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여흥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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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여흥 #9
관중의 술렁임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연단 중심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며 좀전에 봤던 광대가 화려한 특수 효과와 함께 등장해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 악셀브 유랑단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금일 5시 공연에서는 과거의 영광이자 치욕인 대전쟁 당시 영웅의 활약상을 재연한 연극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공연 도중에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특수 효과가 있을 수 있으니 노약자와 임산부 여러분은.... 이 던전에 계실 리 없겠지요!! 임신한 자기 아내를 던전에 데려오는 머저리가 어딨습니까?!!”
광대가 너스레를 떨자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개중에는 얼굴에 알딸딸한 취기가 오른 관객도 여럿 섞여있다. 분위기를 돋우고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인지 유랑단의 표식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문신을 귓불에 새긴 이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니아가 먹여주는 꿀 과자를 씹으며 속삭였다.
“저... 니아 님. 근데 저희가 볼 연극이 뭔지는 알고 계세요?”
“응? 당연하지! 대전쟁이라잖아. 혹시 소년은 대전쟁이 뭔지 몰라?”
“음... 대강 다섯 세기쯤 전에 발발한 전쟁이라고 들었는데... 종족을 불문하고 굉장히 큰 규모로 벌어졌던 전투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때 입은 피해 때문에 지금의 문명이 몇 계단이나 쇠락했을 정도라고.... 제가 산골 마을 출신이라 배운 게 별로 없거든요.”
“그래? 좋아! 그럼 내가 설명해줄게! 잠깐 이것만 마저 먹고...”
그녀가 손에 든 꿀빵을 행복하게 음미하는 사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겁게 드리웠던 암막이 젖혀지자 짦은 나레이션 이후 황폐해진 대지와 왕국이 짤막하게 비춰지고 드높게 솟은 고성을 배경으로 연극이 전개되었다.
니아가 무대 중앙에서 중후한 왕좌에 걸터앉은 사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남자 보여? 저 엄청나게 덩치 큰 사람!”
“네, 그림자가 드리워서 얼굴이 안 보이는데... 누구에요?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주시면...”
“저 남자가 마왕이야! 잘 보면 머리색이 검잖아! 저 인물이 신에게 반기를 들어서 벌어진 전쟁이 대전쟁이야. 아까 지나간 배경은 전부 저 사람이 멸망시킨 문명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마족을 싫어하는 거죠? 그때 악마들에게 입은 피해 때문에..”
“맞아! 근데 막상 저 인물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 순혈 악마란 설도 있고, 사실은 인간이란 설도 있고. 누구는 또 엘프였다고 하고. ...그리고 왕좌 주변에 저 사람들 보여?”
“네, 근데... 저 사람들은 마족이 아니네요?”
“응! 반란군에도 여러 종족이 가담했다고 해. 그 최측근 중에는 인간도 있고, 수인도 있었대! 그래서 그때 마왕을 도와줬다고 밝혀진 종족 중 몇몇은 아직도 차별을 받는 거야. 예를 들면 공직에 진출하지 못한다거나... 모험가 파티에서 따돌림을 받는다거나.”
니아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배우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은 단순히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는 것에 불과할 텐데도 그 호박색 눈동자에서는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보통 하이랭커는 성격이 개차반이라고 들었는데, 왜 내가 만나봤던 이들은 착한 사람이 더 많은 걸까.
‘...한데 저 배우는 왠지 니아와 분위기가 닮았네... 귀 모양이 살짝 다른 걸 보니 표범 수인은 아닌가?’
고운 금발이 드리운 니아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연극을 관람하고 있자니 배경이 바뀌어 폐허가 된 고성 속에서 깨어난 한 소년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었다.
니아가 그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아이 보여? 이제 저 애가 인류를 구원할 용사로 선택받을 거야! 거봐!!”
과연 그 말대로 무대 위쪽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조명과 함께 줄에 매달린 한 남성이 내려와 울림 있는 목소리로 대본을 읊었다.
“소년이여. 나는 빛과 생명을 다스리는 신, 베그디아라고 한단다. 지상에 현현한 마족들 때문에 정세가 몹시 어지럽구나. 나는 현세에 개입할 수 없는 몸이니 너에게 권능과 보구를 하사하도록 하겠다. 새롭게 탄생한 인류의 영웅이여 이 성검으로 악마를 무찌르도록...”
“...목소리가 좀 특이하네요?”
“마법으로 변조한 거야. 계속 봐!!”
“...안다로스 평원으로 떠나거라 영웅이여. 그곳에 너를 도울 이들이 있을 것이니. 그들을 깨우고 혼란에 빠진 왕국을 구원하거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거룩하신 신들의 왕, 베그디아시여.”
소년이 성검을 받아들자 도신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그는 그 검으로 인간들을 규합하고 빛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진두지휘하여 마왕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역경을 돌파하고, 깊은 동굴 속에 봉인된 천사를 깨워 불리한 전황을 단번에 뒤집을 때는 나조차 손에 땀을 쥘 정도.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고 용사가 마왕의 심장에 성검을 꽂아넣는 것으로 연극이 끝나자, 모든 배우가 무대 위로 튀어나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환하게 미소짓는 배우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엄청 흥미진진했네요... 갑자기 여기서 이런 수준의 연극을 관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스토리는 조금 진부했지만 연출이 화려해서 좋았고요.”
도중부터 몹시도 작위적인 전개로 흘러가거나 뜬금없이 선역을 맡은 귀족이 등장하는 둥 고개가 갸웃거리는 장면도 있긴 했으나, 아마 높은 분들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대충 짐작해 본다.
니아가 만면에 웃음을 피우고 내 팔뚝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나도! 소년이랑 같이 보니까 더 재밌다!! 연극은 정말~ 오랜만인데 같이 봐줘서 정말 고마워!! 난 어릴 때부터 친구들하고 놀 시간이 없었거든!”
“...천만에요. 저도 덕분에 즐거웠어요. 소품이나 특수 효과에도 공을 들인 게 느껴져서 눈도 호강했고요. ..아까 용사가 검을 휘둘렀을 때 막 불꽃이 뿜어나오던데 어떻게 한 건지 아세요? 그리고 팔 아파요.”
“아, 그거? 무대 뒤쪽에 있는 마법사가 대신 마법을 써 준 거야!! 마력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어!”
“그래요? 근데 마법사를 고용하기엔 몸값이 비싸서 수지타산이 안 맞을 텐데...”
턱을 짚으며 읊조리자 니아가 바로 보충해왔다.
“음... 꼭 그런 건 아니야! 소년이 봐왔던 마법사는 보통 정식으로 전투 교육을 마친 사람들이었지? 로브를 차려입고 모험가 길드에서 고상한 척은 다 하고 앉아있는 뺀질이들 말야! 근데 꼭 그런 사람 말고도 자력이나 교본으로 생활 마법을 습득한 마법사도 있어! 이런 경우 더 싸게 부릴 수 있고!”
“그건 몰랐네... 그럼 그 사람들은 보통 무슨 일을 하는데요?”
“음... 마법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뭐라 딱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어! 이렇게 공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대로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청결 마법을 걸어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왕도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데, 안 가봤구나?”
“네... 뭐...”
지금까지 내가 접했던 마법사들은 전부 하나같이 허세에 찌든 놈들밖에 없었으니까. ‘마나의 숭고함을 깨닫지 못한 우민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란 사고방식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는 머저리들 말이다. 해봤자 급소에 칼 맞으면 죽는 건 똑같으면서.
‘하긴... 진짜 실력 있는 마법사들은 노력 대비 수입이 확실한 대도시에서 활동하려고 들 테니까.’
베라스틴 같은 작은 도시에서 떵떵거리는 작자라면 분명 마법사 간의 경쟁에서 도태됐다는 거겠지.
이전에는 무섭게만 느껴지던 마법사의 존재가 갑자기 하찮게 느껴졌다.
“...근데 그럼 니아 님도 마법 쓸 수 있으세요? 어지간한 A랭크면 다들 마법 한두 개쯤은 익혀두고 있지 않나?”
“음... 나는 그런 어려운 거 못해! 대신 신체 강화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 샌님처럼 가만히 서서 주문을 읊느니 달려가서 한 대라도 더 패는 게 나아!”
“하긴...”
성미가 급한 이 여자라면 그게 더 적성에 맞겠지. 아무리 막사 근처라지만 무기도 안 들고 다니고 이전에도 내 체술을 눈여겨본 거로 보아 무투가 스타일이 아닐까 싶은데...
무대 위, 소품으로 쓰였던 세 쌍의 천사 날개로부터 떨어진 깃털을 기념품으로 챙겨 퇴장하는 관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페클이란 사람은 누구일까요? 틀림없이 아까 배우 중에 있었을 텐데.”
“움... 아마 주인공으로 나왔던 용사 소년이 아닐까? 성실해 보이는 이름이잖아! 안 그래?”
“저는 반란군에 가담했던 고양이 귀 소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남자 이름이니 그건 아닌가...?”
“그래? 그럼 내기할래?”
“내기요?”
“그래!! 내가 정답을 맞히면 소년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그럼 제가 맞히면요?”
“그땐 내가 뭐든지 들어줄게!!”
“....”
이 소녀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힐끗 시야 구석을 곁눈질했다. 우리의 바로 옆에는 푹신한 침대와 담요가 완비된 상태다. 심지어 커튼을 내리기만 하면 아무도 이곳을 엿볼 수 없다. 그러니 방금 발언은 상대가 야릇한 의미로 받아들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내게는 라디가 있으니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은 단 하나도 없지만.
아니, 그전에 니아에게 손을 댔다간 분명 맞아 죽을 거다. 붉은 매 길드 전투원이든 아니면 그녀 본인이든.
“뭐, 괜찮겠지... 좋아요. 대신 너무 무리한 부탁은... 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려던 찰나, 한 형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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