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여흥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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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여흥 #8
“휴... 간신히 시간에 맞춰 왔네... 안 늦었겠지?”
“어디 보자... 5시에 시작이니까... 오늘은 무슨 공연이었지?”
“음... 아마 대전쟁을 재현한 연극이었을걸? 듣자 하니 여기 주연 배우가 연기를 그렇게 잘한다던데.”
“.....”
북적거리는 행렬에 섞여 개장 시간을 기다렸다.
풋살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서커스단의 텐트 앞에는 암시장 거리까지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고, 잔뜩 기대에 들뜬 사람과 목판을 목에 매고 돌아다니며 먹거리를 판매하는 장사꾼으로 넘쳐났다.
니아가 내 팔뚝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소년!! 저기 봐! 혼 래빗 고기야!! 맛있겠다...”
“공연 중에 먹으려고 빵이랑 쿠키 잔뜩 사 왔잖아요. 그리고 팔 아픕니다.”
“우음...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는데...”
“...그 작은 덩치에 대체 얼마나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 게다가 그렇게나 많이 드시면서 어떻게 마른 체형을 유지하시는 거예요?”
“응? 그야 나는 활동량이 많으니까! 그리고 평소엔 아델이 몸에 해롭다면서 군것질을 못 하게 하거든. 네 식비를 감당하느니 차라리 코끼리를 기르겠다고 하면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7계층에 있을 때 비슷한 걸 사냥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팔 빠지겠어요 니아 님.”
...과연, 아델이 없으니 이 기회에 마음껏 먹어두려는 심산인가.
그녀와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자니, 굳게 닫혔던 천막이 열리고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한 광대가 여럿 튀어나와 묘기를 선보였다.
잠자코 순번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활기차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악셀브 유랑단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매표원 역할을 맡은 니슨이라고 합니다! 두 분 모두 5시 대전쟁 연극 관람을 위해 찾아오신 게 맞습니까?”
“음... 사실 다른 용...”
“네! 일행은 성인 한 분이랑 어린이 손님 한 분 되시겠고! 요금은 각각 10페니와 6페니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제가 꼬마 숙녀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받으시죠!”
광대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당밀 사탕을 꺼내 니아에게 건넸다.
“저... 잠시 얘기 좀...”
“아, 괜찮습니다. 보호자님! 이건 저희 유랑단을 찾아와 주신 것에 대한 감사 표현이니까요! 추가 비용은 일절 받지 않습니다. 대신 이가 썩지 않게 꼬마 숙녀님은 공연이 끝나면 바로 양치질하러 가기로 이 광대랑 약속... 어어...?”
남자가 허리를 굽혀 니아의 후드 안쪽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입을 쩍 벌리고 얼어붙었다.
나는 재빨리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로 그에게 길드 패를 들이밀었다.
“붉은 매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페클이란 사내를 찾고 있는데 이 유랑단에 속한 사람이 맞습니까?”
남자는 얼굴에 칠한 분칠이 무색할 정도로 아연실색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옜...! 붉은 매 길드에서 이곳엔 무, 무슨 일로...! 설마 페클이 범죄라도 저지른 겁니까?! 저,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재고해주십시오! 그놈만큼 건실한 청년도 드물 겁니다!! 게다가 조금만 있으면 바로 연극을 시작하는데...”
“걱정 마세요.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잠시 수사에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려고 온 겁니다. 책임을 묻거나 연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다행이다...! 그, 그럼 지금이라도 상연을 일시 중단하고..”
“우음... 소년, 우리 연극 못 보는 거야?”
“.....”
니아가 슬픈 눈망울로 올려다봤기에 눈높이를 맞추고 다정하게 물었다.
“...연극 보고 싶어요?”
“응... 소년이랑 같이 보는 줄 알고 솔직히 기대했단 말야... 아델은 항상 바빠서 같이 안 놀아주고.. 일반 단원들은 날 어려워해서 피하다 보니까...”
“....걱정 마세요. 처음부터 같이 관람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공연이 끝나기까지 얼마나 걸리죠?”
“대, 대략 한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네, 그럼 두 자리 예매할게요.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장소가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예, 옛...! 좌석 상단에 칸막이가 세워진 로얄 커플석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자리마다 차등 제도가 있긴 하지만 의자가 조금 더 푹신하거나 한 정도라... 그, 근데 그런 장소에서 단둘이 대체 뭘 하려고...”
“.....”
“크흠흠... 제, 제가 괜한 걸 물었나 봅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는 꿀꺽.. 목울대를 넘기고는 떨리는 손바닥으로 천막 안쪽을 가리켰다. 필사적으로 자제하고는 있지만, 힐끔힐끔 나와 니아를 곁눈질하는 시선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여실하게 전해져왔다.
‘...이건 완벽하게 오해했네.’
단단히 확신한 눈빛.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떠들어봐도 소귀에 경 읽는 꼴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빼곡하게 늘어선 행렬을 프리패스로 지나쳐 천막 입구에 도달하자 등 뒤에서 의아한 시선이 무수하게 따라붙었지만, 그마저도 안쪽으로 들어서자 두꺼운 천에 가려졌다.
남자는 무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좌석 중에서도 제일 최상단으로 우릴 안내하더니 무척이나 고급스럽게 장식된 별개의 공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가 저희 공연장에서 가장 좋은 좌석입니다! 주변보다 한층 높은 곳에 위치해 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고, 여기 달린 커튼을 잡아당기시면 완전한 프라이버시가 제공되어 무대에서도 이쪽을 볼 수 없습니다.”
“...여기 좌석 옆에 달린 끈은 뭔데요?”
“아, 그건 좌석 아래쪽의 종과 연결된 장치입니다. 끈을 쥐고 흔들어 신호를 보내주시면 저희 측의 시종이 온수와 가운을 들고 올라올 겁니다.”
“.....”
아니 그런 게 왜 여기 있는데.
의문을 품고 나서야 떠올렸다. 중세에는 연극 배우가 공연 후에 매춘을 겸하는 경우가 상당히 흔했다는 걸.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하이랭커나 귀족은 첩을 거느리고 다니는 경우가 잦으니 그런 고객을 위해 마련한 별개의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요금은 얼마죠?”
“아, 비용은 일절 받지 않습니다.”
“네...? 돈을 안 받겠다고요?”
“공무를 위한 일이니까요! 붉은 매 길드에서 암시장의 치안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고 계신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악셀브 유랑단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넷! 그럼 미천한 광대는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페클을 이곳으로 불러올 테니 편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
대형 길드의 일원이라는 거... 생각보다 훨씬 편리한 게 아닐까.
붉은 매 길드에 들어오라던 제안을 진지하게 재검토하던 중, 니아가 좌석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우와... 소년! 여기 엄청 푹신푹신해!! 안에 플러피 구스 깃털이 들어갔나 봐! 좋은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세탁도 열심히 한 모양이구... 근데 뒤에 침대는 왜 있는 걸까? 공연장에서 잠을 자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다, 그치?”
니아를 이런 곳에 데려왔다는 걸 알면 아델이 날 죽이려 들지 않을까.
“..느긋하게 쉬다 가라고 그런 거예요. 니아 님도 업무 때문에 늘 바쁘시죠? 그러니 저랑 있을 때만이라도 편하게 있어주세요. 그 편이 저도....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소년! 정말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어? 같이 사냥하러 다니면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내가 원하는 거 다 하게 해줄게! 매일 세 시간씩 낮잠 제공에 원한다면 하루종일 내 숙소에서 뒹굴뒹굴해도 돼!”
“....고려해보겠습니다.”
자리에 착석하며 그녀가 앉기 편하도록 방석을 고쳐주었다. 이내 노점에서 꺼낸 꿀빵을 건네주자 니아는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한 입 크게 베어물고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꼭 동생이 한 명 더 생긴 느낌.
‘이럴 때 팝콘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응? 팝쿈? 팝쿈이 뭐야?”
“...들었어요?”
“응! 그게 뭔데?! 엄청 맛있을 것 같아!”
“..옥수수를 고온에 가열하면 새하얀 속 알갱이가 터져나오는 데 그걸 먹는 거예요. 기호에 따라 소금이나 설탕을 녹인 캐러멜을 둘러 먹기도 하고요. ...아예 안 드셔보셨어요?”
이곳에도 옥수수와 몹시 유사한 곡물이 있으니 한 번쯤은 먹어 봤을 법도 한데...
니아가 입에서 침이 흐를 기세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캐러멜을? 우와... 말만 들어도 엄청 맛있을 것 같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먹으러 가죠. 아니... 파는 데가 없으려나? 그럼 그냥 제가 직접 해드릴게요. 재료만 있으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정말?! 약속한 거다?!!”
“네, 대신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지루해도 얌전히 있어 주세요. 이제 잠시 후면 시작할 것 같으니까요.”
“응! 알았어!! 너무 좋아 헤헤...”
니아가 어깨를 기대오는 바람에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찰나, 무례를 범한 게 아닐까 걱정되어 식겁했지만, 행복한 듯 눈웃음짓는 그녀를 보니 괜찮은가 보다.
숙소에 남아있을 라디를 의식해 재빨리 거리를 벌리자 예고 없이 무대를 밝히던 조명이 꺼지고 암막이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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