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54화 (154/375)

〈 154화 〉 베라스틴 #6

* * *

[154] 베라스틴 #6

“그럼... 수속을 마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당분간은 쉬고 계세요. 나머지 파티원이 정해지면 한동안 또 고생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간 던전에서 지내느라 힘드셨죠?”

“...어쩐지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은데...”

“뭐라고 도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구었다. 타자가 우리의 모습을 봤다면 무슨 일인가 했겠지. 베란다에 두 달 넘게 방치한 화초처럼 시들시들한 나와 해맑게 웃는 아리엘의 온도차가 장난 아니었을 테니까.

앞으로 피곤해질 게 안 봐도 뻔하다.

평소라면 파티원을 바꿔달라고 요청이라도 했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라 은인인 그녀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

푹 고개를 떨구며 카렌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가봐도 되는 겁니까?”

“네, 그래도 앞으로는 매일 길드에 방문해 주세요. 현황 보고도 겸해서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아, 근데 저... 카렌 씨?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부탁이요? 네, 뭔데요?”

카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봐왔다.

이걸 말하면 분명 화낼 텐데...

“그... 모험가 패를 잃어버렸는데... 혹시 새로 발급받을 수 있을까요..?”

“....모험가 패를 잃어버리셨다고요?”

“죄, 죄송합니다!!”

“....”

아니나 다를까 카렌이 급속도로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눈초리가 맹금류처럼 매섭게 올라갔기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 어쩔 수 없었어요...! 어마어마한 괴물을 만났거든요!! 살기 위해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죄송해요.”

“....”

“안 될... 까요?”

“....이번만이에요. 살기 위해서 그랬다니 어쩔 수 없죠... 앞으로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세요. 혹시라도 도적이 주워가거나 타인이 악용하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재발급 비용은 3실링이에요.”

“윽...”

­짤랑..

눈물을 머금고 은화 세 닢을 건네주었다. 제법 돈도 벌었으니 이제 이 정도 금액은 충분히 지불할 수 있지만,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원래 나가는 돈 중에서 벌금하고 세금이 제일 아쉬운 법이니까.

“그럼... 모험가 패를 새로 발급해드릴 때까지는 이 임시 서류증을 가지고 계세요. ...혹시 이것마저도 잃어버리면 그때는 벌금으로 안 끝날 테니 그리 알아요.”

“녜...”

꾸지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

왜 최근 들어 혼나는 일이 잦은 것만 같지...?

“그럼 이제 쉬러 가보세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파티가 정해지면 한동안 바빠질 테니까요. 그리고...”

카렌이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네...?”

“윽...! 볼일 다 봤으면 멍하니 있지 말고 좀 가요!!”

빤히 바라보자 부끄러웠는지 그녀가 날 길드 밖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자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카렌에게 받은 싸구려 잡철 투구를 고쳐 쓰며 길가를 서성이고 있자니 아리엘이 스윙도어를 젖히며 걸어나왔다.

“갈 곳이 없으신가 봐요 도란님?”

“...아뇨, 전 바쁜 사람입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여관에 빈방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남는 방이 하나도 없...

“정말이에요. 손님이 안 오니까 가게 문을 닫고 피난을 간 사람이 대다수거든요. 간혹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여관도 다른 도시에서 지원 온 병력이 머무르고 있고요.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실래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하나쯤은...”

잠시 후.

“젠장!!!”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아리엘이 싱글벙글 미소지으며 내려다봤다.

눈에 보이는 여관이란 여관은 전부 들어가 봤다. 하룻밤에 몇 실링씩 하는 고급 숙소부터 곧 폭삭 무너질 듯 허름한 여인숙까지.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날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옘병!!! 왜 방이 남았는데도 대실을 안 해주는 거야?!!”

“거 봐요.”

“으윽...”

빈방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다만 타 도시에서 파병 나온 기사나 용병이 건물을 통째로 점거하고 있는 경우가 잦았고, 나머지 여관은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차 있거나 널빤지로 문을 틀어막고 피난을 가버린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이전처럼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자칫했다간 금화 주머니를 도둑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 하물며 지금은 다른 도시에서 온 용병들도 돌아다니는 실정이니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언데드 때문에 이전처럼 숲에서 잘 수도 없고...’

부 길드장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야 하나...?

터덜터덜 발길을 돌리자 아리엘이 살갑게 물어왔다.

“어디 가요 도란?”

“...일단 배나 채우려고요, 아리엘 님은 이제 신전에 가 보셔야...”

“같이 가요!!”

“....”

고개를 떨구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쯤 되면 체념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는 꼼짝없이 아리엘과 동행해야 할 운명인 것 같으니.

‘아니...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몰라.’

그녀는 신전에서 근무하는 만큼 현 베라스틴에 대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친 모험가들을 치료하며 귀동냥으로 여러 소식을 접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아리엘을 데리고 문을 연 식당 중 적당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한데 자리에 앉자마자 요리사로 보이는 한 남성이 주저하며 다가왔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혹시 장사 안 하시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내놓을 수 있는 메뉴가 몇 개 없습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정면에 앉은 아리엘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내 얼굴을 응시하며 미소지을 뿐이었다.

나는 벽면에 걸린 메뉴판 중 가위표가 쳐져 있지 않은 항목을 빠르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괜찮아요. 저는 바실 버섯 스튜랑 옅은 도수의 과실주로 부탁하고, 이쪽은...”

“같은 걸로 주세요!”

“...라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주방 너머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에선 베라스틴에 도착하고 나서 봐왔던 행인들이 으레 그러했듯 적적한 우울함이 배어나왔다.

음식점 창문 너머, 한산한 거리의 풍경을 눈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많이 힘든가 보네요. 원래 이 시간대면 손님으로 북적거려야 하는데... 가게들도 죄다 문을 닫았어요.”

“물자가 모자라니까요. 오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들도 있어서 요즘에는 행상인조차 베라스틴을 꺼리는 모양이에요. 그나저나 도란 너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야?”

“그야... 네...?”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보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입가에 연연한 웃음을 머금은 아리엘이 보였다. 그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제까지 존댓말 할 거냐니.. 그야 당연히... ”

그녀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새침하게 읊조렸다.

“어차피 도란님이랑 저랑 나이도 같잖아요. 알고 지낸 지도 꽤 됐고. 이제 슬슬 말을 놓을 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

“그, 그러는 아리엘님도... 막상 본인도 계속 존댓말 쓰...”

“그래? 그럼 나도 완전히 말 놓으면 되겠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도란!”

“...젠장.”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 천성이 워낙 밝은 데다가 예전부터 여러 일로 얽힌 탓에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것보다 아리엘 님, 묻고 싶은 게...”

“....”

“하아.... 아리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말해봐, 내가 아는 건 다 말해줄게! 아, 그래도 몸 사이즈라던가 너무 사생활에 관련된 건...”

“이번 사건에 대해서 가르쳐 줘. 카렌이 가르쳐주지 않은 정보도 있을 거 아냐. 게다가 듣자 하니 신전이 그렇게 언데드를 싫어한다던데.”

언데드는 정상적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 마족과 더불어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손꼽힌다. 몬스터 퇴치에 별 관심이 없는 신전조차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정도니.

특히나 이번 사건에 있어서 아리엘을 비롯해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신도들은 매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언데드와 신성력이 상극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아리엘은 살짝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곧바로 말갑게 웃으며 답했다.

“음... 아무래도 그렇지? 더 자세한 건 수사가 더 진척되어봐야 알겠지만.. 동쪽 숲에서 유독 짙은 사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언데드나 괴상하게 변한 마물들이 주로 출몰하는 장소도 동쪽이고! 사람들도 아마 그 어딘가에 이번 사태의 원흉이 있을 거라고 간주하고는 있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는 거겠지. 한 달 만에 이렇게까지 피폐해질 정도니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악화될 텐데...’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보급은 줄어들고 비축된 물자도 바닥날 거다. 혹여나 상수가 오염되기라는 날엔 도시의 존망 자체가 위험하다.

근데 그 전에...

“사기라... 너 그런 것도 감지할 수 있었어?”

“어? 그냥 어렴풋이...? 별거 없어. 그냥 동쪽 숲에서 안 좋은 기운이 폴폴 나오고 있다는 건 확실해!”

“흐음...”

신성력을 다루는 만큼 부의 기운에 민감해서 그런 걸까?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아무 느낌도 못 받았는데...

“도란도 마나를 쓰고 있으니 그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아?”

“마나? 난 마나 쓸 줄 모르는데?”

“어...?”

“....왜 내가 마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건데?”

“우음... 그야... 이상한 기운이 풍기니까? 처음엔 당연히 마나일 줄 알았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조금 기묘하네... 마력은 아닌데... 이게 뭘까?”

아리엘이 입술을 짚으며 갸웃거렸다.

나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충 어떤 느낌인데 그래?”

“음... 잘 모르겠어. 해로운 건 아닌 것 같지만 살짝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진찰해줄 테니 투구 좀 벗어줄래?”

“...되겠냐.”

“아깝다 헤헷...”

“음식 나왔습니다 손님.”

“아, 고마워요!”

“....”

한숨을 내쉬며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바실 향이 풍기는 스튜를 한 스푼 떠올리자 자그마한 건더기가 딸려나온다. 라디와 함께 던전 마을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과 비교하면 몹시 조촐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정도는 된다.

간이 조금 밍밍하게 느껴지는 건 물자가 모자라 소금을 아낄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입가의 면갑을 들추고 허기를 달래고 있자니 아리엘이 턱을 괴며 물었다.

“그럼... 도란, 이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라니?”

“숙소 말이야. 너 이대로라면 지낼 곳도 없잖아, 뭣하면 내가...”

“아니, 절대 안 돼.”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희 집에서 잘 수는 없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머리칼이 탄로 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대한 사유가 남아있다.

내겐 라디가 있으니까.

이전이었다면 모를까 라디와 교제하고 있는 이상 다른 여자의 집에서 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내뱉었지만, 어째선지 아리엘은 되려 묘한 눈빛으로 쳐다봐왔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란. 아무리 그래도 남자를 무턱대고 집에 불러들일 리가 없잖아. 난 그저 좋은 매물이 있으니 소개해줄까 한 건데.”

아.

젠장.

아리엘이 야리꾸리한 웃음을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아니면 혹시... 나한테 이상한 마음 품고 있었어...?”

“그럴 리가...! 나는 단지...!!”

“....농담이야!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도란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면... 조금은 기대했어?”

“...아니, 절대로.”

“푸핫...”

그녀가 소박한 실소를 머금었다. 나는 달아오른 귓불을 식히고자 차가운 음료를 들이켰다. 어째선지 베라스틴에 도착하고 점점 수명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차라리 하루빨리 나머지 파티원이 정해져서 수색에 몰두하는 게 나을지도...

식사를 마친 뒤 각자 비용을 지불하고 음식점을 나서자 아리엘이 곧바로 옆에 달라붙었다.

“그럼... 곧바로 괜찮은 숙소를 소개해줄까? 너도 멀리서 바로 오느라 피곤할 거 아냐.”

“음... 그렇긴 한데... 너 혹시 바빠?”

“응? 그건 왜?”

“...잠깐 그 전에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있거든. 좀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서. 바쁘면 오늘은 일단 여기서 헤어...”

“같이 가자!!”

“그렇겠지...”

나는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베라스틴의 상업지구가 몰려있는 서쪽으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