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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37화 (137/375)

〈 137화 〉 여흥 #5

* * *

[137] 여흥 #5

“응? 우리 어디 으슥한 데라도 가서...”

“야.”

기름때가 덕지덕지 낀 손가락이 로브에 닿기 직전, 손목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며 서늘한 음색으로 읊조렸다.

“너희 지금 뭐하냐...?”

“무, 뭐야 이 새끼는?!”

“깜짝이야... 위병인 줄 알았네.”

“방해하지 말고 꺼져. 웬 멀대같이 키만 큰 새끼가...”

“.....”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리도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삼류 양아치의 표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본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일일이 끼어들 정도로 오지랖 넓은 성격은 아니지만, 당장 눈앞에서 곤란해하는 사람을 매몰차게 무시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니스를 비롯한 붉은 매 길드에게 큰 은혜를 입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다.

보라, 표적이 된 여성 모험가도 무서워서 떨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얌전히 돌아가면 못 본 척 해줄게. 여성분도 싫어하잖아.”

“이야...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 대단~한 신사 납셨네. 어디 고운 집 자식인가 봐?”

“여자 앞에서 객기부리는 놈들 한두 번 보냐. 지도 남자라고 어떻게든 혓바닥 살살 굴려서 한번 따먹어 보겠다는 거지.”

“야, 뭣하면 너도 같이할래?”

사내들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일말의 자제도 결여된 천박한 웃음. 사창가 앞 거리에서나 볼 법한 싸구려 웃음이다.

이어 내게 손목을 붙잡힌 남자가 거칠게 팔을 빼내며 정색했다.

“꺼져 이 새끼야. 뒤지고 싶지 않으면.”

“눈 안 깔아? 야, 이 새끼 눈 뜬 꼬라지 좀 봐.”

“이거 안 되겠네... 이렇게 무시당하고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안 그래?”

사내 중 한 명이 실실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선 동료와 후드를 쓴 두 여성을 힐끗 곁눈질하더니, 불시에 주먹을 뻗어 내 안면부를 가격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휘익!

“크헉...?!”

재빨리 발을 뒤로 빼자 남자는 성대하게 헛방을 날리고 기세에 못 이겨 넘어졌다.

나는 그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무를 기회를 줄 테니까 지금이라도 얌전히 돌아가.”

“이 씹새끼가 뭐라는 거야?! 야 다들 둘러싸!!”

“감히 우리에게 덤볐겠다...!”

네 모험가가 사방을 에워쌌다. 제각각 무기를 뽑아들며 위협하는 모양새가 정말로 한딱까리 할 기세다.

나는 적의가 흠뻑 묻어나오는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하며 재빨리 행색을 살폈다.

‘외투 아래에 퀼티드 아머를 장비했어... 장비 상태는 대체로 열악하고... 무장은 각각 쇼트 소드와 단검, 너클 정도인가...’

지금껏 만나왔던 강자와는 달리 거동에 허세가 잔뜩 낀 거로 보아 실력자는 아니다. 기껏해야 D랭크 하위에서 E랭크쯤 되겠지.

구태여 무기를 쓸 필요도 없다.

슬금슬금 배후에서 거리를 좁혀오던 사내가 덮쳐든 순간ㅡ

­슈화아아악!!!

“....?!!!”

허리를 굽혀 칼날을 피해냈다. 창공의 햇살을 반사해 번뜩이는 검광이 상대의 접근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대로 발목에 회전을 가해 선회했고, 놈의 하복부에 정권을 때려박았다.

일격(一?).

후방으로 2미터가량 밀려난 남성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더니 꼴사나운 얼굴로 위액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하나.”

“이, 이 새끼가...!”

“동시에 조져!!”

사방에서 위협적인 궤적이 쇄도했다. 사내의 너클에 박힌 징이 둔중한 광택을 자아낸다. 나는 즉각 상체를 비틀어 공격을 흘려냈고, 회피 동작을 공격으로 부드럽게 연결해 급소를 강타했다.

“무, 무슨...!”

“둘.”

정정한다.

E랭크도 아까운 수준. 호흡과 시선 처리, 기척을 숨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인전에 미숙한 티가 난다. 어떻게 3계층까지 도달했는지가 궁금할 따름.

분명 다른 모험가 틈에 섞여 어영부영 따라 들어온 거겠지.

“...너희한테 낭비할 시간이 아깝다.”

역회전. 공격 일변도로 전환. 자세를 낮춰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거리를 좁혀 숏소드의 간극을 파훼하며 그대로 발등을 내려찍어 자세를 무너뜨렸다.

사내가 상체를 수그리며 고통스러워하자, 삽시간에 턱을 가격해 의식을 빼앗았다.

“셋.”

­스릉...!

“제, 제길...! 주, 죽어라앗!!!”

이내 마지막 남성이 나이프를 꺼내들고 육박해왔으나­

‘...둔해.’

나는 순간적으로 발에 검은 기운을 둘러 가속했고, 그대로 발끝을 차올렸다.

정강이를 제대로 적중당한 사내는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음을 유발하며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경고했지? 좋은 말로 할 때 가라고.”

“크흐흑... 씨, 씨발...! 너, 너 감히 우리를 건드렸겠다...! 이 암시장에서 문제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붉은 매 길드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뭐가 어떻게 되긴. 잘했다고 칭찬해 주겠지. 자.”

“그, 그게 뭔... 히익?!!”

품에서 꺼낸 길드패를 들이밀자 사내가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했다.

그가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이곳에...! 붉은 매 길드는 지금 사건을 조사하느라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대낮부터 한다는 짓거리가 이거냐? 잘들 한다 아주.”

“으으...”

“일 없으면 꺼져.”

“시, 실례했습니다!!!”

사내는 쓰러진 동료를 흔들어 깨우더니 발목을 덜렁거리며 허겁지겁 인파 너머로 달려나갔다.

...꼭 암행어사라도 된 심정이네.

“하여간... 어딜 가나 저런 새끼들이 있다니까...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두 여성을 돌아보았다.

보통 모험가라고 하면 폭력에 익숙할 테지만, 이 암시장에는 모험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엔 상품을 판매하러 온 상인뿐만 아니라 지형 조사를 목적으로 영주성이나 길드에서 파견 나온 비전투원도 간혹 존재하니까.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그녀들을 안심시키려는 찰나, 짙은 와인 색조의 후드 아래서 아름다운 음색이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모험가 님. 큰 은덕을 입었네요.”

“별것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다 잠깐 거든 게 전부인데요 뭐.. 괜한 참견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참견이라니요. 몹시 곤란하던 차에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방금 꺼내드신 건... 도란님은 혹시 붉은 매 길드 소속이신가요?”

응? 내가 방금 이름을 말했던가?

“...아니요. 저는 붉은 매 길드 관계자가 아닙니다. 이건 잠시 양도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뿐이에요. 나중에 때가 되면 반납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에이 아쉽다.”

“네...?”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언사를 듣고 있자니 왠지 모를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쩐지 목소리도 좀 들어 본 듯한...

“나야 나. 벌써 잊은 거야 도란? 그렇다면 조금 섭섭한데...”

“자, 잠깐...! 혹시...”

눈앞에 여자가 우아하게 후드를 젖히자 달금한 체취가 풍겨왔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오뚝한 콧날, 단발 레이어드 스타일의 다홍빛 머리칼은 자칫 차가운 인상을 줄 수 있었으나 실상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

“아, 아델 누나?! 아, 아니...! 아델 님이 왜 여기에...!”

“누나라... 누나... 후후.. 그 호칭도 괜찮은데? 한 번 더 불러줄래?”

“마, 말실수에요! ...그러면 옆에 계신 분은...”

“짜잔~! 잘 지냈어 소년?”

해바라기처럼 해맑게 웃는 표범 귀 수인 소녀가 반갑게 인사해왔다.

*

“그러니까... 두 분이 직접 일반인으로 위장해 잠입 수사를 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래, 너도 트라함한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들었지?”

“네... 원인불명의 이유로 다섯 명이 사망하고 둘이 혼수상태라고...”

“틀렸어 소년! 어제부로 시체 네 구가 더 발견됐거든! 기절한 사람도 늘었어!”

“그런...”

나지막이 침음했다. 설마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을 줄이야. 그동안은 계속 라디와 함께 숙소에만 틀어박힌 탓에 외부 소식을 접할 일이 없었으니...

“힘드시겠어요... 안 그래도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괜찮아. 조금 성가신 건 사실이지만, 이 정도는 힘든 일 축에도 안 끼거든. 더한 일도 자주 겪었으니까.”

“달관하셨네요...”

역시 연륜 덕뿐인가? 내 또래 외모랑은 달리 실제 나이는...

“도란.”

“네, 네?!”

“지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나이라던가...”

“그, 그럴 리가요...!! 하하...”

‘히이이이익...!’

너스레를 떨며 진땀을 훔쳤다. 하마터면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 설마 생각을 읽힐 줄이야.

“흐음... 그래도 제법 멋졌어. 누군가가 날 위해 이렇게 나서 준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 안 그래 니아?”

“응! 조금 느리긴 해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이었어! 보통 검사라 하면 체술을 게을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년은 다재다능하구나? 근데 마지막 건 뭐야?”

“마지막 거라뇨?”

“아까 발에 둘렀던 검은 기운 말이야! 마력도 아니고 권능도 아닌데 뭐지? 그런 건 처음 봤어!”

“그냥... 제 고유 능력 같은 겁니다.”

그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나.

아니, 그럼 처음부터 위기고 뭐고 아니었단 거잖아.

...설마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건 웃음을 참고 있는 거였나.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불현듯 섬뜩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저 아델 님...?”

“왜 도란?”

“만약 아까 제가 붉은 매 길드의 단원이 맞다고 대답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어요?”

“아, 그거?”

아델은 상냥한 미소를 피어올리더니­

“사칭 행위에 책임을 물어 변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빚을 물릴 생각이었어. 하지만 네가 정말로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사실이 되는 거니까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질 테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입단을 종용하는 거지.”

“.....”

무서워!!!

어쩌면 붉은 매 길드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아델이 아닐까?

턱을 덜덜 떨고 있자니 그녀가 살갑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우리가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입단시킬 리 없잖아. 그랬다간 큰 원망을 살뿐더러 능률도 안 나올 테니까. 라디도 우리를 싫어하게 될 테고.”

“그... 렇죠?”

그런 것치곤 눈이 꽤 진심이셨는데.

난처하게 뺨을 긁적이며 입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자니 방글방글 미소짓던 니아가 돌연 눈살을 찌푸리며 내 앞에 섰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네, 네...! 니아 님... 대체 무슨 일로....”

­꿀꺽...!

긴장을 머금은 채 뒷말을 기다리자...

“네 무기! 그 새까만 단검 왜 돌려받으러 안 와? 언제든 돌려주려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는 네 무기가 소중하지도 않아?!”

아 그거...

“...직접 보여드릴게요.”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뒤 손아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슈화아아악!!!

짧은 공백 이후, 검은 아지랑이와 함께 단도가 나타나자 니아가 동그랗게 입을 말며 감탄했다.

“오오... 주인에게 돌아오는 무기였구나... 그래서 되찾으러 안 온 거야?”

“네... 혹시나 폐를 끼쳤다면 죄송해요.”

“아냐~! 사과할 필요 없어!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했는걸? 신기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델... 아델 님?”

“.....응? 불렀어 도란?”

“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냥...”

아델은 보기 드물게 말을 흐리더니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 검은 기운... 어쩐지 조금...”

“...이 능력을 아시나요?”

“....잘 모르겠어. 처음 보는 능력은 확실한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든단 말이지... 조심해 도란. 좋은 느낌은 아니야.”

“아니스 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희귀하다는 게 꼭 이롭기만 한 건 아니니까. 아마 옛 문헌에서 비슷한 능력을 봤을지도 모르겠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찾아서 알려줄게. ...그래서, 도란 넌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거야?”

“아... 잠시 바람 쐴 겸 나왔어요. 겸사겸사 암시장 구경도 하고요. 라디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숙소에 남아있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델이 유려한 손동작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심했다. 그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맴도는 건 기분 탓일까. 왠지 땡잡았다 하는 눈빛인데...

“...도란, 괜찮다면 부탁 하나 할 수 있을까?”

“네? 아, 네네 말씀하세요. 아델 님의 부탁이면 뭐든지...”

“고마워. 사실 거창한 건 아니고 마침 내가 해야 할 업무가 좀 많아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그래서 오늘 하루만 대타를 뛰어 줄 수 있을까?”

“대타? 정확히는 뭘 하면 되는 건데요?”

“별거 아니야. 그냥 여기 있는 니아랑 같이 시장을 돌아다니기만 하면 돼. 자세한 건 얘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앞으로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해. 물론 보수도 지급할 거야. 자 받아.”

“네? 그건...”

­짤랑!

“허억...!”

아델이 내민 금화를 받아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때, 할 수 있겠지?”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완벽하게 해내 보이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정말로 바빠서 이만 가볼게! 화이팅! 도중에 도망치면 안 된다?”

“....?”

아델이 후드를 푹 뒤집어쓰더니 서둘러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나는 금화를 움켜쥔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표범 소녀와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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