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46화 (146/375)

〈 146화 〉 여흥 #14

* * *

[146] 여흥 #14

“저건...”

첨벙거리는 물소리. 잔디 위를 스치는 그물망. 시꺼먼 음영 수십 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음을 틈타 꿈틀거리는 그 무리에선 원인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졌다.

재빨리 텐트로 돌아와 라디를 흔들어 깨웠다.

“라디야...! 라디야...!! 잠깐 일어나 봐!!”

“우음... 응... 도란...? 지금이 몇 시...”

“쉬잇... 목소리 낮춰...!”

“.....”

라디가 몸을 일으키는 즉시 쇠뇌를 팔목에 매달았다. 이어서 소리 없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볼트를 장전하고 나이프를 확인했다. 역시 노련한 모험가답게 판단 또한 신속한 모습.

그녀가 눈짓으로 물어와 작게 대답했다.

“수상한 무리가 있어.”

“수상한 무리요?”

라디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을 이끌고 거수자 무리를 목격했던 장소에 도달하자 푸른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좁혀지며 다분한 의혹이 서렸다.

“저건... 뭘 하는 걸까요...?”

“글세...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건 아니겠지.”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일부 강이나 저수지에선 귀족만 낚시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이곳은 던전. 누가 무슨 짓을 하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대부분 용납된다.

하지만 저 무리에게는 묘한 점이 하나 있다.

“왜 이런 야밤에 불도 안 켜고... 집어등을 켜는 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밤에 그물질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단순한 그물질이라면 저렇게 은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은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장소. 울창하게 돋아난 잡목림과 식생 탓에 주변 시선조차 잘 미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보초로 하여금 주변을 감시하게 할 정도로 신중한 저 움직임, 분명 뭔가 있다.

“...라디야, 잠깐 여기 있어 볼래? 내가 가까이서 한 번 확인해볼게.”

“같이 가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가세해야 할지도 모르니.”

“..그래, 알았어.”

라디와 함께 수풀 너머로 몸을 숨겼다. 로브 자락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했다. 달빛조차 외면한 심야의 호숫가, 우리는 숨소리도 죽인 채 조심조심 나뭇잎 쌓인 흙 위를 거닐었다.

이윽고 수런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와닿을 정도까지 다가갔을 무렵, 라디가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거 좀 이상해요.”

“...뭐가?”

“저기 사람들이 들고 있는 양동이... 역한 냄새가 나요. 꼭 생선 비린내 같은... 어쩌면 독극물일지도 모르겠어요.”

“독극물?”

“네. 독 특유의 톡 쏘는 냄새가... 바, 방금 봤어요?!”

라디가 목소리를 낮춘 채 호들갑을 떨며 전방을 손짓했다.

건장한 남성들이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 위로 검붉은 덩어리를 들이붓자 물고기들이 배를 까뒤집으며 둥둥 떠올랐다.

사내들이 그물로 기절한 물고기를 손쉽게 건져 올리는 모습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저거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

본디 독을 이용해 사냥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우리도 타린 약초를 이용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곤 했으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독은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그건 이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그걸 가장 잘 다루는 게 바로 내 옆에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하물며 이곳은 도심지 성곽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포악한 몬스터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세계. 독에 대한 규제 또한 제법 잘 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모자란 무력을 효율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귀중한 수단이니.

때로는 너무 효과가 뛰어나서 문제지만.

과거에 라디가 설명한 적이 있듯, 수렵을 할 때는 동물에게서 나온 단백질 계열의 독을 주로 사용한다. 그래야 불로 가열했을 때 쉽게 파괴되어 인체에 흡수되어도 별 탈이 없기 때문. 하지만 나는 열을 가해도 변질하지 않는 생물독을 알고 있다.

테트로도톡신.

“라디야, 나 방금 묘한 게 떠올랐는데 말이야...”

“...말씀하세요.”

“혹시... 복어 독을 써서 불법으로 포획한 물고기를 누군가가 먹게 되면... 중독 증세가 오지 않을까?”

유랑단의 배우 페클은 노점의 생선구이를 먹고 나서 증상이 왔다고 했다.

확신으로 변모한 추측을 입에 담자 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당연히 유통 과정에서 누가 악의적으로 독을 탔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첫 번째 단추부터 잘못되었을 줄은...”

“제길... 그렇게 된 거였구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지막 단서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그간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규합되어 구체적인 완성본을 그리는 모습을 경험하고 있자니 옆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가 너무 많은데... 저는 일단 물러나서 아델 언니한테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지금은 후퇴하는 게 좋겠어. 우리가 나선다고 일망타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몬스터라면 몰라도 사람을 상대할 때는 변수가 너무 많다. 개개인의 무장도 신경 써야 하고, 실력 편차가 큰 만큼 외견만으로는 강함을 가늠하기 어렵다.

혹, 마법사라도 섞여 있다면 압도적인 화력에 쪽도 못 쓰고 당할 수도 있을 터, 어두워서 시계가 제한되는 지금으로서는 원거리 공격에 대항하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저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게 아닌 이상 우리로서는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혹여나 나뭇가지를 밟지는 않을까 신중하게 뒷걸음질치며 텐트가 있는 장소로 되돌아왔다. 이곳에서 불법 천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서둘러서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어떤 말썽에 휘말릴지 모르는 노릇이니.

한데­

“...저 새끼들은 또 뭐야?”

“히힛...! 어떤 멍청이가 여기에 가방을 놔두고 갔네. 야, 빨리 주워 담아!”

“쉿.. 목소리 낮춰.”

“너나 조용히 해 인마!”

“....”

우리의 짐을 뒤지는 두 인영을 바라보며 라디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일단 무기는 쓰지 마세요.”

“그래.”

괜히 무고한 사람을 해쳤다간 그만큼 성가신 일이 없다. 도둑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위법 사항이 아니지만, 범행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손속에 신중함을 가할 필요가 있으니까.

아무리 봐도 눈앞의 녀석들에게서는 불순한 의도가 엿보였지만...

“저기요.”

“뭐, 뭐야!!”

“젠장!! 죽여!!!”

아니나 다를까 두 사내는 오해로 끝낼 기미가 없어 보였다.

“결국 이렇게 됐네... 라디야.”

“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뛰쳐나갔다. 상대는 둘. 발놀림으로 보아 E랭크에서 F급 정도 되겠지. 이 정도라면 굳이 무기를 쓰지 않아도 손쉽게 제압 가능하다.

­번쩍!

사내가 허리춤에서 대거를 뽑아들자 둔중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는 곧바로 괴성을 외치며 덤벼들었고, 나는 두 팔을 들어올려 공격에 대비했다.

들짐승의 송곳니를 연상시키는 은빛 대거가 치명적인 사선을 그리며 치달아왔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기다린 뒤 칼날이 육박하기 직전 허리를 젖혀 회피했다.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고 스쳐지나가는 즉시 훤히 드러난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자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동그라졌다.

­휘이이익!!

“어딜.”

대거를 든 사내에게서 눈을 떼기도 전, 사각에서 거무튀튀한 둔기가 쇄도했다. 저 육중한 질량에 얻어맞으면 뼈 한둘쯤은 확실히 부러질 터, 썩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상대가 나쁘다는 걸 제외하면.

­철컥! 철컥!

“크아악...!”

희미한 반사광이 밤공기를 가로지르더니 돌연 남자가 흙바닥 위에 고꾸라졌다. 놈의 왼쪽 발목과 어깨에는 익숙한 쇠붙이가 튀어나와 있었고, 볼트에 관절을 꿰뚫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부림치는 게 고작이었다.

재빨리 머리통을 걷어차 의식을 뺏은 후, 땅바닥에 엎어져 대거로 팔을 뻗는 사내의 손가락을 짓밟으며 읊조렸다.

“야.”

“히, 히익...!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선처를...!”

“남길 말은 없지?”

“제, 제발...”

머리채를 붙잡고 노려보자 놈이 눈물을 흘리며 싹싹 빌었다. 던전에서 같은 모험가를 해하려 들었다간 이유를 막론하고 중범죄로 처벌받는다. 어디 뒷배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잘해봐야 노예로 팔려가겠지.

기껏해야 남의 짐이나 뒤지는 시정잡배에게 연줄이 있을 리 만무하다.

되도록 원만하게 해결하려 했지만, 우리에게 날붙이를 들이댄 이상 이야기가 달라졌다.

차가운 얼굴로 놈을 내려다보며 처우를 결정하던 중, 라디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도란님.”

“그래, 알았어. 숨통은 끊지 않을 테니까...”

“그게 아니에요. 잘 들어보세요.”

“...?”

“물소리가 멎었어요.”

“...젠장.”

불길한 징조.

“부, 부탁할게요!! 제발 선처...!”

“닥쳐.”

사내의 목덜미를 내려쳐 기절시켰다. 재빨리 짐을 수습하고 자리를 뜰 준비를 하고 있자니 근처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젠슨, 토킨스 거기 있냐? 좀전에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화장실 간다고 사라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와.”

‘제기랄.’

라디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황급히 담요를 배낭에 쑤셔넣고 일어섰다. 의식을 잃은 두 남성을 방치하고 막 발을 올기려던 차, 강렬한 섬광이 점등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호숫가에 울려퍼졌다.

“여기 누군가 있다!!!”

“염병...!!”

“달려요 도란님!!!”

즉시 어두컴컴한 잡목림으로 뛰어들었다. 등유 랜턴을 켤 새도 없이 하늘에서 비쳐오는 어슴푸레한 달빛만을 의존해 나무 사이를 질주했다. 한밤의 숲속은 칠흑의 물살처럼 새까맸지만, 라디의 후각과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간신히 풀숲을 헤쳐나갔다.

하지만 안도할 수는 없다. 가면 갈수록 뒤편에서 비쳐오는 불빛이 점점 더 뚜렷해졌기에.

필사적으로 내달리던 중, 라디가 거칠게 내뱉었다.

“빠르게 추격해오고 있어요! 실력자가 섞여 있는 게 분명해요!!”

“제길!! 이럴 때 말톤이 있...”

“도란님!!!”

찰나ㅡ

라디가 내게 뛰어들었다. 녀석이 날 쓰러눕히기가 무섭게 새빨간 불꽃 하나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더니 거목이 그루터기째로 폭사했다.

팔뚝의 솜털이 그슬릴 정도의 후끈한 열기가 불어닥친 후, 산산조각 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활활 타오르는 나무줄기가 진로를 가로막았다.

어두컴컴했던 산림이 찰나에 붉은 기운으로 화해졌다.

­타닥..! 탁...

“대... 체.. 무슨...”

“으윽...”

골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느낌. 간신히 폭발에 직격하는 일은 면했지만, 충격파를 뒤집어쓴 탓에 도통 균형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

흐릿한 시야를 부여잡으며 비틀비틀 일어서자 지독한 이명 사이로 기름 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역시 마법사야. 용병을 고용하길 정말 잘했군.”

“어서 포위해!! 저놈이 젠슨을 죽였어!!”

“다들 서둘러!!”

뒤룩뒤룩하게 살찐 한 남성을 필두로 제각각 무기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중 마법사로 보이는 한 사내는 딱 봐도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전신에 빛나는 갑주를 장비하고 있었다.

저 둘이 방금 말한 용병이겠지.

배불뚝이 중년이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도망치려 한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목격자를 보고도 그냥 보내 줄 리가. 어디 융숭하게 대접 한 번 해볼까? 라일!”

“...예.”

갑주의 사내가 서서히 다가왔다. 투구 틈새로 비치는 흉흉한 시선엔 화마의 잔재가 일렁거려 잔혹한 성정이 엿보였다. 차가운 소음을 유발하며 검집에서 뽑혀 나온 바스타드 소드는 달빛과 화염을 반사해 오묘한 색채를 띠었고, 병장기가 으레 그러하듯 차가운 냉기를 물씬 내뿜었다.

‘젠장...’

휘청거리며 나무를 짚고 선 라디를 흘겨봤다. 퇴로가 막힌 이상 더는 물러날 수 없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방금처럼 따라잡히고 말 거다.

즉,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윽...

“호오...?”

“야, 저거 봐. 우리한테 맞서려는 모양인데?”

“고작 둘로? 크하핫!!”

천천히 호흡을 갈무리했다. 한 손엔 단도를, 다른 한 손엔 단검을 거머쥐자 좌중에 비웃음이 퍼져나갔다. 놈들에겐 발이 묶인 사냥감의 마지막 발악처럼 비쳤을 터.

중년 남성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쳤다.

“흐흐... 포기할 줄 모르는 애송이로군! 안타깝지만 네게 승산은 없다! 라일은 C랭크 중에서도 마나를 쓸 수 있는 최상급 용병이거든...! 자,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거기 모험가. 원한은 없지만 이만 퇴장해줘야겠어. 날 원망하지는 마. 세상은 원래 다 돈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흐흐... 저 계집은 꽤 쓸만해 보이는데? 노예로 팔면 쏠쏠하겠어.”

“여흥이다! 죽여라!!”

나와 갑주의 사내를 중심으로 작은 결투장이 만들어졌다. 다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엔 결투의 숭고함 따위는 전무했으며, 사자 우리 안에 던져진 토끼를 지켜보듯 무자비한 가학성이 번들거렸다.

내 패배를 추호도 의심치 않는 눈치.

곧 C랭크 사내가 내 정면으로 다가와 바스타드 소드를 높게 드리웠다.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치솟자 관중의 뜨거운 환호 또한 고조되었다. 이윽고 찰나의 검광이 번뜩이며 내 목 언저리에 내리그어진 순간­

­까앙!

“좆까.”

검날로 요격. 즉각 자세를 전환해 반격. 단검 밑동으로 검격을 흘려냄과 동시에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아닛..!”

그는 완숙한 모험가답게 즉각 후퇴하며 팔뚝을 휘둘러왔지만, 나는 허리를 숙여 흘려내고는 더욱 근접했다. 상대에게 거리를 내줘선 안 된다.

“제기랄...!”

­슈확!!

사내가 성급하게 칼을 내질렀다. 첨예한 날끝이 목덜미를 찢어발길 기세로 파고들어와 단검으로 빗겨냈다. 나는 청아한 검명음에 녹아들어 하단으로 쇄도했고, 놈의 빈틈을 유도했다.

그가 철제 각반으로 내 가슴팍을 후려갈겼으나, 이 또한 몸을 비틀어 회피하고 역수로 쥔 단도를 휘둘렀다.

­콰지지지직!!!!

“무슨...!”

“자, 잠깐...! 뭐가 저리 빨라?!”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는 철제 흉갑 파편이 풀잎 위를 나뒹글었다.

나는 놈을 똑바로 응시하며 사고했다.

‘C랭크라 했던가...’

....해볼 만한데?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