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여흥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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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여흥 #11
휘황한 달빛이 기울어진 대로를 질주했다.
암시장의 등유 랜턴이 자아내는 광채가 거친 호흡에 닿아 어그러지고, 행인의 불길한 소음이 귓바퀴에 헛돌았다.
트라함이 내게 전한 말.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다.
‘아델이 라디가 복어 부산물을 빼내 간 걸 눈치챘어.’
어쩌면 라디를 심문하러 들 수도 있다.
복잡한 인파에 어깨가 부딪히자 등 뒤에서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후드가 벗겨지자 새까만 흑발이 달밤 아래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옷깃이 땀에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내달렸고, 붉은 매 막사 길드에 도착하는 대로 무릎을 짚으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냇가 바위에 앉아 대궁을 손질하던 남성이 살갑게 인사해왔다.
“여! 꼬맹이 도란 아냐? 잘 지냈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허억... 헉.. 디, 디론님! 아델 님의 막사는 어디에...”
“음... 저쪽으로 가면 다홍색 천막이 있을 거야! 근데 날도 어두워졌는데 아델은 찾아서 뭐 하게? 게다가 도란 너 시장가에서 재밌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감사합니다!!!”
그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야영지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개인 막사가 모인 장소에 도달해 터질 듯한 심장을 채찍질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큼지막한 다홍색 텐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황급히 천을 젖히고 들어가자 아름다운 묘령의 여인이 집무 의자에 앉아 양피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델 님!!!”
“아, 왔어? 일단 여기 앉...”
“전부 오해에요!!!”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라디는 범인이 아니에요!! 제가 다 설명 드릴 수 있어요!! 니아 님과 탐문하며 전부 알아냈다고요!!!”
“자, 잠...!”
“우선 살인에 쓰인 독이 복어에서 추출했다는 것부터...!”
“가, 가까워 도란!!”
아델이 내 가슴팍을 조급하게 밀쳐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반쯤 그녀 위에 올라탄 자세였다는 걸 깨달았다.
살짝 뺨을 붉힌 아델이 쿡쿡 손짓하는 대로 바로 옆 좌석에 앉고는 곧바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 조금 놀라긴 했지만 무례랄 것까진... 그 반응을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네.”
“네, 하지만...! 아델 님이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도란, 조금만 진정해. 성급하게 굴지 않아도 전부 들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조금 여유를 가질 시간이 필요하겠네... 잠시 이대로 있어 줄래?”
아델은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 테이블이 놓인 구석으로 향했다.
이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홍차를 우릴 건데, 도란은 어떤 스타일이 좋아? 스트레이트? 블렌딩? 아니면 과일 청을 첨가한 가향차도 있어.”
“....전 아무거나 주는 대로 먹겠습니다.”
솔직히 라디가 걱정되어 그런 걸 따질 기분이 아니다.
아델은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더니 유려한 손놀림으로 홍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랐다.
그녀가 자리로 되돌아와 내 앞에 다과와 차를 놓아주며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야. 몰트 지방에서 재배한 아쌈 찻잎에 사과잼을 티스푼 하나 분량 넣은 거지. 은은하게 달아서 먹기 편할 거야. ...어때?”
“...맛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으이구 알았어.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지?”
“네... 독살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여럿 발견됐는데 라디가 절묘하게 말려들었다고...”
“그래, 우리도 수사에 관련된 내용은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입장이라 비밀리에 잠복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아침 수사망에 라디가 걸려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라고.. 나야 라디가 그럴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우리 길드원 중엔 아직 너희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잖아?”
“하지만...!”
“진정해 도란. 아직 얘기 다 안 끝났으니까. ...이걸 좀 봐볼래?”
“네? 이게 뭐예요...?”
아델이 건넨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전형적인 보고서의 양식을 따른 청서의 최상단에는 이러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크누트 길드 은 랭크 라디의 무죄 입증을 위한 보고서]
“이건...!”
상당히 어려운 용어가 혼재된 문서를 띄엄띄엄 읽어나가고 있자니 그녀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요약해주었다.
“처음에 라디가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건 사실이야. 복어 부산물에서 독을 추출하려고 한 건 여지없는 진실이니까. 하지만 내 사람 보는 눈이 틀렸을 리 없잖아? 그래서 나름대로 라디의 무죄를 증명할 방법을 찾아봤어. ...우선 여기 이 항목 보이지?”
아델이 고운 손가락으로 한 문단을 짚어주었다.
“내가 주목한 건 사체에 외상이 없다는 점이었어. 테트로도톡신을 강제로 주입했으면 자국이 남아. 라디의 경우 대못이나 단검의 자상 정도가 있겠지. 하지만 이러한 흔적이 없다는 건 독을 경구투여했다는 말인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독을 먹이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잖아?”
“그렇죠...”
불현듯 트라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총 다섯이 죽고 두 명이 혼수상태인데 아무런 접점도 없고 단서도 없어. 심지어 외상을 입은 흔적도 없고. 너희는 나흘 내내 감감무소식이었잖아. 나도 일하던 도중에 전해 듣고 혹시나 해서...’
“그래, 게다가 외상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저항한 흔적이 없다는 거야. 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그것도 암시장 전역에 분포한 무작위 대상에게 아무런 목격자 없이 독을 먹이는 게 가능할까? 도란, 넌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당연히 상대가 경계부터 할 테니까요.”
“그렇지, 만약 가능하다고 답했으면 당장 널 철창에 가둬야 했을 거야. 숙달된 암살자가 아닌 이상 그런 건 무리일 테니까. 그래서 이 암시장의 상인으로 범인을 한정할 수 있는 거고. 왜인지 알겠어?”
“먹거리를 파는 상인이라면 사람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권해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요...”
“맞아. 아직 약속한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네가 이곳에 와 있다는 건 트라함과 만났다는 거고,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결론에 이른 것 같네. 고생했어.”
“......”
이 여자는 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행동한 걸까.
다정하게 응시해오는 시선이 너무나 눈부셔 고개를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노점상은 체포하신 거예요?”
“그래, 좀전에 구속해서 신병을 확보해두고 있긴 한데 아직 문제가 남아있어.”
“문제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말을 이었다.
“지난 며칠간 피해자의 행적을 대조해 해당 점포에서 음식을 사 먹은 사람 중에 사상자가 나왔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어. 하지만 막상 가게 점주는 복어 식당 근처에 간 적도 없다는 거야.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그래서 배달책으로 활동한 공범이 없나 조사해보고 있기는 한데... 이거 좀 봐볼래?”
아델이 눈앞에 놓인 보고서 중 하나를 집어 내게 보여주었다.
“어제 죽은 걸로 추정하는 변사체의 정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길드원 중 한 명이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사망 당시 행적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문제의 점포 근처로는 가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런 사례가 두 경우나 더 있고.”
“그런... 그럼 동일한 범죄 수법으로 사람을 헤치고 다니는 인물이 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도 우연히 같은 시기에...?”
“...일단은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어. 하지만 해당 점주의 지인을 전부 탐문해 봤는데 딱히 이렇다 할 소득이 없어서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야.”
아델이 고아한 눈썹을 찡그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칫하면 수사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니.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럼... 라디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다시 또 용의 선상에 오른다던가...”
“아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라디가 범인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내부에서 판단 중이거든. 게다가 그 아이가 추출한 테트로도톡신 원액을 우리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약속한 덕분에 수사에도 새 활로가 열릴 예정이고. 하지만... 그래,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할 수 없는 건 사실이야.”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겠습니까.”
“응, 있어.”
“....!”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아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준 약도는 아직 잘 가지고 있지? 그거 잠깐 펼쳐볼래?”
“네, 네... 잠시만요.. 여기 안쪽에...”
품에서 곱게 접힌 쪽지를 펼치자 오밀조밀하게 묘사된 3계층이 눈에 들어왔다.
아델이 그중 암시장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장소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눈꽃 호수라고 불리는 이 던전의 명물 중 하나야. 여기가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아직 안 가봤지? 연인이랑 산책하기 딱 좋대. 물도 맑고, 예쁜 물고기도 많고... 그래서 제안 하나 할게 도란.”
“....”
“너희의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잠시 암시장을 떠나 있는 건 어때? 3계층 관광도 할 겸.”
“그건... 괜찮은 거예요?”
“물론이지. 만약 너희가 떠나 있는 사이 범행이 추가로 이루어지면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라디에게도 이미 말해뒀고, 혹시 텐트가 필요하면 내 창고에 남는 여분이 있으니까 가져가. 이제 얼마 후면 지상으로 올라가잖아. 둘이서 추억 하나쯤은 더 만들어 둬야지.”
“....”
목이 메었다.
혼연한 어조로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유심히 바라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정도의 눈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필시 며칠간 바빠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리라. 그런 와중에 우리를 챙겨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깃펜 잉크가 번져 거뭇한 얼룩이 묻은 손가락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설마 오늘 저에게 니아 님과의 동행을 맡겼던 것도 전부 이 보고서를 만들려고 한 거였어요...?”
“응, 맞아. 오늘 아침에 라디가 복어 소재를 가져갔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더라고. 서둘러서 자료를 정리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럼 그걸 저희한테 말하지 않았던 것도...”
“너희가 마음고생 할 게 뻔히 보이니까. 라디는 본인 때문에 너까지 말려들었다고 자책할 테고. 내가 말했지? 오늘 넌 니아랑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어려운 건 어른이 할 테니까 이런 일은 이 누나한테 맡기면 돼.”
“아델 님이 저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신 건...”
“나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아끼는 동생들을 잃기는 싫으니까... 라고 하면 대답이 될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거예요...? 제가 보답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
아델은 자세를 고쳐앉더니 내 손등을 다정하게 감싸며 진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건 부끄러우니까 남들한텐 비밀인데... 솔직히 너희 얘기를 들었을 때 나 좀 감동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다니.. 아무리 담력이 센 사람도 그런 건 못해. 널 보니까 예전에 마물로부터 날 지키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내가 지켜주고 싶었어.”
다행이야 도란.
“누나...”
나는 참지 못하고 아델을 끌어안았다.
목구멍 안쪽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숨길 새도 없이 두 팔에 온 힘을 실어 그녀를 껴안았다.
“누나...! 진짜 정말 고마워요..!! 진짜... 진짜 제가 더 잘할게요!! 진짜... 완전 좋아해요!! 아델 누나!”
“자, 잠깐...! 도란?! 너, 너무 가까.... 그보다 닿...!”
“누나 진짜... 혹시 바라는 것 없으세요? 진짜 누나를 도울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요! 고마워요!! 정말... 아델 님은 저희의 은인...”
휘잉...
“.....?”
찰나, 등 뒤 막사 입구 쪽에서 찬 바람이 붙어왔다.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ㅡ
““......””
호박색과 푸른색.
두 수인 꼬맹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나와 아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큰일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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