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베라스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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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베라스틴 #2
“그럼... 안녕히 계세요. 도란님.”
“....”
“왜 그렇게 서글픈 표정을 짓고 그래요... 꼭 평생 이별하는 사람처럼...”
“....그냥 나도 같이 갈까?”
“우리 미련 가지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저까지 슬프게 왜 그래요... 힘겹게 각오했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애잔했던 하룻밤이 지난 다음 날, 새벽.
밤새 소복이 쌓인 눈이 발치를 물들였다. 아쉬움 담긴 한숨은 새하얀 입김이 되어 공기를 적신다. 횡행하는 북풍은 쓸쓸하게 옷자락을 흩트렸다.
마차가 가득 들어선 새벽 역마장은 조금 붐비면서도 서정적인 정취가 흘렀다.
라디가 날 끌어안아 애써 밝은 목소리로 침묵을 깨트렸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도란. 정리를 마치고 베라스틴에서 다시 만나면... 그땐 정말 같이 살자, 응?”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다치지 말고.”
“오빠야말로... 하루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사람들 조심하고, 어디 엄한 데서 사기당하고 길바닥에서 울지 말고, 알았지?”
“내가 애냐...”
“나한테는 아직 철부지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내 사랑.”
라디가 발돋움을 해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서서히 멀어졌다. 그녀의 온기를 붙잡을 새도 없이 멀리서 마차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별의 종소리가.
“잘 다녀올게요 도란님!! 올 때 선물 사 올 테니 기대하세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야 해!!!”
라디가 마차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들판 너머로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다 보니 부산스러웠던 역마장에 적적한 한숨이 드리웠다.
“한 달이라...”
쓸쓸히 발을 돌렸다. 차디찬 추위가 몰려와 옆구리를 좀먹는다. 분명 따뜻하게 옷을 껴입었는데도 말이다. 7계층에 홀로 남겨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
라디가 없는 한 달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을 의문을 뇌까리며 계속 걸었다. 라디를 떠나보냈고, 이젠 나 또한 먼 길을 나서야만 한다. 마차를 구하더라도 베라스틴에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이틀은 걸릴 테니.
“어디 보자... 도란.. 아카이아 모험가 길드 소속이 맞슈?”
끄덕.
“모험가 패 좀 줘보슈, 요즘 수상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원...”
“....”
쩔그럭.
품에서 빨간 도료가 덧칠된 플레이트를 꺼내보였다. 붉은 매 길드의 상징이 새겨진 은판. 모험가 패는 없지만 이걸로도 충분히 신원 증명이 될 것이다. 대형 길드에 속해있다는 건 원래 그런 법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 이건... 붉은 매 길드 단원의 증표 아니요..? 이, 이 던전을 주름잡고 있다던데...! 다, 당신.. 대단한 사람이었군...! 정말 잘 되었어...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
한숨을 내쉬며 은판을 도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이번엔 덕분에 잘 넘어갔다지만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아니스에게 선물 받은 길드 패는 상당히 유용한 물건임과 동시에 족쇄이기도 하니까.
만일 내가 이 증표를 무책임하게 남용한다면, 언젠가 책임을 물게 되겠지.
“...신원 확인은 끝났습니까.”
“네, 네..! 최대한 신속하게 모시겠습니다 나리! 어서 들어가십쇼!”
남성이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리며 손짓했다. 무심하게 대응하며 마차 뒷켠에 짐을 싣고 내부로 들어서자 협소한 좌석에는 이미 네다섯 남짓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제일 뒷좌석에 걸터앉자 힐끔힐끔 호기심 어린 눈길이 몰려들었다.
그중 한 여자가 날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고의는 아니지만 얘기를 엿듣고 말았는데... 혹시 붉은 매 길드의 단원이신가요..?”
“...비슷합니다.”
“와... 정말로...! 다행이다...”
“...이번 여정은 안전하겠군.”
“붉은 매 길드는 비전투원도 대부분 C등급 이상이라며?”
“전투원은 하나같이 괴물이라던데...”
“....”
사방에서 선망 어린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나는 팔짱을 껴 대화를 차단했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니.
나는 후드가 제대로 드리워져 있는 걸 확인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독한 수마가 눈꺼풀을 덮었고, 단잠에 빠져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워야 할까요..?”
“그대로 두죠... 혹시라도 성을 낼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이렇게 곤히 주무시는데...”
“....”
속닥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나 깊게 잠이 들 줄이야. 나도 모르는 새에 피로가 쌓였던 걸까.
찬찬히 고개를 들자 두 남녀가 흠칫하며 물러났다.
“저... 깨어나셨어요..? 혹시 시끄러웠다면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좀이 쑤시는 허벅지 아래로 달그락거리는 차체의 진동이 느껴졌다. 몸을 기울여 천으로 가려둔 나무창 너머를 엿보자 생소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새 던전 마을을 떠나온 모양.
발광 이끼가 아닌, 푸르게 뻗어나간 진짜 하늘에선 새하얀 눈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토끼의 꽁무니처럼 하얗게 물든 들판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죠.”
“음... 아마 한 네 시간 정도 주무셨을 거예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마차가 꽤 흔들렸는데도 깨지 않고 곤히 주무시더라고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아.. 네...”
정면에 앉은 여성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가 차갑게 시선을 돌리자 팔뚝을 쓸어내리며 아쉬움을 달랬다.
라디가 없으니 만사에 흥미가 사라졌다.
말의 휴식을 위해 잠시 마차를 정차한 사이, 어두워진 머리에 맑은 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오자 새하얀 전경이 눈가에 내리쬐었다.
“눈도 이제 지긋지긋하네...”
눈에 대한 낭만 또한 상실했다.
우리가 던전에 들어가 있던 사이, 지상에는 겨울이 찾아왔다. 농부들은 곳간을 걸어잠그고 추위에 대비했으며, 황금빛 밀알이 매달렸던 논밭에는 차가운 삭풍만이 횡행했다.
라디와 울시가 함께했던 7계층에선 운치라도 있었는데.
홀로 맞는 겨울은 외롭다.
허리춤의 간이 파우치에서 꺼낸 건식으로 허기를 달래다 보니 마부가 말채찍을 움켜쥐며 말했다.
“자, 이제 곧 출발하겠습니다! 어서 다시 타십쇼 나으리!!”
“....”
천천히 받침대를 딛고 마차에 올랐다. 삐걱거리는 측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사람들은 곧바로 도란도란 담소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요즘 베라스틴에 언데드가 출몰해서...”
“그거 참 큰일이로군... 안 그래도 던전에 사람들이 몰려 퇴치 의뢰를 맡을 모험가도 별로 없을 텐데...”
“지금 난리도 아니라나 봐요... 정말... 우리는 잠시 들릴 뿐이라 망정이지.. 제가 그곳 주민이었으면 당장 마을을 떠났을 텐데...”
“.....”
무시할 수 없는 화제가 튀어나왔다.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네, 넷?!”
“부, 부르셨나요 모험가님...? 혹시 저희가 무슨 실례라도...”
사람들의 낯빛에 긴장한 기색이 서렸다. 몇몇 하이랭커의 성격이 개차반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겉으로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실제 내 랭크는 둘째 치더라도.
“..방금 베라스틴에 언데드가 나타났다고 하셨습니까?”
“....”
사람들이 날 빤히 응시하더니 말없이 서로 시선을 모았다.
이내 여자가 총대를 메고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 혹시 모험가님은 멀리서 오셨나요?”
“몇 달 동안 던전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아하... 그래서구나... 아니요, 그냥 기묘해서 그랬어요. 요즘 이 화제로 장안이 시끌벅적하거든요. 어딜 가도 전부 베라스틴에 관련된 이야기뿐이에요.”
“베라스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눈썹을 추켜세우며 묻자, 주변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호들갑을 떨었다.
“네, 네...! 밤만 되면 성벽 근처에 언데드가 떼거리로 출몰한데요!”
“하아... 어디 밤만 나타나면 다행이죠. 듣자 하니 낮에도 언데드가 배회하고 해괴망측하게 변형된 마수들이 사람이 헤치고 다닌다는데...”
“심지어 성내에서도 언데드가 발견되었다는 풍문이 있어요...!”
“.....”
나는 흥분해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사태가 심각하다.
소문은 으레 부풀려지기 마련이니 이들이 한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언데드가 출몰한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이 정도까지 입담이 떠돌 정도면 정말로 뭐가 있긴 하겠지.
‘...그래서 오늘 베라스틴으로 향하는 마차를 찾기가 어려웠던 건가.’
금일, 베라스틴을 경유하는 마차가 딱 하나밖에 없었던 걸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중에 더 자세한 내막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가령 언데드의 발생 원인이라던가 출몰 주기, 규모 같은 것 말입니다. 또 영주는 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으음... 저희도 그렇게 자세히는 모릅니다. 워낙 시국이 불안정해서 베라스틴 근처로는 얼씬도 안 했거든요... 다만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하마터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던전...”
“던전이 개발돼서 그쪽으로 모험가들이 몰리다 보니 인력도 모자란 모양이에요! 영주의 사병으로 틀어막고는 있지만 언데드의 발생 원인을 찾지 못하는 이상 언제까지 사태가 지속될지 모른다고 들었어요! 혹시 모험가님은 베라스틴에서 체류하실 계획이신가요...?”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차 안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모, 모험가님... 다시 한 번 재고해보시는 게... 아무래도 베라스틴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고 계셨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옆 마을로 피신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맞아요...! 지금 베라스틴은 너무 위험하다고요!!”
“저희도 다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잠깐 들리는 거지 볼일만 마치면 당장 빠져나올 겁니다! 이대로라면 거긴 가망이 없어요!”
사람들이 손까지 휘저어 가며 날 말렸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걱정을 해주다니, 나름 착한 이들인 걸까.
“괜찮습니다. 제 몸 하나 정돈 간수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베라스틴에 당도하고 집도 없이 떠돌이처럼 살아온 게 반년 전 즈음. 도시에 정 따위는 붙을 새도 없었지만 그곳엔 내게 선의를 베풀어준 사람이 있으니까.
아직 무사할까.
복잡한 심경 속, 마차는 눈밭을 가르며 막힘없이 나아갔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베라스틴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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