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여흥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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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여흥 #13
“....챙길 건 다 챙겼나? 담요랑 물수건이 어디 있더라...”
“수통에 물도 채웠고... 텐트도 있고...”
“이따가 먹을 점심도...”
“출발하죠.”
“넵!”
배낭을 짊어지고 어색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발목까지 자라난 잔디를 밟자 뜨거운 조광에 눈이 부신다.
암시장에 체류하고 약 2주라는 시간이 흐른 시점, 관광을 겸해 아델의 조언으로 3계층의 명물이라는 눈꽃 호수에 가보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다녀오려고 했으나ㅡ
“라디야, 혹시 힘들면 내가 짐 대신 들어 줄...”
“계속 걷기나 하세요.”
“넵.”
식은땀을 훔치며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침이 되자 라디는 숙소로 돌아왔다. 다만 여전히 꼬리털이 바짝 서 있고, 누가 봐도 '나 삐졌어요!' 라는 기운을 뿜뿜 내뿜는 중이다.
이럴 때 나도 말톤처럼 표정만 보고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아델의 약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음... 일단 여기서 동쪽으로 한 시간쯤 걸으면 작은 언덕이 나오는데 그 능선만 넘으면 바로 호수가 보인다네.. 근데 왜 눈꽃 호수일까? 이런 날씨에...”
“글쎄요. 어디 멍청한 설녀라도 빠져 죽었나 보죠.”
“.....”
내 옆에도 있다, 설녀.
오싹한 한기에 이를 덜덜 맞부딪히며 발길을 옮겼다. 설마 여행 내내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감내해야만 하는 걸까. 이러다간 정말로 도중에 호흡곤란이 와 버리는 건 아닐까.
녹슨 기계처럼 삐걱삐걱 걷고 있자니 웬 젊은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모험가님?”
“....네,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신가요. 저는 이름 없는 원예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희귀 품종의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던전을 헤매던 중,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을 보니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이렇게 염치 불문하고 말을 걸게 되었습니다.”
...잡상인인가.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렸겠지만, 지금은 딱 시기적절하게 잘 와 주었다.
나는 옆에 선 라디를 힐끗 곁눈질하고는 짐짓 헛기침하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거참 잘 됐군요! 마침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선물할 꽃이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장마 끝에 비치는 햇살만큼이나 아름답고, 하해만큼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진 제 연인에게 걸맞은 생화가 있을까요?”
“오호! 이거 참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군요! 그런 당신에게는 이 꽃다발을 추천드립니다! 햇볕이 쨍쨍하게 드는 들판에서만 자라는 히아신스를 다듬은 겁니다! 어떻습니까?”
“음... 이 꽃도 예쁘긴 하지만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담아내기엔 조금 모자라는군요! 혹시 이보다 더 러블리하고 럭셔리한 꽃이 있습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이토록 원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던전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네, 맞습니다! 가끔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할 줄 알아야죠! 그러면... 이 꽃이 적절하겠군요!”
사내가 등 뒤의 꽃바구니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꽃다발을 건넸다.
“자, 이 꽃다발 말할 것 같으면 희귀하기로 소문난 앵무부리꽃을 베이스로 백합과 안개꽃을 써 주변을 장식한 겁니다! 여성에게 선물하기에 이것만 한 것도 없죠!”
“오오... 정말 아름답군요! ....가격은 얼마죠?”
“으음... 마음만 같아선 공짜로 드리고 싶지만... 알다시피 저도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 에잇! 눈 감고 딱 2실링만 받겠습니다!”
“2실링이라...”
양아치 새끼.
화원에서 재배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들판에서 꺾은 꽃을 포장해 2실링이나 받고 팔다니. 날로 먹는데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인 상황. 평소엔 고려하지도 않았겠지만, 라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은화를 꺼내려던 찰나, 라디가 툭 내 손등을 쳐내고는 남자가 든 꽃다발을 들여다보며 읊조렸다.
“...이파리가 시들었네요?”
“네...? 손님 그게 무슨...”
“줄기에 힘이 없어요. 꺾은 지 적어도 최소 하루 이상 지났다는 건데... 여기 꽃봉오리 다섯 개는 아직 피지도 않았고 눈에 잘 안 띄는 아래쪽은 아예 다듬지도 않았네요? 심지어 조금 건드렸다고 흙덩이도 우수수 떨어지고... 여기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건 염료 가루인가요?”
“그, 그걸... 어떻게...”
“2실링은커녕 2페니도 아까워요. 살 생각 없으니 저리 꺼져요.”
“크윽...! 거의 다 넘어왔었는데...!!”
남자는 나와 라디를 흘겨보더니 욕지거리를 내뱉고 다른 모험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 불현듯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도란님.”
“으, 으응 라디야...! 뭐 필요한 거라도 있...”
“저 화났어요.”
“.....”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라디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나머지 네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지 못했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
“도란님.”
“.....”
라디가 팔짱을 끼고 말을 이어나갔다.
“도란님이 저 말고도 다른 여자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라디야.”
“알아요. 도란님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거. 하지만 어떡해요. 다른 여자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데. 멍청한 도란님은 수인이 눈앞에서 꼬리를 흔들어도 이게 유혹하는 건지 호의를 베푸는 건지도 모를 테고.”
“내가 정말 미...”
“끝까지 들으세요. ....그래서 저도 나름 각오는 했거든요? 언제까지나 영원히 도란님을 독차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살다 보면 도란님에겐 많은 조력자가 필요할 테고, 그 중엔 저처럼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제 이기심으로 도란님의 발목을 잡지 말자고 마음먹었는데... 마음먹었다고 해서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란 말이죠.”
“.....”
“게다가 도란님은 저랑 초야를 보낸 지 딱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아랫배의 통증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말도 없이 다른 여자랑 만나고 다니고... 서운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아시죠?”
“....”
천천히 등 뒤의 배낭을 내려놓았다.
무릎을 꿇고 라디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자 마음먹은 순간, 그녀는 고개를 저어 날 제지했다.
대신 슬며시 몸을 돌리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러니까 빨리 기분 풀어주세요.”
“라디야!!”
와락!!
“착각하지 마세요! 아직 용서한 거 아니니까...!”
“내가 진짜 진짜 더 잘할게!! 두 번 다시는 서운하지 않게 할게! 앞으로는 다른 여자랑 말도 안 섞을 테니까...”
“됐거든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이번에 가서 뭐 할지 궁리나 하세요. 놀러 나와서도 서먹하게 굴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라디야!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일단 계속 걸어요. 이대로 서 있기도 그러니까요.”
“그래!!”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아가던 도중 눈치를 보며 슬쩍 손을 맞잡았지만 라디는 거부하지 않았다.
다정하게 손깍지를 끼고 아이슬란드의 목초지를 연상시키는 평원을 활보하다 보니, 점차 완만한 언덕과 호수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작은 웅덩이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지평선에서 눈을 떼고 손에 쥔 약도를 들여다보며 읊조렸다.
“음... 여기선 저쪽으로 가야 하나? 딱히 이렇다 할 지형지물이 없어서 헛갈리네...”
“잠깐 줘봐요. ...아무래도 저 고개를 넘어야 하는 모양인데요? 저기 보세요. 사람들이 몰려있잖아요.”
“그런가 보네. 그래 저쪽으로 한 번 가보자.”
목표했던 눈꽃 호수에 근접하자 가벼운 옷차림을 한 관광객들이 띄엄띄엄 시작했다.
나와 라디는 사람이 유독 많이 몰려있는 능선을 향해 다가갔고, 인파를 헤치며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 라디야 저거 봐!!”
“...도착했나 보네요.”
눈꽃 호수.
발아래로 커다란 담수호가 자태를 드러냈다. 햇살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나는 수면은 사파이어처럼 반짝거렸고, 선명한 푸른빛 색상은 청량한 기운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단연코 돋보이는 건 잔잔한 물결을 수놓은 하얀 결정이었는데, 왜 이 호수가 눈꽃 호수라 불리는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는 광경이었다.
영상의 기온에도 녹지 않은 걸 보니 아마 수생식물 중 하나가 아닐까?
“...왜 눈꽃 호수라고 불리는지 알겠어요.”
“그러게, 3계층의 명물로 손꼽힐 만하네. 엄청 예쁘다... 근데 사람이 좀 많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번잡하네요... 그래도 저 멀리까지 가면 인적이 뜸해지는 것 같아요. 저 산림 옆이라던가...”
“그래, 조금 걷는 한이 있더라도 한적한 곳에다 텐트를 치자. 너도 그게 낫지?”
“네, 정했으면 빨리 움직이죠.”
나와 라디는 너나 할 것 없이 후드를 눌러쓰고 발길을 돌렸다. 호숫가 근처에는 상당한 인파만큼이나 각양각색의 모험가가 몰려있었다. 대규모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탓에 옷차림이나 장비 밸런스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모습.
혈기왕성한 사내들이 선보이는 차력쇼를 흘겨보고 있노라니 라디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빨리 가요. 또 잡상인이 들러붙기 전에.”
“그래.”
우리는 조금 더 걸어 호숫가의 초입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신속하게 텐트를 치고 걸터앉아 수통을 기울이자니 라디가 후드를 벗으며 읊조렸다.
“이제야 숨 좀 돌리겠네요. 그 많은 사람이 어디 갔나 했더니... 최근에 사건이 터지고 나서 암시장이 조금 뜸했잖아요.”
“그러게... 다들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 몰려와 있었네. 하긴, 어떻게 보면 이곳이 더 안전할 수도 있겠다.”
멀찌감치 북적거리는 인파를 바라보며 손아귀에 단도를 소환했다.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다듬은 뒤, 미리 챙겨온 명주실과 바늘로 간단한 낚싯대를 만들었다.
잔잔한 물결에 낚싯줄을 드리우자 라디가 기가 찬다는 듯이 쳐다봤다.
“왜?”
“그런 건 또 언제 준비하셨어요?”
“그야 물가에 왔으면 물고기를 잡아야지. 이걸로 뭐라도 낚으면 저녁이나 해 먹자. 하지만 그 전에...”
나뭇가지를 바위틈에 고정하고 텐트 안으로 돌아와 라디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우리 라디는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예뻐?”
“.....”
“응? 이렇게 피부도 곱고... 눈도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귀랑 꼬리도 엄청 깜찍하고... 심지어 사냥도 잘하고! 우리 라디는 못 하는 게 뭐야?”
“...오면서 곰곰이 궁리한 게 고작 그거에요?”
“궁리라니! 난 정말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그냥 내뱉은 것뿐인데? 우리 라디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
라디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날 돌아보았다. 이내 내 뒤통수를 가슴께에 끌어안더니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도란님.”
“응.”
“도란님은 제 어디가 좋아요?”
올 게 왔다.
“그야 전...”
“전부라고 말하면 오늘 하루 동안 도란님하고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에 의식하기 시작한 건 여자란 걸 깨닫고 나서부터였어. 그러니까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사소한 행동도 다르게 보이더라고. 다정하게 수통을 건네주거나.. 가끔 마주치면 눈웃음을 지어주거나...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내 머리칼을 보고 나서도 곁에 남아주었을 때 쌓여왔던 감정이 터진 것 같아.”
“...그럼 성격 말고 외모는요? 귀랑 꼬리라던가... 보통 사람들은 사낭 쥐 수인을 꺼리잖아요.”
“그럴 리가 있나. 너도 내 출신 알잖아. 진짜 귀여워. 네 그 꼬리랑 귀 모두. 잿빛 머리칼이나 오똑한 코도 엄청 예쁘고, 뺨의 문양이랑 빙하처럼 새파란 눈동자까지 전부 내 이상형이야.”
“...그러면 가슴은요? 니아 님이 저보다 가슴이 크잖아요. 게다가 엄청 귀엽고... 아델 언니는 키도 큰 데다가 스타일도 좋고 현명해서 같은 여자인 저조차 존경스러울 정도인데...”
“아냐, 내 눈엔 네가 훨씬 더 예뻐.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라서 그래. 직접 알게 해줄까?”
“네? 어떻게 하... 읍?!”
불시에 라디의 입술을 덮쳤다. 상냥하게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은근하게 체중을 실었다. 부드럽게 입안을 탐닉하며 한 손으로는 말캉한 꼬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여운이 남는 입맞춤 후, 천천히 고개를 들자 은빛 실이 이어졌다.
“...이제 좀 알겠어?”
“.....”
얼굴을 화끈 물들인 라디는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정말...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사랑하게 됐는지...”
“...방금 걸로 서운한 건 좀 풀렸어?”
“솔직히... 맘만 같아선 더 심술부리고 싶은데... 그렇게 바보같은 웃음을 봐 버리면 화가 사르르 풀려버리잖아요.”
“그래? 다행이네. 좋아해 라디야. 앞으로도 계속.”
“....”
끄덕.
나는 다시금 허리를 숙여 라디와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선선한 들바람이 호수를 간질였다.
*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심야 무렵,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휘황한 빛을 내뿜던 이끼는 진작에 저물었고, 짙은 어둠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호숫가에 남은 취광이라곤 평화롭게 흔들리는 물결 위 은근하게 빛을 머금은 눈꽃 뿐.
몸을 움직여 익숙한 온기를 찾았다.
“라디야... 자...?”
“.....”
‘...지금이 몇 시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라디를 보자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동시에 후회가 막심했다.
“젠장... 적당히 끊었어야 했는데..”
생활 리듬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이래선 내일도 엄청 피곤할 텐데.
바람이라도 쐬고자 천막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물가를 거닐며 광활한 호수를 바라보자 온갖 자연의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결에 스치는 수풀의 마찰음과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하게 울어대는 귀뚜라미와 인위적인 물소리...
잠깐.
‘물소리...?’
불시에 든 맹렬한 위화감에 바짝 귀를 기울이자 백색 소음 사이로 불규칙한 잡음이 들려왔다. 밧줄 따위가 스르륵 지면에 끌리는 소리와 첨벙첨벙 물 튀기는 소리. 한계까지 목청을 낮춘 남성들의 조급한 대화도 간간이 들려온다.
재빨리 수풀 뒤에 숨어 엿보자
“....저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기묘하게 움직이는 인영 수십 명.
뭔가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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