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베라스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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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베라스틴 #8
아무리 나라고 한들 깡패가 시비를 걸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다.
그런 내가 눈앞의 사내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냄새.’
놈들에게선 짙은 혈향이 풍겼다.
단순히 주먹다짐 따위로 흘린 피가 아니라 구역질이 치밀 정도의 혈향. 그 지독한 비린내의 출처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흥건하게 젖은 앞섶이 보였다. 붉게 물든 옷자락에서는 아직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흉흉한 빛이 흐르는 쇠붙이에는 검붉은 자국이 눌어붙어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지 얼마 안 됐어.’
방금 도축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눈앞의 사내들이 그런 건실한 직업에 종사할 리도 없는 노릇. 무엇보다도 지금 내 발치 구석 응달에 고인 피웅덩이가 그들이 조금 전 했던 행위를 방증한다.
하필이면 대장간 골목에 팽배한 쇠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켰던 모양이다.
“죽여도 될까?”
내 옆에 선 아리엘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아픈 기억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으니. 이런 건 나 같은 놈한테나 적합하다.
“.....”
살벌한 이곳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연청색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걸로 끝.
족쇄는 풀렸다.
슈화아악...!
“자, 잠깐...! 저거 뭐야?”
“단검...? 저항이라도 해 보려는 모양인데 그 쬐만한 칼로 닭이라도 잡을 수 있겠냐? 크하하핫!”
“.....”
서서히 전진하며 팔을 뻗자 익숙한 감각과 함께 단도가 자라났다. 미끄러지듯 돋아나는 칼날에 사내들이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실소하며 제각각 무기를 거머쥐었다.
본인들이 사냥을 당할 것이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걸까?
그래, 너희는 그 자만심 때문에 죽는 거야.
“...백은보(白??).”
“엇...?!”
찰나의 날숨에 기척을 지웠다. 발걸음에 회전을 실어 상대의 배후로 파고들었다. 내가 출몰한 장소는 놈들의 등 뒤, 그대로 일격을 꽂아넣는다.
민첩하게 선회하며 허여멀건한 발목을 절삭하자 두 놈이 길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씨, 씨발...!!”
휘이익!!
곧바로 좌측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쇄도해 땅을 박차며 물러났다. 허공을 가른 대거가 담벼락에 부딪히자 새빨간 불똥이 튀어올랐고, 바위 표면을 긁는 억센 소음이 울려퍼졌다.
까드드드드득!!!
“크헉?!!”
강타. 칼날을 회피하며 상대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자세가 무너진 사내의 옆구리에 단도를 박아넣고 떨쳐내자 한 녀석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죽어라!!!”
“....”
일말의 기교조차 없는 일격.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구태여 대응해줄 필요도 없다. 기다란 칼날은 협소한 골목길에 적합하지 않았고, 나는 놈이 담벼락을 긁으며 동작에 제동이 걸린 틈을 타 맥박이 요동치는 손목을 절단했다.
물 흐르듯이 동작을 연결시켜 숨통을 끊자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저, 저 새끼가 우리 형제를...!”
“뭣들 하는 거야!!! 당장 저 새끼를 족쳐!!!”
“으, 으아아아!!!”
대장이 억척스러운 손길로 부하들을 떠밀자 사내들이 고함을 지르며 덮쳐들었다. 다급한 발길이 우르르 몰려들자 협소한 골목길이 괴성으로 가득 차오른다. 첨예한 날붙이는 하늘의 노을을 반사해 사방으로 붉은 반사광을 드리웠다.
나는 잠시 그들을 눈대중으로 훑은 뒤 서서히 걸어나갔다.
“.....”
불쾌하다.
연계 따위는 개나 줘버린 오합지졸. 우왕좌왕하는 시선을 보자 불쾌함이 샘솟았다. 보라, 당장 지금도 저들끼리 엎치락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제 목숨을 버릴 각오조차 되어있지 않다.
던전에서 살았을 적 마주했던 모든 전투에는 생사를 건 중후함이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일말의 무게감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이딴 놈들에게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다니.
“우, 웃어?!! 형님...! 저 새끼 웃는데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죽여!!!”
“간다아아앗!!!”
“....”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스노우 타이거를 쓰러뜨렸을 적, 수정 거미와 맞서던 때처럼 내면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미약하던 술렁임은 점차 번져나가 명확한 구절을 갖추었고, 끝내는 맹렬한 탁류가 되어 소용돌이치기에 이르렀다.
조금은 괜찮겠지.
“아리엘.”
“..어, 어 도란? 왜...?”
“잠깐 눈 감고 있어.”
츠츠츠츠츳...!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목소리에 부응하자 내 발치에서 피어오른 검은 기운이 골목 어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내들이 달려와 무기를 휘둘러왔지만, 나는 그들의 공격이 서로 엉키도록 유도하며 기민하게 대처했다.
그들의 호흡, 발디딤, 성난 목소리, 비좁은 통로에 쓸리는 옷자락이 충분하고 남을 정도의 정보를 가져다주었으니.
어둡게 가라앉은 심상 속, 나는 단도가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몰두했고, 그날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극적인 상황에서 피워 올렸던 힘. 깊은 곳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근원을.
이번엔 좀 다른 놈이다.
츠츠츠츳...
놈들이 이변을 알아차린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자, 잠깐!! 저게 뭐야!!!!”
“마, 마물이 왜 도시 안에!!!! 겨, 경비병들을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다들 침착해!! 당황하지 마라!!!”
골목길 안쪽에서 불길한 형상이 끓어올랐다. 축축한 그늘, 버려진 잡동사니, 깊게 팬 배수로 사이에서 기어오른 형체들이 점차 형상을 거머쥐고 명암을 부풀려 현실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내게는 익숙한, 검게 일렁이는 개미들이.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개체가 있었으니ㅡ
“지네다!!!!”
“저렇게 큰 지네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흑요석 번들거리는 갑각. 교차하는 무수한 다리. 위아래로 꿈틀거리며 먹잇감을 찾는 한 쌍의 더듬이까지.
흠칫 놀라며 긴장하는 아리엘의 팔을 맞잡아 안심시키며 사내들에게 읊조렸다.
“저 녀석은 지네가 아니라 노래...”
“뭔 개소리야!!!!”
깔끔하게 부정당했다.
부글거리는 속을 참고 있자니 한 녀석이 날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야, 거기 너!!! 일단 지금은 협력하자!!”
“내가 왜?”
“왜, 왜냐니...? 너도 살고 싶을 거 아냐!!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일단 힘을 합쳐야... 아 아..”
“....”
사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아연실색하며 주저앉았다. 이어서 그 눈동자가 경악으로 벌어진다. 그도 그럴 게, 건장한 성인 남성 덩치의 배를 웃도는 노래기가 내 발치를 애교스럽게 문대고 있었으니까.
충격으로 떠졌던 눈동자가 상황을 이해함에 따라 절망으로 차차 점철되어간다.
“...협력하자고? 웃기는 놈들이네. 방금 내가 했던 짓은 벌써 까먹었냐.”
동료의 원수와 동맹을 제안할 정도로 지조도 없는 놈들이라니.
나는 단단한 외골격에 둘러싸인 노래기의 머리를 매만지며 명령했다.
“먹어치워. 저기 저 대장만 빼고.”
우옹...
카각!! 카가각!!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 부대가 행동을 개시했다. 개미들은 신속하게 자세를 낮추고 담벼락을 기어올랐으며, 노래기는 무수한 다리를 움직여 상대를 움켜쥐었다.
비록 과거에 내 심상 속에서 목도했던 정경에 비하면 조촐한 숫자일지 몰라도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빨리빨리 처리하자. 사람들이 오기 전에.”
키익!!
개미가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일제히 뛰어내리더니 난폭하게 사내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사양 없는 몸놀림에선 원초적인 본능과 끝없는 식탐이 전해져왔다.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게 느껴지는 광경.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끼며 전장을 관조했다. 사내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저항했지만, 비좁은 골목에서 거대한 개미 떼거리의 습격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제, 제길...! 너희들 여기 꼭 지키고 있어!! 나는 급한 볼일이...!! 끄아아악?!!”
“....어딜.”
대장이 등을 보이고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단도를 날려 종아리를 꿰뚫었다. 뒤이어 노래기가 비대한 몸뚱어리로 퇴로를 틀어막자 깡패 집단은 골목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했고, 종국엔 검붉은 체액 웅덩이만을 남긴 채 개미들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더는 먹을 게 없어진 개미 무리가 주변으로 눈독을 돌리기에 역소환 한 뒤 두목에게 다가갔다.
짜악!!
“컥...?! 여긴... 으억!?! 너, 넌 대체...!”
“...고작 그거 좀 맞았다고 기절하기는. 이제야 정신이 좀 드냐?”
“이, 이게 어떻게 된...! 제, 제길!! 제발 목숨만은 살려줘!! 뭐든 할... 끄아악!!”
“....”
슬금슬금 그의 오른손이 대거로 향하기에 손가락을 절단했다.
놈이 잘려나간 단면을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 밑에 단도를 들이대며 속삭였다.
“...시끄러워. 너 지금까지 베라스틴에서 몇 명이나 죽였냐?”
“너, 너희가 처, 처음... 끄아악!!!”
“....”
“스, 스물!! 아, 아니... 열 명 밖에 안 죽였어...!! 이, 이번엔 진짜야.. 그래도 거, 거의 다 빈민촌 고아들이었다고!!! 그런 새끼들 한 둘쯤 없어져도 아무...!”
“....자랑이다 새꺄.”
“끄어어어억!!!!”
“.....”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도시 상황이 안 좋다지만 대낮부터 이런 잡범이 설치고 다닐 정도라니.. 덕분에 현재 베라스틴의 치안이 얼마나 개판인지 잘 알겠다.
‘이대로라면 아리엘을 혼자 돌아다니게 두는 것도 불안하겠는데...’
사제를 건드렸다간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바, 정상적인 사고가 박힌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테지만 그녀의 외모라면 없던 사심도 생기게 할 수 있다.
언데드가 창궐하는데 이따위 놈들은 사람이나 헤치고 다니다니.
순간 울화가 치밀어 단도로 사내의 허벅지를 내려찍던 찰나, 불현듯 부드러운 온기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왔다.
아차.
“....미안. 보기 좀 흉했지...? 잠깐만 뒤돌고 있어 줘. 금방 끝낼 테니까.”
전투에 몰두한 나머지 줄곧 아리엘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망각했다.
허나 사내의 숨통을 끊고 상황을 정리하려던 차,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말... 거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잘 봐 도란.”
아리엘이 허리춤 옷단 아래에서 자그마한 주머니칼을 꺼내들었다. 내가 채취해 준 약초의 껍질을 벗기거나 뿌리를 다듬는 데 사용하곤 했었던 물건.
이것이 다른 용도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도란, 허벅지는 다른 부위보다 신경이 덜 몰려있어서 통증이 덜해. 고통을 주려는 게 목적이라면 눈이나 이빨을 적출하거나...”
콰드득!
“끄아아아아아아악!!!!!”
아리엘이 첨예한 날끝으로 남자의 손톱 밑을 파헤치자 골목길에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녀는 사내의 옷자락을 잘라내어 주둥아리를 틀어막고는 행위를 거듭했다.
“잠깐 붙잡고 있어 줘 도란. ...이렇게 신경이 몰려있는 부위를 노리는 게 효과적이야. 여기서 중요한 건 동맥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점이야. 만약 실수로 치명상을 입히게 되면...”
아리엘이 나직하게 주문을 읊조림과 동시에 손바닥에서 따스한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나도 몇 번인가 목격한 치유의 권능. 하지만 평소에는 더없이 온화했을 광휘가 그녀의 의도를 짐작한 지금은 한없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아리엘은 막 터오르기 시작한 새싹을 짓밟듯이,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한 남자의 손가락을 칼날로 꿰뚫었다.
“이렇게 하면 상대에게 치명상을 주지 않고도 고통을 가할 수 있어. 잘 봐둬, 심문할 때 유용하니까.”
“....”
멍하니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베라스틴에 살면서 수도 없이 그녀를 봐왔지만, 설마 이렇게 냉혹한 일면이 존재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야 아리엘은 날 보면 항상 해사하게 웃어주곤 했으니까.
어느새 축 늘어진 남자를 사로잡고 있자니, 그녀가 노래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깔끔하게 정리해줄래?”
“....”
커다란 벌레가 인간의 머리통을 으적으적 씹어먹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너, 너... 아무렇지도 않아...?”
“응? 뭐가.”
“아니... 그야... 사람을 해치는 게...”
괜히 아리엘에게 치료원의 천사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평소 쾌활한 태도의 이면에는 상대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는 배려가 담겨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내가 그랬고, 지금도 그녀를 선망하는 수많은 사람처럼 내 머릿속의 아리엘은 순수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리엘이 내 투구에 튄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야... 도적이잖아? 도적을 살해하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면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거야. 이기적인 행동이라구. 기사나 모험가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면서 막상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건 꺼려하다니...”
“아...”
“또... 예전부터 각오했거든. 다쳐서 병동에 실려 오는 모험가들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그래서 결심했어. 군인이나 모험가들이 범죄자를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오더라도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자고. 그리고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망설이지 않기로.”
“.....”
머리를 한 대 세게 강타당한 기분이다.
세계가 바뀌면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뀐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간 이곳 세계에 완벽히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나도 물이 덜 빠졌나 보다.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면모에 내심 놀라고 있자니 그녀가 덧붙였다.
“그리고 피 정도야 워낙 많이 봐왔으니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까지 내가 떠나보낸 환자의 수가 여태껏 도란이 본 시체를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을걸?”
“그런가...”
“그래,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아리엘이 오물오물 열심히 입을 놀리는 노래기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이 지네는... 도란이 불러들인 거야? 설명해줄 수 있어?”
“.....”
나는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무거운 입술을 뗐다.
“얘는 지네가 아니라 노래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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