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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47화 (147/375)

〈 147화 〉 여흥 #15

* * *

[147] 여흥 #15

“자, 잠깐...! 뭐가 이상한데...?!”

“저 모험가.. 꽤 하는데... 괜찮을까?”

“에이 설마, 라일 씨가 지기야 하겠어.”

군중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져나간다. 무수한 눈동자가 전투의 행방을 쫓았다. 나는 그 시선에 호응이라도 하듯 기민한 몸놀림으로 화답했고, 첨예한 검격과 살갗을 타고 흩날리는 땀방울로 밤하늘을 수놓았다.

탐욕스러운 인상만큼이나 배가 튀어나온 중년 남성이 초조하게 소리쳤다.

“라일!! 뭐 하는 거야!! 빨리 그 새끼를 해치워!!!”

“치잇...!”

­카아아앙!!!

날과 날이 맞부딪힐 때마다 시뻘건 불똥이 튀어올랐다. 맑은 검명음이 울려퍼지며 숲속에 잔향을 남긴다. 거목을 집어삼키며 타오르는 불길이 한밤중의 산림을 밝게 비췄고, 열기 섞인 날숨이 전황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

“젠장... 이 자식이...!”

­투카아아앙!!!

섬화(?火).

불똥이 시야를 가린 순간, 상대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기민하게 사선에서 벗어나며 왼손의 단검을 내지른다. 용병은 곧바로 건틀릿을 들어올려 방어했지만, 나는 놈의 정강이를 걷어차 자세를 무너뜨린 뒤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단도를 꽂아넣었다.

칠흑의 칼날이 밤공기를 가르자 날카로운 파공성이 흘러나왔다.

­콰지지지지직!!!!

“크윽...!”

‘얕다.’

검은 궤적을 그리며 육박한 검날은 용병의 각반을 찢어발기는 데 그쳤다. 다리 한 짝 정도는 가져갈 심산이었는데.

아쉬움을 담아 입꼬리를 올리자 그가 이를 갈며 지껄였다.

“씨발...! 왜 이런 새끼가 여기에...!”

“....”

C랭크라...

원래 이렇게 약했던가?

불과 반년 전, 아니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C랭크란 까마득한 존재였다. 평범하게 살아오던 인간이 마나라는 생소한 자원을 다루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말로 이루어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나는 그들이 내 힘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괴물을 손쉽게 쓰러뜨리는 모습을 목도했고, 원철과도 같은 생명력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 또한 목격했다.

그런 존재와 지금 난 비등하게 겨루고 있다.

아니, 내가 조금 더 우세하다.

­투카가가강!!!

“으헉...!”

단검으로 철제 흉갑을 긋자 억척스러운 소음이 울려퍼졌다. 사내가 급박하게 장검을 휘둘러 날 떨쳐내고자 했으나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검술에는 상당한 묘리가 깃들어 있었지만, 속도만큼은 내가 확실히 우위.

더 빠르게. 더욱 신속하게 가속한다.

­콰르르르!!

“크으윽...!”

참격(??).

단도로 팔뚝을 긋자 건틀릿 사이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원래라면 팔이 절단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격. 이번엔 단순히 살점을 파헤치는 정도로 그쳤으나 놀랍지는 않다. 마나를 사용하는 적에게 단도의 예리함이 반감되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

하지만 과연 상대도 그럴까?

“네, 네놈...! 그 단검은 대체 뭐냐!! 어떻게 이 건틀릿을 그리 간단하게...!”

“라, 라일의 갑옷을 종잇장처럼 잘라버리다니..!”

“굉장한 실력자다..!!”

좌중에 동요가 번져나갔다.

한두 번이라면 요행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젠 아니다. 내 몸엔 아직 작은 생채기밖에 나지 않은 반면, 용병의 몸엔 굵직한 상흔이 점차 누적되어갔으니.

불안하게 흔들리며 전투의 추이를 지켜보는 눈동자에는 숲과 동화된 녹색 로브를 입고 두 자루 단검을 휘두르는 내 모습이 비쳐보였다.

‘꼭 무슨 자객이라도 된 것 같네.’

아마 적들의 시선에 나는 지금쯤 무시무시한 암살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젠장..! 다들 시간 좀 끌어줘!!!”

돌연 용병이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거칠게 팔을 내둘렀으나, 놈의 동료들은 주춤거리며 서로를 떠밀기에 바빴다.

“시발..!! 저 계집이라도 잡아!!!”

“크윽... 젠장!!!”

보다 못한 중년 남성이 소리치자 건장한 청년 네댓이 라디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전부 상정하고 있던 바, 순식간에 배후로 뒤돌아가 발목에 단도를 내리긋자 사내들은 힘줄이 잘려나가며 바닥에 안면을 처박았다.

“끄아아아악!!!”

“다리!! 내 다리가!!!”

“어윽..! 컥..”

“...그러게 날 무시하지 말았어야지.”

한밤의 숲속에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낚싯줄에 꿰인 지렁이처럼 흙 위를 뒹굴며 몸부림치는 인영들. 기어코 그중 한 명이 빠져나가 라디에게 접근했지만 나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대신 라디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저도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네요.”

­철컥!

미약한 파열음 이후, 천천히 허물어지는 남성의 미간에는 익숙한 대못이 박혀있었다.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이 적의 전의를 꺾었다.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동료들이 저렇게... 순식간에...”

“....”

하지만 그 잡음 사이로 미세한 불협화음이 들려왔으니­

“그래... 언제 오나 했다.”

­까드드드득!!!

용병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전신에 두르고 쇄도하자 신속하게 몸을 돌려 마주했다. 최고조까지 높게 치솟은 은검. 용수바람이 휘몰아치는 칼날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듯 흉악한 기운을 내두르고 있었으나­

“백은보(白??).”

찰나ㅡ

나는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지웠다.

­콰지직!!!!!

“크헉...! 어, 어떻게..!!”

“글쎄?”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배후에서 나타나 흉곽을 관통하자 사내는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가 증오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며 내뱉었다.

“윽...! 네, 네놈도.. 마나 사용자였나...! 너 같은 하이랭커가 왜 이런 곳에...”

“...마나고 자시고 F랭크인데?”

“크윽...! 모욕도 정도껏...!!”

“진짠데... 라디야.”

“네.”

그녀가 쇠뇌를 격발하자 수풀 너머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강철 볼트가 밤공기를 가르며 향한 방향에는 은밀하게 영창을 읊조리던 마법사가 있었고, 그의 목울대를 정확하게 관통하며 호흡을 틀어막았다.

­츠즈즈즈즛...!

“마, 마력 폭발이다!!”

“다들 도망...”

­콰아아아아앙!!!!!!!

더 이상 주문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마법사로부터 마나의 격류가 용솟음치며 거대한 마력 폭발이 일었다. 성난 불길이 밤하늘을 헤집으며 높게 치솟아 좌중을 덮친다.

공기를 뜨겁게 달군 열기가 후드를 젖히자 검은 머리칼이 세상에 드러났다.

악마의 상징과도 같은 저주의 증표가.

“아, 악마?!”

“어, 어째서 여기에 마족이...!”

“씨발!! 이 더러운 마귀의 사생아 새끼! 저놈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야!!”

“제, 제발... 목숨만은...”

“....”

얼마 만일까.

이런 반응을 보는 게.

그간 온화한 분위기에 익숙해지긴 했나 보다.

하지만 마냥 위축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 내가 아무렇지 않은 건 성장했다는 방증일까 아니면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백랑보(白??).”

“어, 어 뭐야 방금...!”

“사라졌다...?”

“방심하지 마!!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 커허헉?!!”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놈들의 그림자들 딛고 나타나 단도를 휘둘렀다. 한 합에 하나.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절삭. 두 손아귀의 송곳니로 숨통을 끊을 때마다 시뻘건 피보라가 솟구쳤다.

“도망쳐!!! 빨리 여기서 벗... 으아악!!!!!”

“제길 여기에 왜... 허윽...!!!”

“.....”

더 빠르게. 더 난폭하게. 급소를 벤다. 단검만으로는 모자라다. 나는 용병의 사체에서 장검을 뽑아들었고, 사선에 맥동하는 심장을 담았다.

은빛 궤적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피어난 꽃잎이 적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내가 열댓 명이 넘는 사내들의 목숨을 끊어놓을 때까지는 채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해 맥없이 주저앉아 있는 무리에게 다가서자 라디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 사람들은 남겨두죠, 도란님.”

“왜?”

“증인이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아... 그래, 그러자. 그편이 훨씬 낫겠네.”

시체에서 칼집을 찾아 검을 갈무리했다. 뺨에 흥건하게 튄 핏자국을 훔치며 전장을 내려다보자 무참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혈흔이 스멀스멀 부츠 밑창을 물들였다.

“으... 좀 징그럽긴 하네...”

“새삼스럽게요? 본인이 저질러 놓고선...”

“그건 맞지.”

덩어리를 이룬 육체들. 어두컴컴한 산림 곳곳에 잘려나간 손가락과 팔다리가 즐비했다. 사체의 안면이 끔찍한 공포로 일그러져 있다는 점도 한몫해서 꼭 공포 필름의 한 장면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조금 과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제 이걸 어쩐다?”

*

동이 트자 밝은 여명이 호숫가를 비추었다.

“...라디야 어때, 제법 괜찮지 않아?”

“음... 진짜 잘 어울리는데요? 이렇게 검은색으로 깔맞춤하고 나니 꼭 울시랑 닮은 것 같기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법사에게서 노획한 로브를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고급스러운 백색 기조가 들어갔고, 검은 천으로 제작되어 세련된 디자인. 특수 처리를 했는지 마력 폭발에도 올 하나 나가지 않았다.

아마 금화 하나쯤은 나가는 물건이 아니었을까.

원래는 용병의 갑주를 수리해서 입으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아 포기했다.

허리춤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어루만지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으음... 예상하긴 했지만... 좀 많이 거북하네.”

“...일부러 인적이 드문 장소로 골랐는데도 그러네요.”

“.....”

나와 라디 주변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관광객들로 득시글거렸다.

하기야,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등 뒤에는 두 눈 시퍼렇게 뜬 머리통과 사지가 포박된 남성들로 즐비했으니까.

사체들은 신원 확인을 위해 목을 잘라낸 뒤 숲속에 방치했다. 생존자 중 중년 남성을 비롯해 요직으로 판단되는 이들은 팔다리를 묶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감시하는 중이다.

근처를 지나가던 상인에게 은화를 쥐여주고 붉은 매 막사에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으니 곧 처리해줄 사람이 오겠지.

이따금씩 호기 어린 모험가들이 무기를 짊어지며 다가왔지만, 붉은 매 길드 패를 보여주자 곧바로 수긍하며 물러났다.

‘역시 이곳에선 이만한 물건이 없네...’

손아귀에 든 길드패를 들여다보며 기다리다 보니 저 멀리 능선에서 낯익은 무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여 트라함, 왔냐?”

“아니... 이건 대체...”

트라함과 붉은 매 단원들은 시쳇더미를 발견하자 급속도로 표정을 굳히며 무기를 빼들었으나, 그 옆에서 손을 흔드는 날 발견하자 두통이라도 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멈춰섰다.

작업복에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걸로 보아 모험가의 제보를 받고 곧장 달려온 게 아닐까?

트라함이 거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설마 무고한 사람을 죽인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도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어.”

“그럴 리가 있겠냐. 음...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 사람들이 독살 사건의 범인이란 걸 증명하려면 꽤 걸릴 텐데...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라디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제 이 사람들이 썼던 양동이가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면 납득하지 않을까요?”

“아, 그래 그게 좋겠다. 잠시만.”

사내들의 천렵 도구를 모아둔 구석에서 그물망을 젖혀내고 양동이를 주워들었다.

이후, 그 안에 남은 복어의 부산물을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하자 트라함이 미간을 구기며 읊조렸다.

“...복어독으로 물고기를 잡는 머저리들이 있다고?”

“그러니까 말야. 우리도 보고 놀랐어. 아무리 원가 절감에 목이 메어도 그렇지...”

“진짜 상 또라이 새끼들이네. ...일단 알겠어. 근데 이걸 전부 막사까지 옮기려면 장난 아닐 텐데...”

트라함이 사체들을 내려다보며 표정을 구겼다. 그야 수많은 이목에 둘러싸여 시신을 운반하는 일은 누구나 기피하지 않을까.

녀석은 한참 동안 한숨을 뻑뻑 내쉬더니 담배를 꼬나물며 말했다.

“일단... 고생했어. 그리고 아니스 님이 할 말이 있다더라. 대충 듣자하니 보급부대가 정비를 마쳤다는 것 같던데.”

“보급 부대? 잠깐 그 말은...”

“그래, 이제 하루 이틀 뒤면 여기서 떠날 거야.”

“....”

나는 라디와 시선을 마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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