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51화 (151/375)

〈 151화 〉 베라스틴 #3

* * *

[151] 베라스틴 #3

“거의 다 와 갑니다 모험가님! 이제 슬슬 준비들 하십쇼!”

격자 창 너머, 마부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예외 없이 일체가 나무로 이루어진 바큇살은 충격을 전혀 완화하지 못했고, 작은 돌멩이부터 물웅덩이까지 노면의 굴곡을 선명하게 훑고 지나갔다.

하다못해 좌석에 쿠션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걸 자각했을 즈음, 뻐근한 허리를 움직여 창틀 너머를 엿보았을 때 목격한 정경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게... 베라스틴이라고..?”

황폐한 대지.

제일 먼저 시꺼멓게 변색된 산림이 눈에 들어왔다. 싱그러웠던 들판은 보랏빛으로 시들었으며, 언덕 곳곳에는 불에 탄 자국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살덩어리가 산재했다.

­덜컹!

“윽...! 방금 뭐가...”

“시체인가...?”

“갑자기 언데드로 변해서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

점점 성채에 가까워지자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온갖 오물과 진눈깨비로 뒤덮인 진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쾌한 기분이 치밀어오른다.

‘꼭 저주라도 뒤집어쓴 것 같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도시에 정은 없다지만, 이 세계에서 나름 오래 의탁했던 장소가 처참히 망가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약초를 채집하러 저 숲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가.

마차를 타고 조금 더 나아가자 마침내 성문에 도달했다.

다만, 우리가 미쳐 정차하기도 전에 은빛 갑주를 갖춰 입은 위병들이 달려와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정지 정지!! 전원 하차하고 소속을 밝혀라!!”

“거부할 시 외적으로 간주하고 즉각 처형하겠다!!”

“당장 두 손 들어!!!”

“....”

바짝 군기가 든 모습. 창을 부여잡은 위병의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예전에는 분명히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천천히 일행들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왔지만, 그 즉시 내게 이목이 쏠려들었다.

“거기 너! 로브 뒤집어쓴 수상한 놈!! 빨리 후드를 벗어라!! 신원을 확인하겠다!!!”

“당장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적으로 치부하겠다!!!”

“....”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드를 벗으면 머리를 들키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검문에 불응했다간 도시에 출입이 금지당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고슴도치 신세를 면하지 못할 테니까.

일행과 위병 외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천천히 후드를 넘기자...

“제, 젠장..! 검은 머리?! 당장 저놈을 포박해!!”

“조심해!! 어떤 사악한 술수를 쓸지 몰라! 이번 사태의 원흉일 수도 있다!!”

“모, 모험가님이 검은 머리였다니...”

“부, 불결해...!”

“....”

예상대로의 반응.

그간 붉은 매 길드의 온화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속이 쓰려온다. 그래, 난 원래 항상 이런 취급이었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자니 경비병들이 악을 지르며 날 에워쌌다.

“네놈...! 당장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널 즉시 체포해서 구금하겠다!!!”

“베라스틴에 검은 머리를 들일 순 없다!! 더러운 악마의 사생아 따위가 어딜 감히!!”

“....”

‘곤란하네...’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랬다간 두 번 다시 이 도시에 발을 들이지 못할 거다. 도망가도 마찬가지. 검문에 불응한 죄는 무거우니까.

회심의 한수로 붉은 매 길드 패를 꺼내 보이기까지 했지만, 나를 이미 완전히 적으로 간주한 이들은 도통 진정할 생각을 안 했다.

차가운 창날이 점점 다가와 하는 수 없이 자기 방호 목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뻗은 순간­

“잠깐 다들 멈춰봐.”

한 위병이 동료 사이에서 걸어나오며 창대를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케닌...? 무슨 말이야 멈추라니!! 당장 찔러 죽여도 모자랄 판... 너 설마 저 껌둥이랑 내통..!”

“악마를 죽여라!!!”

“...다들 진정 좀 해.”

그는 성가시다는 듯이 목덜미를 벅벅 긁더니 턱에 손을 괴며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읊조렸다.

“너 분명... 투구 쓴 모험가 맞지? 맨날 뻔질나게 숲에 드나들던.”

“...기억해주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잊어버리겠냐. 네가 처음 이 도시에 들어왔을 때 당번이 바로 나였어 인마. 그땐 행색이 엄청 꾀죄죄해서 진짜 악마가 나타난 줄 알고 식겁했다고.”

어쩐지 어디서 좀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가 싶더니 자주 마주쳤던 문지기였나 보다. 갑옷이 달라져서 못 알아봤다.

처음 베라스틴에 도착했을 때의 나는 투구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그때 얼굴을 봐 둔 거겠지.

그가 징하다는 눈빛으로 내 행색을 훑어보며 말했다.

“...살아있었네?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내비치던 놈이 두 달이 넘도록 안 보여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확실히 던전이 짭짤하긴 한가 봐. 옷차림부터 삐까번쩍해진 걸 보니.”

“...고마워, 그럼 일단 내 신원은 확인된 건가?”

“뭐... 다들 문제없지? 얘가 생긴 건 이래도 나름 열심히 사는 녀석이야. 내가 봤어.”

“확실해...?”

“그래, 반년 동안 꾸준히 봐왔어. 아, 저기 마차 하나 더 온다. 빨리 들어가 봐 너희.”

“...고맙다.”

“정말로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사. 말만 늘어놓지 말고.”

“.....”

­끄덕.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두꺼운 성문을 통과한 뒤, 나는 곧바로 마차를 타고 온 일행과 헤어졌다.

처음에 비하면 상당히 서먹해진 게 느껴졌지만 어차피 두 번 다시는 안 볼 사이니 개의치 않았다.

일말의 미련 없이 내가 향한 곳은 모험가 길드. 나의 근본이 살아 숨 쉬는 곳.

“이게 얼마만이지...”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게 느껴질 지경의 구조물 앞에 서서 잠시 뜸을 들였다. 아카이아 길드의 외벽은 새하얀 석재로 만들어져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른 오후의 햇살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나는 자태에선 흉흉한 도시의 소문도 빗겨 간 듯했다.

나는 입구 위, 칼과 방패가 교차된 아카이아 길드 특유의 문양을 흘겨보며 떨리는 마음으로 스윙도어를 열어젖혔다.

­끼이익...

“....”

적막.

내심 두근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지만, 오랜만에 길드로 돌아온 나를 맞이하는 건 한산한 의뢰 게시판과 텅 빈 테이블뿐이었다.

‘이게 뭐야...’

겨울이라 의뢰가 적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아니,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일 정도다.

심지어 아직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위를 거닐며 접수 창구가 있는 안쪽으로 향하자 중학생 또래쯤 되어 보이는 어린 접수원이 다가와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 모험가님... 이신가요? 처음 보시는 분 같은데... 저희 아카이아 길드에는 어쩐 일로...”

“...처음 방문한 건 아닙니다. 다만 오랜만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혹시 카렌 씨 있나요?”

“아... 네, 네...! 카렌 언니 담당 모험가분이셨어요? 바, 바로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카렌 언니!! 지금 엄청 잘생긴...!”

접수원이 문뜩 내 후드 아래를 엿보더니 허겁지겁 데스크 너머로 사라졌다. 베라스틴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혹여나 카렌의 신변에 무슨 일이 닥친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무사했던 모양이다.

삭막해진 길드 내부의 풍경을 시선으로 훑으며 대기하고 있자니 잠시 후, 데스크 안쪽의 문이 벌컥 열리며 밝은 주홍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미인이 뛰쳐나왔다.

내가 몇 번이나 신세를 진 사람.

카렌이 가쁜 숨을 고르며 날 올려다봤다.

“저... 모험가님...? 저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와봤는데...”

“....”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

변변찮은 실적 하나 올리지 못하고 반년 동안 F랭크에 머물러 있던 내가, 고급스러운 로브를 갖춰 입고 허리에는 기다란 바스타드 소드까지 차고 나타났는데 오죽할까.

쿡쿡 새어나오는 실소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예요 저. 벌써 까먹은 거예요 카렌님?”

“그, 그 목소리는 설마!! 도란 씨...? 아, 아니 여기엔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요. 던전 공략 마치고 돌아왔죠. 곤란하다기에 도와주러 왔어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카렌이 당황하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더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도.. 도란 씨는 더 이상 아카이아 모험가 길드 소속이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그녀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쐐기를 박았다.

“도란 씨는 한참 전에 길드에서 제명되셨어요. 그러니까....... 죄송해욧..!!”

“....”

네..?

*

“저... 괜찮아요...?”

“....”

“너,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세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

“하아 정말...”

카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는 응접실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지만,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전할 여유도 없었다. 그야...

“내, 내가 개백수라니...!”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때아닌 홍수에 집이 떠내려간 비버의 심정이 이러할까?

모험가 자격이 없다면 의뢰를 수행할 수 없다. 의뢰를 수행하지 못하면 보수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말은 내게 굶어 죽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모험가 자격증이 없으면 사냥한 몬스터의 소재를 처분할 때도 여러 불이익이 따른다. 안전한 거래가 보장된 길드 제휴 상점이 아닌, 일반 상인에게 소재를 처분했다간 덤터기를 쓸 게 뻔하니까.

뒷배 없는 모험가만큼 사기를 치기 좋은 표적도 없다.

그중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건, 이 도시에서 내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앞으로 매번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붉은 매 길드원이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테이블 아래로 억울하게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어, 어째서 제가 짤린 거죠?! 저만큼 성실히 일한 모험가도 드물 텐데...! 베라스틴에 있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의뢰를 수행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도란 씨가 마지막으로 의뢰를 수행하신 지 두 달이 넘었잖아요... 중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비쳤으면 자격이 박탈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니 던전에 들어가 있었는데 어떻게 길드에 보고하러 옵니까?!”

“저도 딱히 드릴 말씀이...”

“하...”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건 내가 썩어빠진 F급 모험가이기 때문.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언제든 바꾸어 고용할 수 있는 F랭크인 나로서는 더욱 자주 의뢰를 수행해야만 페널티를 피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중간에 던전을 나와서 인근 아카이아 길드에 간단한 보고만 했어도 E랭크로 승급했을 텐데...”

“네...?”

“...저번에 오필리아 상단 호위 임무 받아 간 거 기억하시나요? 도적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E랭크 진급이 확정되었거든요. 근데 하필 F랭크인 상태에서 최소 의뢰 충족 기준인 두 달을 넘는 바람에...”

“제기랄...”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다. 그토록 바라 못지않던 E랭크를 목전, 아니 이미 다 도착해 놓고서는 떠먹여 줘도 먹지 못하는 꼴이라니.

이세계판 김첨지가 따로 없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글세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하하...”

너털웃음이 새어나왔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자 카렌이 우물쭈물하며 덧붙여왔다.

“너, 너무 그렇게 낙심하지 마세요! 도적들의 목에 현상금이 붙어 있었으니까요...! 전부 도란 씨 몫이에요!”

“...얼만데요?”

“무려 30실링이에요, 30실링!! 굉장히 악명 높은 범죄자가 섞여 있었다나 봐요!”

“하아....”

“어, 어라..?”

아무래도 카렌은 내가 굉장히 기뻐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30실링이면 코볼트 킹 퇴치를 포함해 지금까지 아카이아 길드에서 의뢰로 번 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던전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린 지금의 나에게는 퇴직금치고 몹시도 푼돈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던전 마을에서 떠나오기 전, 라디와 함께 묵었던 호텔 숙박비와도 별반 다를 바 없지 않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길드를 나서기 전에 소재 매각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 짐을 처분하고 싶은데...”

“아... 혹시 미궁산 소재인가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마침 미궁에서 나온 소재를 비싸게 매입하고 있거든요. 시국이 시국인지라 물자가 모자라서...”

카렌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베라스틴에 도착하고 나서 봐왔던 면면들이 으레 그랬듯이 그녀의 낯빛에도 암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가장하며 말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여기에 풀어 놓으면 되나요?”

“아, 네...! 곧 길드 감정사를 불러올게요. 원칙대로라면 외부인은 이용할 수 없지만, 원래 저희 길드원이셨기도 하니 이 정도는 눈 감아 주실 거예요.”

“네...”

나는 침체된 손길로 천천히 배낭끈을 풀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간과했던 게 있다면­

“자, 잠깐만요! 도란 씨...? 그건 대체...!!”

내가 잡은 몬스터가 스노우 타이거였다는 사실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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