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베라스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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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베라스틴 #4
“아, 아니 무슨...! 도란 씨! 이, 이게 다 뭐에요?!”
“뭐긴요... 몬스터 부산물인데요?”
“어디서 구매하셨어요...? 이런 무시무시한 소재를...”
“다 던전에서 제가 직접 잡은 건데요?”
“세, 세상에 말도 안 돼...”
응접실 안에 경악성이 울려퍼졌다.
테이블 위에 배낭을 뒤엎자 책상다리가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자그마한 테이블로는 모자라 소파 위에까지 짐을 늘려놓자 카렌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카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음...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냥하기는 했죠. 저건 섀도우 래빗의 털가죽.. 이건 플래시 골렘의 핵... 요 파란 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카쟈드 이글의 둥지를 수호하던 골렘을 처치하고 나온 거예요. 저기 있는 것들은 스노우 타이거의 이빨이랑 발톱이고요. 그 외에 나머지는 다 잡다한 마물의 소재니까 감정사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아요.”
“스, 스노우 타이거... 북방 대륙에 그런 마물이 존재한다고 말만 들어봤는데.. 자, 잠깐...! 카쟈드 이글?!! 메다올리눔 던전에서 카쟈드 이글이 나왔다고요?!!”
“메 뭐시기요?”
“도란 씨가 가셨던 던전 말이에요!!”
“아...”
그새 정식 명칭이 굳어졌나 보다. 그러고 보니 던전 바로 옆에 있던 마을 이름이 메다올리눔이었지.
“네, 좀 깊은 곳이긴 했지만요.”
“몇 층에서 만난 건지 당장 불어욧!!”
“저... 카렌 씨, 조금 진정하세요. ...7계층이요.”
“칠계층?!! 칠계츠응?!!!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장난하는 거 맞죠?!!! 붉은 매 길드가 진출하려다가 전멸한 층이 7층이잖아요!!!!”
“으헉...!”
카렌이 내 멱살을 붙들고 잡아먹을 기세로 소리쳤다.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두 손을 들어 말렸지만, 느긋한 내 태도가 오히려 성미를 부추겼는지 손아귀에 한층 힘이 더해졌다.
하지만 카렌이 한 말 중에 정정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아.. 네 네, 알고 계셨구나. 근데 그거 사실 전멸이 아니라...”
“아니긴 개뿔!! 이렇게나 희귀한 소재를 잔뜩 들고 온 걸 보니 허풍은 아닌 모양인데... 그러다가 죽었으면 어쩌려고..!! 하아.... 도란 씨는 왜 맨날 근심만 안겨주는 거예요.. 걱정한 제가 바보 같게... 석 달 가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 와서...”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카렌은 늘 이랬지.
평소에는 새침하게 굴다가도 내 안위 문제가 나오면 늘 염려한다. 가끔은 쓴소리도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내 신변을 걱정하기에 그런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마중해주었던 모험가 중 더는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허구한 날 철부지 애처럼 다치고 돌아온 나는 더욱 걱정됐을 것이다.
‘그래도 고맙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뛰어내린 이야기나 포악하기로 유명한 네눈박이 늑대와 함께 설원을 헤쳐온 무용담 등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삼가기로 했다. 더 이상 그녀의 근심거리를 늘려도 곤란하니까.
내 안위를 걱정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살짝 위안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소재는 매입해 주시는 거예요?”
“잠깐만요 도란 씨. 이런 희귀 품목을 아카이아 길드에서 매각해 주신다고 하면 저희야 고맙지만...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저 혼자 독단으로는 결정할 수 없어요. 상급자를 불러올 테니 차라도 마시면서 잠깐만 기다... 너 거기서 뭐해!”
“드, 들켰다...!”
카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드니 응접실 창문으로 이쪽을 몰래 훔쳐보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좀전의 접수 창구에서 봤던 어린 접수원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들어왔다.
“에이... 너무 그렇게 째려보지 마요 카렌 언니! 안 그래도 사람들도 안 와서 따분해 죽겠는데... 이야~ 이게 전부 몬스터에게서 나온 거예요? 굉장히 강한 모험가신가 봐요!”
“...죄송해요 도란 씨. 얜 얼마 전에 들어온 견습인데 아직 교육이 덜 돼서...”
“괜찮아요. 활기차 보이고 좋은데요 뭐.”
카렌의 한탄에 웃음으로 답했다.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홍차를 음미하자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도란 씨 조금 변했네요? 어쩐지 이전보다 듬직해지신 것 같은데...”
“여러 일을 겪었거든요. 나름 성장했죠.”
“그런가요... 여러 길드에서 문전박대당하고 저희 길드까지 와서 모험가로 받아달라고 간청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 그때 일은...! 어쩔 수 없잖아요... 가뜩이나 이 도시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됐을 때라 금전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그랬었죠... 근데 그러고 보니.. 도란 씨가 무슨 목적으로 베라스틴에 들어왔었는지가 기억이 안 나네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
우뚝 행동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로브 아래로 내비치는 실루엣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불현듯 옆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야 뭐야~ 둘이 무슨 사이야?! 어쩐지 그냥 접수원이랑 모험가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있잖아요 오빠~ 그거 알아요? 카렌 언니는 엄청 신중해서 이렇게 업무 외적인 대화는 원래 절대로 안 하는 거. 울 언니랑 어떻게든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어서 대시하는 남자들이 아주 줄을 섰..”
“스텔라!!!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서 업무 매뉴얼이나 숙지해!!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피~ 어차피 사람도 안 오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카렌 언니도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굴다간 정말로 연애 한 번 못하고...”
“닥쳐 스텔라. 업무평가표에 반영하기 전에.”
“.....”
“하아... 정말... 그럼 제 상급자랑 길드 감정사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스텔라 너도 엉덩이 딱 붙히고 얌전히 있어.”
“네~!”
“....”
카렌이 접수원을 한 번 세차게 째려본 후 재빨리 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카렌이 떠나자마자 내게 달라붙어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흘려넘겼다.
이제 암시장 때와 같은 과오는 범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홍차를 들이켜며 잠시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응접실 문이 열리며 한 노신사가 나타났다.
그가 펜을 잡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내게 악수를 건넸다.
“그래... 자네가 바로 그 도란이라는 모험가인가. 이전부터 여러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로군.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네. 나는 이 아카이아 길드의 부 지부장을 맡은 하켄이라고 한다네.”
“...안녕하십니까.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60대 후반 즈음, 막 노년에 접어들었을 남성. 꽤 마른 체격이고 나에 버금갈 정도로 키가 큰 편이다. 손바닥 볼룩살과 옷소매엔 잉크가 배어들어 있는 걸로 보아 평소엔 사무 작업을 주로 하는 듯하다.
재빨리 분석을 마치고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 또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말했다.
“사정은 들었네. 소재 매각을 해야 한다지? 마침 우리도 물자가 모자라던 상황이었는데 잘 되었... 이, 이게 다 뭔가..!!”
“말했잖아요 부 길드장님... 장난 아니라고.”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허허... 카렌 자네가 날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군.”
그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내 응접실 테이블과 소파를 점령한 소재들을 천천히 살펴보더니 눈꼬리를 움찔거리며 경악했다.
“수정 마물의 핵이라... 귀한 걸 들고 왔군. 이건 그 잡기 어렵다고 소문난 섀도우 래빗일 테고... 윙뱃 라쿤? 게다가 저건 스노우 타이거의 모피인가...? 북방 대륙의 고급 수출품으로 가끔 구경한 적이 있네만 내가 봐왔던 상품 중에서도 월등한 품질이로군... 배낭에서 꺼내놓지 않은 걸 보니 팔지 않을 셈인가?”
“네, 이건 제가 침대보로 쓸 예정이라서요.”
“저 귀한 물건을 단순한 침대보로... 허허... 듣던 대로 여간내기가 아니군...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사내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네...? 혹시 저를 알고 계셨나요?”
베라스틴의 부 지점장이나 되는 사람이 나를?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노인이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평소에 어찌나 카렌이 자네 이야기를 해대던지... 자기가 유심히 지켜보는 모험가가 한 명 있는데 언젠가 반드시 대성하게 될 인재라고 말일세! 특히 자네가 코볼트 킹을 쓰러뜨렸을 땐 내 집무실까지 달려와서...”
“부 길드장님!! 제, 제가 그 얘긴 하지 말라고 했죠?!!”
“허허.. 뭐 어떤가. 길드 규정으로 부득이하게 자네를 제명해야 할 때는 정말이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서럽게 우는 카렌은...”
“아저씨!!! 저 진짜 화낼 거예요!!”
“흐흐... 아, 마침 좋은 순간에 감정사가 도착했군. 어여 와서 이것들 좀 봐주게. 늘 수고하네.”
“과찬이십니다.”
카렌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불같이 화를 내려던 찰나, 외눈 안경을 쓴 남성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새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꼼꼼히 소재를 살피더니 얇은 목판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이 분주하면 분주해질수록 점차 사람들의 말소리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협소한 방 안에서는 사각거리는 펜 놀림만이 들려왔다.
누군가의 마른침이 넘어간 순간, 마침내 감정사가 깃펜을 내리며 침묵을 깨트렸다.
“소재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적정 매입 가격은....”
*
감정 결과가 나오자 좌중에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나왔다.
“우와...! 소재 매각만으로 이렇게 큰 돈을 벌어간 사람은 처음 봐요!”
“허허... 어느 정도 가격이 나올 거라 예상은 했네만...”
“....”
호기심 어린 눈동자들이 한마음으로 내 후드 아래를 응시했다.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 감정 금액을 들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래서 어땠냐고?
“...생각보다 더 나왔네.”
“그, 그게 다예요?”
“네?”
“아, 아니에요...”
4골드.
방금 내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금액이다. 2개월 조금 넘게 던전에 들어가 있었으니 단순계산으로 한 달마다 금화 두 닢씩 번 셈. F랭크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모험가는 꿈도 못 꿀 수익이지만, 생각보다 감응이 크진 않다.
‘...딱 적당한 수준이네.’
그야 저 몬스터들을 잡으려고 몇 번이나 사선을 드나들었던가. 적어도 이 정도 이윤이 나지 않으면 오히려 수지타산이 안 맞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물론 유적에서 발견한 술로 거액을 벌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면 될까요?”
“네...? 좀만 더 있다 가시지...”
“...빨리 다른 길드를 알아봐야 하니까요.”
“아...”
짐을 덜어냈으니 이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할 차례다.
다행히 모험가 길드가 한 곳만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머리칼 때문에 가입이 힘들다고는 하나 지금은 도시 전체에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니 어찌어찌 묻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렌처럼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접수원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디와 다시 조우하기 전에 앞서 최대한 새 직장을 구해놓고 싶은 바, 무거운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려는 찰나 나지막한 음성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잠시 멈춰보게 도란 군. 이대로 그냥 갈 셈인가?”
“...네? 뭐가 또 남았어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게. 복직시켜 줄 테니.”
“네? 방금 뭐라고...”
우뚝 발길을 멈추고 돌아보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원래 한 번 제적당한 모험가를 다시 들이는 건 규정에 어긋나지만 내 권한을 쓰면 그 정도쯤이야 물릴 수 있네. 게다가 지금은 특별 전시 상황 아닌가? 모험가 한 명 복직시킨다고 한들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을 걸세. 마음만 같아서는 상위 랭크로 승급도 시켜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 권한 밖이라서 말이야.”
“그, 그럼 정말로 다시 고용해 주는 겁니까?!!”
“물론이지. 오히려 자네 같은 인재를 내친다면 우리로서도 손해일세. 생각해보게나, 만일 도란 군이 다른 모험가 길드에 가서 명성을 떨친다면 자네를 내쫓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살지... 상상만 해도 끔직하군, 더욱이...”
부길드장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자네가 없어지면 카렌이 굉장히 서운해할 테니 말일세. 또 온종일 베개를 껴안고...”
“아저씨!!! 사모님 몰래 비상금 숨겨둔 거 다 이를 거예요!!”
“이런 이런...! 자네를 오래 붙잡고 있다 보니 카렌이 질투하는 모양이로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늙은 몸이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그럼 건승하게 도란 군.”
부 길드장이 손을 흔들더니 카렌의 등쌀에 떠밀며 반 강제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는 미묘한 공기가 내리깔렸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보기 드물게 뺨을 붉힌 카렌과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복직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누군가가 내 팔뚝에 달라붙었다.
“저기... 잘생기고 돈도 많은 오빠! 저 시간 많은데 오늘 제 집에서 고양이라도 보고 갈...”
“시간 많으면 넌 가서 네 업무나 해 스텔라. 오전에 시켜놓은 일은 다 끝냈어?”
“칫...! 자기 혼자만 즐기려고! 제가 나가면 도란 오빠를 꼬실 생각이죠? 업무를 핑계로 어디 으슥한 곳으로 불러낸 다음 그 가슴으로...”
“스텔라!!!”
“으아악!! 진짜 화났다아!!”
카렌이 일갈하기가 무섭게 접수원이 응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쿵쾅거리는 계단 소음이 울려 퍼지자 카렌이 이마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줄곧 심란해 보였던 게 언데드 때문만은 아니었던가...
“...죄송해요 도란 씨. 인력이 모자라다 보니 아직 교육이 덜된 인원도 급하게 투입하는 바람에... 원래 나쁜 애는 아닌데...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괜찮아요. 그것보다 지금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운 두 달 사이 베라스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시점에서 무성한 소문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도저히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면 라디와 함께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테니까.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계속 품어왔던 의문을 막 입에 담으려는 순간, 스윙도어가 삐걱이며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도란 씨...?”
“...잠시만요.”
황급히 테라스 너머로 나가 길드 로비를 몰래 내려다보자...
“...저 사람이 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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