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53화 (153/375)

〈 153화 〉 베라스틴 #5

* * *

[153] 베라스틴 #5

“젠장...!”

“...뭐해요 도란 씨?”

황급히 후드를 눌러쓰고 엎드리자 카렌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테라스 쪽으로 다가오던 찰나, 황급히 팔뚝을 붙잡고 끌어내리니 귀여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카렌의 입을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쉬이이잇...! 목소리 낮춰요!!”

“대,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저...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설원처럼 아름다운 은발.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이 새하얀 머릿결을 휘날렸다. 그 아래 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연청색 눈동자는 열대야의 하늘을 담아놓은 듯하다. 마치 화백 속의 천사를 현실로 구현한 듯 말도 안 되는 외모.

추위와 고통에 죽어가던 나를 몇 번이나 살려준 은인.

아리엘.

“아, 아가사 신전도 아니고 왜 저 여자가 모험가 길드에...?!”

“....지금 모험가 길드와 신전이 서로 긴밀히 협조 중이니까요.. 언데드가 신성력에 취약하잖아요. 특히나 회복 관련 권능을 다루는 아가사 사제한테는 더더욱. 아리엘도 그쪽에서 파견해준 사람인데... 아는 사이였어요..?”

“....”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녀를 만나러 갈 예정이긴 했다.

아리엘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외톨이 인생을 살아온 내게 지인을 넘어서 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사람.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나쁘다.

‘젠장할...!’

재빨리 후드를 잡아당겼다. 다행히 천이 얇아 얼굴을 덮고도 전방을 주시할 수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몇 번이나 생명을 빚진 은인이라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리엘은 내가 흑발이라는 걸 모르니까.

언제나 화사하게 웃으며 호의를 베풀던 그녀가 내 정체를 깨닫고 차가운 눈길로 응시해온다고 상상하면 숨통이 막혀 온다.

내면 깊은 곳에 새겨진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자각하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투구...”

“네...?”

“카렌 씨 호, 혹시 남는 투구 없어요...? 아무거나요...!”

“투구라... 지하 창고에 굴러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부탁할게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윽...?!”

­촤르르륵!!!

허겁지겁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들던 중,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안에 있던 동전을 와르르 쏟아버리고 말았다.

황급히 난간 틈새로 굴러가는 은화를 붙잡으며 조마조마하게 아래를 엿보자­

“그러니까 요즘 분위기가...”

“...그래? 큰일이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뇨! 지금도 엄청 보탬이 되고 있는걸요?! 저번에만 해도...”

“.....”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듯하다.

철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자니 카렌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버리려고 놔둔 거라 돈은 안 받아도 돼요. 근데 너무 오래돼서 상태가 엉망인데 괜찮겠어요?”

“네 제발 뭐든지 상관없으니까...!”

“....도란 씨도 고생하네요.”

그녀는 날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렌이 계단을 내려가자 뒤이어 해맑게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서둘러 난간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숨소리도 죽여가며 귀를 기울이자 아리엘과 접수원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요즘엔 신전도 분위기가 어수선하단 말이에요..?”

“응... 아무래도 다들 너무 바쁘니까... 환자는 늘었고.. 사람은 점점 떠나가고...”

“이러다간 정말로 베라스틴이 유령 도시가 되는 게...”

“글쎄... 그래도 열심히 탐색해 봐야지.. 곧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아리엘은 여전히 신전 부속 치료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칫 바람이 불면 후드가 젖혀질 수도 있는 바, 새 투구를 장만하고 난 다음에야 찾아갈 예정이었는데...

그래도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한시름 덜었다.

한숨을 내쉬며 내심 안도하려는 찰나ㅡ

“아, 그러고 보니 아리엘 언니도 곧 파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모험가가 막 베라스틴에 도착했거든요...!”

움찔!

“그래? 어떤 모험가였는데?”

“음... 귀족이나 입을 법한 로브에 허리에는 굉장히 고급진 장검을 장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얼굴을 살짝 엿봤거든요? 그런데 엄청나게 잘생긴 거 있죠?! 무슨 왕자님을 보는 줄 알았다니깐요!!”

“음 그래...? 다행이네 강한 모험가가 와서!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라던 상황이었으니까...”

“...뭘 그렇게 남 일처럼 말하는 거예요. 같이 탐색대를 꾸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글쎄... 솔직히 난 아직... 혹시 그 남자 이름이 뭐야?”

“이름이요?”

“그래, 내가 치유소에서 일하면서 이 도시 모험가는 많이 봐 왔잖아. 어쩌면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아.

“이름이 분명 뭐였더라...? 도론? 도르...? 꽤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제발제발제발...

제발...!

“....까먹었어요! 에헤헷..”

“뭐야...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말해줘. 스텔라 말대로 나랑 같은 파티를 짜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 가서 뒷정리를 마저 해야 하거든. 카렌한테도 몸조심하라고 전해주고!”

“네! 조심히 가세요 아리엘 언니! 혹시 다른 소식이 들려오면 곧바로 알려드릴게요!”

“그래~ 안녕!”

“.....”

‘휴유....’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하며 몸에서 힘을 빼던 순간ㅡ

“도란 군!! 깜빡 잊고 자네한테 말해주지 않은 게 있는데 말이야...!”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스윙도어를 열어젖히며 들어왔고,

“도란...? 도란?! 지, 지금 분명 뭐라고... 읏..?!”

물망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차마 숨을 겨를도 없었다.

“도란!!!!!”

새털처럼 가벼운 형체가 달려와 날 껴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서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났고, 그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진한 꽃향기가 풍겼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죽은 줄만 알았잖아...”

아리엘이 나를 꼬옥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순수함을 녹여 두른 듯한 목소리가 점차 물기로 젖어든다. 내 목덜미를 끌어안은 두 손에 강한 힘이 실렸지만, 차마 그녀를 마주 안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후드를 부여잡기 바빴기에.

그 사실에 더없는 무력감을 느끼던 차, 아리엘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리엘 님도...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

“...잘 지냈어요..?”

“아니.. 전혀...”

“....”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자주 보던 지인이 석 달이 넘도록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이 파리 목숨처럼 쉽게 죽어나가는 세계인지라 더욱 걱정했을 테지.

심지어 아리엘은 치료원에서 일하는 바, 참혹하게 망가진 부상자와 주검을 수도 없이 봐왔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서 있자니 정문 쪽으로 슬그머니 내빼는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부 길드장님.”

“그, 그... 다시 급한 일이 떠올라서 말이네..! 카렌이 설명해 줄 걸세!! 미안하네!!”

“....”

젠장 저 영감탱이.

슬슬 아리엘을 떼어놓고자 입을 열었다.

“저기... 좀 괜찮아 지셨...”

“..싫어.”

“네...?”

“...놓으면 또 떠나갈 거잖아.”

그녀가 날 올려다봤다. 그 눈동자에 형형한 감정이 묻어나왔기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재차 후드를 잡아당겼다.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가장해 읊조렸다.

“...앞으로는 멀리 갈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하고 갈게요.”

“정말...?”

“네.”

“...알았어.”

아리엘은 그제서야 내게서 팔을 풀더니 평소대로의 말투로 돌아와 꾸짖기 시작했다.

“도란 님...! 대체 뭐 하느라 지금 온 거예요! 약초 채집을 마지막으로 기별도 없이! 던전으로 떠났다는 것도 카렌한테 전해 듣고 나서야 알았잖아요!”

“...네, 그 말대로 한동안 던전에 들어가 있었어요. 말도 없이 사라진 건 정말 죄송해요. 원래 한 달 정도만 있다가 바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정말이지 매번 칠칠맞게...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니 다행이네요. 이번에도 반송장이 되어서 치료원으로 기어들어오면 정말 따끔하게 혼쭐내 주려고 했는데.”

“.....”

어쩐지 마주 보고 있기가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힐난하는 어조지만, 날 응시하는 아리엘의 눈길에는 다분한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왜 나는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제대로 대꾸조차 못 하게 되는지...

그녀가 내 얼굴을 가리던 투구가 사라진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란 씨, 투구 가져왔어요. 위치가 바뀌어서 찾느라 좀 오래 걸렸...”

“.....”

카렌이 낡은 투구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다 아리엘과 눈이 마주치고 멈춰섰다. 하필이면 기둥이 절묘하게 가린 탓에 내 앞에 있던 그녀를 못 본 모양이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틀자 아니나 다를까 아리엘이 날 뚫어져라 응시하며 눈매를 좁혀왔다.

“....도란. 그러고 보니 내가 부탁했을 땐 한 번도 얼굴을 안 보여주더니 카렌은 본 적 있다더라? 스텔라도 방금 전에 살짝 봤다고 했고.”

“그, 그건 불의의 사고가...”

“도란.”

“.....”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오싹한 한기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자니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벗어.”

“네, 네엣...?!!”

“후드! 벗어!!”

“아, 안 돼욧...!!”

“벗으라고!!!”

“제길...!! 배, 백랑보(白??)!!”

황급히 발에 검은 기운을 두르고 펄쩍 뛰어 물러났다. 즉시 카렌의 손아귀에서 투구를 낚아채며 길드 로비로 내려왔지만, 아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며 쏘아붙였다.

“벗어.”

“시, 싫어요...!”

“나 화났어.”

“...거짓말.”

“정말로 화났어.”

“...그, 그래도 이건 안 돼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에잇!!”

“젠장!!!”

그녀가 급작스레 팔을 뻗어왔기에 재차 뒤로 도약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바, 숙련된 모험가만큼은 아니지만 재빠른 속도로 뒤쫓아와 내 로브를 붙잡고자 분투했다.

후드를 꽉 움켜쥔 채 테이블과 의자 사이를 가로지르며 난데없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자니 카렌이 지근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리엘... 네 심정은 알겠는데 일단은 거기까지만 해. 기껏 청소해놨는데 어수선해지잖아. 도란 너도.. 아니, 도란 씨도 그만해요. 할 거면 밖에 나가서 하던가.”

“왜요? 보기 좋은...”

“입 닥쳐 스텔라.”

“네~!”

아리엘도 카렌을 돌아보고는 아차 싶었는지 우뚝 멈춰섰다. 일단 그녀와 휴전하기로 약속하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자 카렌이 과실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그녀 또한 자리에 착석하며 운을 뗐다.

“그래, 아리엘 너도 마침 잘 왔어. 도란 씨, 아까 미처 전하지 못한 게 있는데 마저 들으실래요?”

“아, 네... 근데 방금 전에 부 길드장님이 왔다 갔는데...”

“네, 아마 이것 때문일 거예요.”

카렌이 새하얀 양피지 하나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하단부에 영주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띄엄띄엄 읽어나가자...

“원인불명의 사태... 신전 협조... 수색 명령 하달? 이게 뭐에요?”

“말 그대로 영주성에서 베라스틴의 모든 모험가 길드에게 하달한 공문이에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아리엘이 이곳에 와 있는 것도 이것 때문이고요. 여기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시죠?”

“예... 그야 뭐...”

힐끗 옆을 흘겨보자 어쩐지 기세등등하게 허리를 편 아리엘이 눈에 들어왔다.

스멀스멀 다시금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무언으로 긍정하자 카렌이 말을 이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마물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어요. 몬스터의 다양성과 원인불명의 실종 사건도 늘어났고요. 하지만 그중 무엇보다 심각한 건 언데드가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에요. ...도란 씨라면 이 사태가 얼마나 중대한지 알고 계시겠죠?”

“...네.”

나름 반년 동안 이곳에서 모험가로 살아온 만큼 베라스틴 인근 지형은 완벽하게 꿰고 있다. 이 근처에는 마물이 별로 없다는 점도. 그래서 약초 채집 의뢰나 하며 근근이 연명해오지 않았던가.

하물며 언데드?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언데드는 없다고 했지.’

언데드가 자연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들었다. 하물며 한 번에 대량으로 창궐한다고 하면 분명 뭔가 있다는 소리다. 유적에서 봤던 미라들도 전부 주술에 의해 탄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말은 즉...

‘누군가 의도적으로 언데드를 만들고 있어.’

이 사건에 배후가 존재한다.

“...원인은 알아냈어요?”

“아뇨, 그래서 내려온 명령이 이거에요.”

카렌이 양피지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란님은 앞으로 3인 1조로 활동하며 베라스틴에 발생한 이변의 원인을 조사해주셔야 해요. 이는 영주님이 도시의 전 모험가에게 명령한 지시사항이고,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불복할 수 없어요. 조원 중 한 명은 다른 길드에서 차출될 예정이고, 다른 한 명은...”

설마...

“잘 부탁해 도란! 앞으로 자주 보겠네?”

머리를 부여잡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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