니 사방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와서 한 번씩만 보고 가세요!! 저렴한 상품이 많습니다!”
“오늘 재고 떨이합니다!!! 다섯 명 선착순!!!”
“푸른 털 사슴의 가죽 팝니다!! 방어구엔 이만한 소재가 없죠!!”
“.....”
‘방어구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쓰던 레더아머는 절벽 위에서 도적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못 쓰게 되어버렸지.
어쩌면 이곳에서 염가로 재료를 구매해 대장간에서 맞춤 제작을 의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코볼트 단검을 구매할 때 마물의 소재를 이용했던 것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완제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에 장비를 맞추는 것도 가능할 거다.
‘암시장에도 잘 찾아보면 싸고 질 좋은 상품이 많다고 했으니까.’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를 이용해 레더 아머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봤으나 이미 그건 침대보로 사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힘들게 잡은 사냥감인 만큼 흠집이 생기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기에.
“그렇다면 기왕 나온 거 괜찮은 매물이 있나 찾아봐야겠네. 여윳돈도 제법 있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대로를 활보하며 품속에서 쩔그럭거리는 은화 소리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추스르던 도중
“이야... 몸매 한 번 뒤지게 좋네. 야, 쩨쩨하게 굴지 말고 이쪽이랑 놀자니까?”
“그래,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면 상냥하게 대해줄게. 너희도 던전에만 있느라 심심하지 않아? 그렇게 비싸게 굴지 말고.”
“오빠들이랑 좋은 데 가자. 응?”
“.....”
후드를 푹 눌러쓴 두 여성 모험가와 그를 둘러싼 네 남성.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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