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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하렘 생존기-155화 (155/375)

〈 155화 〉 베라스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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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베라스틴 #7

부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분수가 있는 중앙 광장을 지나 서쪽 지구에 접어들자 공기가 일변했다. 높고 번들거렸던 건물들은 점차 노후되어 갔고, 작달막한 굴뚝에선 드문드문 검은 연기가 피워올랐다.

고분고분 내 곁에서 따라오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여긴... 상업 단지잖아. 그중에서도 대장간이 몰려 있는... 장비라도 새로 맞추게?”

“장비라... 그것도 맞긴 한데 그 외에도 개인적인 볼일이 있거든.”

“뭔데 뭔데? 말하기 곤란한 거야?”

“그런 건 아닌데... 설명하기 좀 복잡하니까 도착하면 말해줄게.”

“그래?”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며 계속 나아갔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을 헤매다 보니 기시감이 드는 거리가 나왔다. 무너진 담벼락, 색바랜 간판, 이제는 철 지난 건축 양식 따위를 이정표 삼아 거리를 활보하다 보니 비릿한 쇠의 향기에 코가 시큰거려 온다.

나는 열이면 열 그냥 지나쳤을 비좁은 골목길 앞에 멈춰섰고, 안쪽으로 이어진 길목을 향해 홀리듯이 발을 내디뎠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비집어 마침내 다 쓰러져가는 건물 앞에 도달하자 아리엘이 허름한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론디니움 대장간... 용케도 이런 장소에서 영업을 하고 있구나... 도란이 볼 일이 있다던 곳이 여기야?”

“응... 잠시 밖에서 기다릴래?”

“아니, 같이 들어가자!”

“...그래.”

놋쇠 문고리를 비틀고 들어서자 맑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불은 꺼져 있지만 문이 잠겨 있지는 않은 걸로 보아 다행히 장사를 접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쪽 벽에는 먼지 없이 손질된 무구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고, 제각각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발휘했다.

나는 감탄사를 흘리며 눈동자를 빛내는 아리엘을 뒤로하고 전시된 무기 쪽으로 향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내 단도와 유사한, 칠흑빛 장검이.

그 검을 처음 목도했을 때 벌어졌던 이상 현상을 떠올리며 진열창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의 그 장검은 찾지 못했고, 조급함에 시야가 좁아져만 올 뿐이었다.

설마 그새 팔린 걸까....?

그렇게 병장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찰나ㅡ

­슈우욱!!

“도, 도란..! 괜찮아?!!”

어두컴컴한 구석으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왔다. 허나 지금의 나는 던전에서의 전투로 단련된 바, 가게 안쪽에 나와 아리엘 말고도 기척이 하나 더 있다는 건 감지하고 있었다.

재빨리 낚아챈 단창을 내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르신...”

“아, 아니... 불한당이 아니었나..?! 이, 이거 미안하게 됐네 그려...”

“.....”

계산대 너머 통로에서 갈색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덥수룩한 수염과 짜리몽땅한 키, 전형적인 드워프의 체형을 지닌 남자. 처음 봤을 땐 험상궂게 느껴졌으나, 붉은 매 길드의 비아투스 영감을 알고 나니 귀여운 수준이다.

론디니움이 사다리를 타고 천장에 걸어둔 랜턴을 점등하며 난처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네... 해치려 들 생각은 없었네. 난 또 깡패들이 기어들어 온 줄 알고 그만...”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깡패요? 이쪽은 위병이 상시 주둔하면서 순찰하잖아요.”

“음... 이전엔 그랬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베라스틴에 언데드가 창궐하지 않았는가? 치안을 유지할 병력마저 전부 성벽 방비에 돌려버리니 쥐새끼가 날뛰는 게지. 저번에는 이 골목까지 기어들어와 행패를 부리길래 이 단창으로 쫓아냈다지만...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한쪽 눈꼬리를 치켜세운 아리엘이 보였다.

날 헤치려 든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가 론디니움에게 한 판 따질 기세기에 재빨리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내 손아귀에 든 창대를 돌려주며 물었다.

“...어르신, 그건 그렇고 한 석 달쯤 전에 이 대장간에 방문했었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석 달? 인간 꼬맹이는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말이지... 투구라도 벗어 보겠나?”

“...그렇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품 안에서 코볼트 단검을 꺼내자 그가 즉시 반응을 보였다.

“아! 그건 내가 제조한 단검 아닌가! 그래그래.. 이제야 알겠군. F급 모험가가 코볼트 킹을 때려잡았다고 해서 꽤 놀랐었지. 분위기가 바뀌어서 못 알아봤군 그래. 그럼 오늘 목적은 단검 수리인가? 날이 꽤 상했구먼.”

“그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용건은 따로 있습니다. 혹시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소맷자락 안쪽에서 한 물체를 꺼내 진열대 위에 올려두었다. 두터운 나무토막을 칼집 대용으로 끼워둔 물건. 2계층 유적의 석관 안에서 발견했던 단검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워프는 곧바로 돌변하여 날 때려죽일 눈빛으로 소리쳤다.

“자, 잠깐...! 이보게!! 이 무기는 대체 어디서 난 건가!!!”

“일단 진정하시죠. 어르...”

“지금 당장 불게나!!!”

“....던전에서 얻었습니다.”

“던전? 이 무기를 고작 던전에서 구했다는 겐가?! 거짓말도 정도껏...!!”

“정확히는 그 안에 있던 고대 유적에서지만요. 역시나 어르신은 이 단도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역시 두 무기 사이에 연결점이 있는 걸까.

론디니움은 유적이란 단어를 듣고 나서야 노여움을 거두더니 턱수염을 매만지며 수긍했다.

“흐음... 자네 지금 유적이라고 했나? 메다올리눔 던전에 그런 게 있었을 줄이야... 그래, 그렇다면 조금 납득이 가는군. 이 단검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그야 당연하지. 이것과 똑같은 재질로 된 물건을 취급했었으니... 설마 자네 그 장검에 대해 물으려고 찾아온건가...?”

내가 무언으로 긍정하자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경탄했다.

하지만 곧바로 거친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시기가 안 좋았군. 나도 그 장검을 보여주고는 싶네만... 딱 두 달쯤 전부터 갑자기 사라져서 말이지... 안타깝게 됐네.”

“사라져요...? 누군가가 훔쳐 갔다는 말이에요?”

“글쎄다.. 그런 건 아닐 게야. 그 검은 저주받은 물건이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네. 지금까지 그 장검을 처분하고자 땅에 묻어도 보고 사슬에 묶어서 금고에 넣어보기까지도 했지만, 잠시 눈을 뗐다 하면 감쪽같이 원래 위치에 나타나더군. ...잠깐, 근데 이 단검이 정녕 그 장검과 같은 종류가 맞는 겐가?”

“못 믿으시겠으면 한 번 확인해보세요.”

내가 단검을 눈짓하자 론디니움이 독극물이라도 본 듯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며 조심조심 손을 뻗다 말고 포기했다.

“...아니, 난 됐네. 혹시라도 이 단검을 만졌다가 또 대장간에 귀속이라도 되는 날엔 그만한 봉변이 없으니... 어쨌든 자네는 이걸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겐가? 만져도 아무런 이상도 없고 말이지?”

“네, 예를 들면...”

­콰득!!

단도를 내던져 나무 바닥에 꽂자 드워프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가 성을 내기 전에 재빨리 정신을 집중했고, 단도는 검은 증기와 함께 내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슈화아아악!!!

“헛...!”

론디니움이 화들짝 콧수염을 움찔거리며 마룻바닥과 단검을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매끄러운 목제 바닥엔 작은 홈이 파여있을 뿐이었다.

그가 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허허...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소유자에게 돌아온다는 저주받은 특성을 오히려 장점으로 응용하다니... 이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그럼 이제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 장검은 대체 어디로 간 거죠? 또 어떻게 이 가게에 흘러들어온 겁니까.”

“흠... 나도 자세히 말해줄 수 있는 건 얼마 없다네. 그 장검이 사라진 지 두 달 정도가 지났다는 건 이미 말했나? 늘 처치 곤란하던 놈이 하루아침 만에 사라져서 얼마나 기뻤었는지...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이키더니 거친 어조로 토로했다.

“...그래, 출처를 물었지.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이 대장간에 전해 내려온 물건이라네. 듣기로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선대 대장장이에게 남기고 갔다던가... 언젠가 주인이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정체불명의 사내 말인가요?”

“그래! 전신을 칠흑의 갑주로 치장한 사람이라고 들었네만... 흥! 그 놈팡이가 놔두고 간 그 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님이 봉변을 당했던지... 그 탓에 이런 구석진 곳에서밖에 장사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야...!!”

그가 민원이 어쩌고 하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타인의 손길이 닿으면 반발하는 특성을 말하는 거겠지. 장검은 단검보다 면적이 크니 그만큼 저항도 거세지 않을까.

그나저나 두 달 전 즈음이라면 내가 단도를 발견한 시기와 비슷한데... 우연인가...?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게 다네. 더 대답해주고 싶지만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군. 대신 장비를 맞추려거든 내 아까 일도 감안해서 많이 깎아주겠네. 언데드와 대적하려면 팔목 보호대나 각반쯤은 장비하는 게 좋을 거야. 자칫 물리기라도 하면 저주를 뒤집어쓸 수 있으니까.”

“네, 그러면 혹시 칼집도 만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칼집이라... 그 단검에 씌울 것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자 론디니움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읊조렸다.

“그 단검이 놈과 같은 녀석이라면... 꽤나 까다로울 텐데. 뭐... 그래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나흘만 기다리게나. 방어구를 마련할 생각이면 치수도 재고 가고.”

“감사합니다.”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레더 아머는 아델과 니아에게 선물 받은 게 있으니 각반과 건틀릿을 맞출 의향으로 간단히 치수를 재고 건물을 나오자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걸던 중, 줄곧 조용히 있던 아리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 계속 표정이 안 좋던데.”

“그야...! 저 사람, 도란을 헤치려고 했었잖아! 그런데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난 괜찮다니까. 왜 나보다 네가 더 신경 쓰는 거야.”

론디니움이 내게 창을 던졌던 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다른 모험가들이 날 어떻게 대하는지 알면 기겁하겠네.

“그러지 말고 이제 숙소나 알아보러 가자, 여기서 멀어?”

“음... 조금 걸어야 해! 그래도 아마 30분 정도밖에 안 걸릴걸?”

“...그래? 꼭 빈방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네..”

“응! 반드시 있을 거야!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 잠깐, 근데 저거 뭐야?”

“....젠장.”

말을 나누던 도중, 우뚝 자리에 멈춰섰다.

우리의 앞길이 틀어막혀 있었던 탓. 협소한 골목길을 가득 메운 잡동사니를 보고 있자니 불쾌함이 샘솟았다.

그야 우리가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건 없었으니까.

곧이어 나와 아리엘이 지나온 길목에서 우락부락한 사내 수십 명이 튀어나와 우리를 에워쌌다.

“어이~ 거기 형씨. 물을 게 좀 있는데 잠깐 거기 멈춰보겠어?”

“그래그래, 우리가 누군지는 잘 알지? 얌전히 가진 걸 모두 내뱉으면 목숨은 살려 줄게. 하지만 만약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였다간... 갈기갈기 조각날지도 몰라.”

“자, 잠깐...! 형님?! 저 여자 지, 진짜 존나 말도 안 되게 예쁜데요!?! 쟤는 살려서 우리 아지트로 데려가는 게 어때요? 묶어놓고 몇 날 며칠... 히히..”

“그래, 아가씨도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그 예쁜 눈동자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참 유감이잖아. ...그리고 혹시 알아? 나한테 정성껏 봉사하면 잔뜩 귀여워해 줄지. 물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노예상한테 팔아넘기겠지만...! 크하하!!!”

““.....””

역겨운 구취가 풍겨왔다.

상투적인 대사. 상투적인 몸짓.

사내들의 면면에 천박한 웃음이 떠오른다. 지성 따윈 절제된, 욕구만이 번들거리는 시선. 뒷일은 고려하지 않고 충동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만의 분위기가 비천한 언사에 묻어나왔다.

아무리 치안이 불안정하면 이런 일도 발생하기 마련이라지만...

성가시다.

“...죽여도 돼?”

“뭐라고? 죽어도 되냐고? 푸하핫!! 형님! 저 새끼 무서워서 머리가 맛이 간 모양인데요?!”

“크핫핫...! 이거 완전 등신 아냐?! 그야 그렇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서쪽 골목을 주름잡는 검은 전갈...”

“너희한테 물은 게 아냐.”

나는 놈들이 지껄이는 소음을 흘려들었다.

대신 옆에 선 아리엘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절벽에 돋아난 한 떨기 바람꽃과도 같은 그녀에게 앞으로 벌어질 참사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죽여도 될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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