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여흥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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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여흥 #12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전운이 감도는 마을처럼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고, 어색한 기류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델을 껴안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자니 니아가 슬금슬금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내 조곤한 목소리로 좌중에 폭탄을 내던졌다.
“움... 소년은 아델을 노리고 있던 거야?”
반사적으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어떻게 아델 님을...!”
“그럼 왜 둘이 껴안고 있어?”
“허억?!!”
황급히 손을 놓고 물러나자 라디가 천막을 놓고 한 걸음 다가왔다.
이어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입가를 달싹였다.
“아델 님...? 방금 무얼...”
“오, 오해야 라디야!! 나는 그저 가만히...”
“...그런 것치곤 아델 님도 꽤 즐기시는 것 같았는데..”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로 싫었으면 내치셨을 거잖아요.”
“.....”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아델의 막사 안에 드리웠다.
하필이면 조금 전까지 전력으로 질주해 이곳까지 도달한 상황. 상기된 뺨과 고르지 못한 호흡 덕에 오해할 소지는 차고도 넘친다.
이래선 바람을 피우던 도중 현행범으로 덜미가 붙잡힌 남편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눈동자만 굴리고 있자니 니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능청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쿡 찔렀다.
“있자나~ 도란은 아델이 좋아?”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겐 애인이 있다고요! 니아 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바로 저기에!!”
“하지만 방금 전에 소년이 자기 입으로 말했는걸? 아델 누나 완전 좋아~!! 라고.”
“그, 그건...! 추, 추임새 같은 거죠! 어디까지나 은인으로써...”
“그럼 좋아한다고 인정한 거네?!”
“아니 그야 좋냐 싫으냐 물으면 당연히 좋지만...”
난연해진 아델과 무표정한 라디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대답하자 이번엔 라디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아델을 추궁했다.
“저... 아델 님?”
“으, 으응 라디야...! 왜, 왜?”
“아까는 도란 오빠를 노릴 생각이 없다고... 저희의 사랑을 응원하신다고 말씀하셨으면서...”
“바, 방금 건 불가항력이었어! 너도 봤잖아! 방금 도, 도란이 먼저 덮... 아, 아니 나도 잘못이 있긴 했지만...!”
“손 위로 뻗는 거 다 봤어요.”
“....”
“눈 살짝 감는 것도요.”
아델이 당황하며 입매를 굳히자 니아가 능글맞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있자나~ 소년, 아델은 공략하기 어려워~ 쟤 보기랑 달리 완전 숙맥이거든! 근데 사실 알고 보면 되게 순정파란 말야~? 소년이랑 한 번 자고 나면 평생 너만 사랑하면서 내조할걸?”
“야, 야!! 니아!!!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왜? 맞잖아. 틀려~?”
“아, 아니...! 그야...!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그럼 소년 잠깐 귀 좀 대봐!”
니아가 내 팔뚝을 끌어안으며 까치발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우리 길드 들어오면 아델의 처음을 선물로 줄게.”
“야!! 니아 너!!!”
“왜~? 아델 네가 저번에 나한테 술 먹고 그랬잖아. 자기는~ 막 남자들이 너무 어려워해서 다가오질 않는다고~ 막 외롭다면서 잔뜩 취해가지고 어디 도란 같은...”
“야!!!”
아델이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 니아의 입을 틀어막고자 했으나 라디가 한발 빨랐다.
녀석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반응속도로 아델의 팔목을 잡아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델 님? 그렇다면 그냥 아까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아니, 아니...! 라디야!!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요?”
“아니...!! 그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만.... 도란! 빨리 설명 좀 해!!”
아델이 다급한 눈길로 구조를 요청해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라디야, 방금 전 상황은...”
“입 다물어요.”
깨갱!
라디의 입술에서 서늘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란님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다른 여자에게 손대기 전에 저한테 언질 한 번쯤은 해주셔도 괜찮았잖아요.”
...알고 있었다니?
“....미안해, 하지만 방금 전 상황은 진짜 오해...”
“도란님이 니아 님과 유랑단 커플석에서 외설 행위를 했다는 소문이 시장에 자자해요. 여기까지 오면서 백 번은 넘게 들었을걸요?”
“응! 만져주고 기분 좋았어!”
“무, 무슨! 게다가 니아 님!! 거기선 부정해야죠!!!”
“잠깐...! 유랑단 커플석? 그 침대 있는 곳?! 도란! 너 니아를 데리고 그런 델 갔어?!!”
“응! 소년이 친절하게 앉혀주고 이것저것 해줬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여주고, 다정하게 위로도 해주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무대 뒤쪽에서 만졌어!”
“귀!! 귀 말한 거예요!!!”
“....니아 님의 귀를 만졌어요 도란님? 수인의 귀를?”
“어, 어디까지나 탐문을 위한 거였어!!”
“탐문? 그 탐문이란 거 저도 한 번 꼭 해 보고 싶네요. 대체 뭘 알아내려고 그러시나... 니아 님의 몸을 탐문하는 것도 아닐 테고...”
“....”
위장이 뒤틀린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망연히 서 있자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일단 다들 꼼짝마!!”
아직 아닌가 보다.
“그.. 그... 다들 자리에 앉아!! 진정하고 우리 차분하게 대화를 해 보자!! 라디, 니아 님! 여기 앉으세요!! 아델 님도...”
“아델 님? 아까는 누나라고 불렀잖아요. 왜 갑자기 말이 바뀌었어요 도란님?”
“그, 그건 너, 너도 사건의 경위는 대충 알 거 아냐...?!”
“나도 누나라고 불러줘 소년!!”
“네, 제가 헛짓거리를 해서 하마터면 범죄자로 몰릴 뻔한 걸 아델 님이 온갖 노력을 다 들여서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이건 얘기가 좀 달라요. 도란님이 없을 때 저희끼리 나눈 이야기가 있다고요. 게다가 하루아침 만에 니아 님까지 참전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요.”
“나도! 나도 누나라고 불러줘!!”
“이, 일단 앉아서 차분하게 대화를 해 보자! 단 거! 단 거 없어요 아델 님?!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그, 그래! 자, 잠깐만 기다려 도란!”
아델이 허겁지겁 자리를 모면하더니 천막 구석의 티 테이블에서 다과와 간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쫄지에 라디의 시선을 정통으로 쐬게 된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손을 붙잡으며 종용했다.
“저... 라디야, 일단 침착하게 대화를 나눠보자.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응?”
“....흥!”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최악은 면한 걸까?
문제는 이 녀석이다.
“나도 누나라고 불러줘!!”
“...니아 님, 부디 체통을 지키시고 자리에 착석해주세요. ...제 옆자리 말고 정면에요.”
“왜 소년?! 아까는 계속 옆에 있었잖아! 그 커플석에서! 그때가 어둡고 좁아서 좋았는데... 서로 다정하게 쿠키를 먹여주기도 하고!”
움찔!
“그, 그건 주변 이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잖아요!! 쿠키는 그냥 드린 것뿐이고! 켕길 만한 짓은 하나도 안 했다고요!”
“움? 너 내 귀 만졌잖아.”
“그건 니아 님이 사람을 해치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였잖아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내쉬는 것과 동시에 강제로 그녀를 반대편 자리에 앉히자 아델이 절묘한 타이밍에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니아가 그중 고급스러운 포장재로 둘러싸인 양과자 세트를 집어들더니 눈을 반짝이며 읊조렸다.
“오오... 이거 하멜 산 양과자잖아? 이 귀한 걸... 평소에 내가 먹으려 하면 손도 못 대게 했으면서... 혹시 소년이 있다고 특별히 챙겨주는 거야 아델?”
“니아 넌 틈만 나면 죄다 집어먹으니까 그렇지!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게 엮으려는 모양인데...! 너 그러다간...!!”
“워워~ 진정해 아델! 소년 앞이라서 흥분한 건 알지마안~ 차분하게...”
“니아!!!”
아델이 일갈하는가 싶더니, 불현듯 눈가를 짚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집무 책상 위의 다 식어가던 홍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델~ 인상 쓰면 안 좋...”
“입 닥쳐.”
“....”
“하아... 진짜 내가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랑 절친이 됐는지...”
“히히... 아델이 최고야!”
“다물어. 그럼... 라디야, 이제 잠시 해명할 기회를 줬으면 하는데...”
“좋아요. 하지만 앞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
모두가 불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도란은 나가 있어.”””
“.....”
*
“제기랄...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길레...”
어두컴컴한 야음이 늘어진 야영지를 배회했다. 진한 어스름 속을 초조하게 겉돌며 시간을 죽였다. 매서운 추위에 피어오른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고, 발끝에 걷어차인 돌부리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대화를 엿들으려는 시도를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었으나, 귀신같이 감이 좋은 그 세 명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릴없이 빈 공터를 맴돌며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발광 이끼의 푸른 광채가 제일 강렬해지는 한밤중에 다다랐다.
나무 둥치에 앉아 아델의 막사에서 새어나오는 따스한 불빛을 응시하고 있자니 돌연 천이 젖혀지고 한 여성이 걸어나왔다.
“아, 아델 님...! 끝나신 건가요?! 대화는 어떻게...”
“...뭐야, 너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세 시간은 넘게 얘기한 것... 세상에...! 몸이 엄청 차갑잖아!! 괜찮아?!”
아델이 내 팔뚝을 만져보고 호들갑을 떨더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사양하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안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음... 그건 말이지... 일단 좀 걸을까?”
아델과 함께 막사를 거닐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야영지는 썩 아름다웠다.
천막 외부에 내걸린 마석등이 보석처럼 형형한 불꽃을 자아내 발밑을 비추었고, 곳곳에서 푸른 물포나비가 몰려와 밤하늘을 파르스름하게 수놓았다. 곳곳에서 나부끼는 홍색 깃발은 고양감을 고취시킨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텐데.
조금 더 걷다 보니 붉은 매 막사에 방문하고 첫날 라디와 함께 발을 담갔던 시냇가에 다다랐다.
그녀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아 반짝이는 물살을 응시하던 중, 다소 거북하게 입을 다물고 있자니 옆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랑 니아는 조금 더 할 얘기가 있데.”
“네...? 그렇다면 말려야 하는 건....”
“괜찮아. 그 둘이라면 별일 없을 테니까. 처음에만 좀 어색했지 나중에는 괜찮은 분위기였고.”
“그... 혹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여쭈어봐도 괜찮을까요?”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아델이 검지로 내 코를 쿡 밀더니 단정하게 머리칼을 정돈하며 말했다.
“괜찮아. 적어도 네가 걱정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야. 라디가 보기보다도 훨씬 어른스럽더라고. 어떤 면으로는 나보다도 더. ...그래도 한동안은 잘 달래줘.”
“네...”
당장 눈앞의 범인을 쫓기에 급급해서 라디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타인의 입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마지막엔 당사자의 면전에서 그런 장면까지 보여버렸으니.
나는 아직도 정말 미숙하구나.
흘러가는 시냇물을 응시하며 마음속 죄책감을 마주하고 있자니 아델이 문뜩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니아는 대체 어떻게 길들인 거야? 우리 단원 중에서도 아실리아랑 나 말고는 아무도 통제 못 하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거든.”
“네? 그냥 얌전히 있던데요...?”
“....저 기지배도 여자라고. ...너 그리고 혹시 쟤한테 뭐 약속한 거 있어?”
“음... 아, 캐러멜 팝콘 만들어주기로 약속했어요.”
“캐러멜 팝콘? 그게 뭔데?”
“옥수수 곡물을 고온에 가열하면 속의 낱알이 터져 나오는데 거기에다가 설탕물을 두른 거예요.”
“....그 외에는?”
“그것 말고는 딱히... 아, 내기에서 져서 원하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어요.”
“하... 역시나... 그래서 그렇게 기고만장했네....”
아델이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읊조렸다.
나는 그녀의 다홍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요? 그래봤자 어린이 아니에요? 고작 소원이라고 해봤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거나 재밌는 델 놀러 가고 싶다거나...”
“뭐, 어린이? 제길... 너 겉모습만 보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아델이 보기 드물게 냉소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쟤 마냥 그렇게 어리지만은 않아. 물론 우리 길드 전투원 중에선 최연소에다 하이랭커 치고도 젊은 편이지만, 그래도 너보단 연상이라고. 나이가 있는데 설마 아무것도 모르겠어?”
“네? 하지만... 평소 행동거지나 말투를 보면...”
“...그 불여우 같은 년.”
“네...?”
“쟨 워낙 천성이 밝아서 그냥 어려 보이는 거야. 앳된 외모도 한몫하고. 연애 경험은 없다지만 걔도 알 건 다 알걸? 너도 아까 들었잖아. 나한테 너랑 하룻밤 자면... 흠흠... 아무튼 그래. 말투가 유아틱한 건 외국인이라 그런 거고.”
“그럴 수가...”
...그럼 설마 공연장에서 침대를 보고 했던 말도... 다 날 떠보는 거였어?
혹시라도 그때 내가 흑심을 품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온몸의 뼈란 뼈는 죄다 부러져 있지 않았을까.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 부르르 떨고 있자니 문뜩 한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잠깐... 근데 외국인이라니요?”
“몰랐어? 쟤 제국 출신이야. 그쪽은 칼른베니아어를 쓰니까 우리 말이 유창하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아니, 근데 또 웃긴 게 처음 말을 익힐 때 은둔 기인 같은 사람한테 배웠다나 봐. 그래서 진짜 말투 들어보면 되게 할아버지 같아.”
“아 그거... 어쩐지...”
“...뭐야, 짚이는 게 있다는 표정인데?”
“네... 사람들을 탐문할 때 잠깐...”
“그래? 진짜 별일이네. 걔 그거 콤플렉스라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로 안 꺼내는데. 내가 보기엔 어린애처럼 혀 짧게 말하는 것도 다 연기야. 그러면 상인들이 껌벅 죽어서 공짜로 덤을 마구 퍼주거든. 하려면 언제든지 침착하게 말할 수 있을걸? 영악한 놈이지.”
능구렁이 같은 년 이라고 중얼거린 아델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어떤 소원을 빌지는 모르겠지만 각오쯤은 해둬. 내일부터 라디도 잘 좀 챙겨주고. 오늘은 우리 셋이서 같이 자게 될 것 같으니까.”
“네...?”
“그렇게 됐어.”
“.....”
오늘 밤, 나는 터벅터벅 혼자서 텐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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