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베라스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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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베라스틴 #9
“허억... 헉.. 쫓아오는... 사람.. 없지..?”
“하아... 흣.. 그, 그런 것 같아...”
“흐...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네.”
무릎을 짚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숨이 차오를 지경까지 뛰었지만, 다행히 한적한 길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이 근처 가로수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달린 건 정말 오랜만이야. 꼭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기분이었어!”
“어떤 의미에서 도피가 맞긴 하지만...”
노상강도를 죽이는 건 정당방위기에 위법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내 능력이 어디 평범한가. 자칫하다간 이상한 오해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 하물며 이렇게 뒤숭숭한 시국에는 더욱더.
“....”
문뜩 고개를 내려 손안에 든 단도를 쳐다보았다. 넝쿨에 이어 벌레까지. 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뭘까?
“그나저나... 괜찮겠어?”
“응? 뭐가?”
“아니... 옷 말이야. 내 로브는 빨면 그만이지만 그건...”
아리엘의 옷차림을 힐끗 흘겨봤다. 그녀의 살결처럼 새하얬던 원피스는 어느새 시뻘건 피로 얼룩져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추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리엘은 전혀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대답했다.
“괜찮아! 비슷한 게 많이 있거든. 근데...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오해할 테니 가리긴 해야 할 것 같네..”
그녀가 내 어깨에 팔을 뻗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로브를 벗어주자 아리엘은 옷감 안팎을 뒤집고 제 몸에 덮어써 핏자국을 가렸다.
그녀가 옷깃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음, 도란의 향기가 나!”
“무슨... 피비린내밖에 더 나겠어?”
“에이... 재미없게.. 자, 그럼 이제 설명해줄래? 아까 그 벌레는 뭐야?”
“....일단 걷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분수가 있는 중앙 광장으로 향하며 서두를 열었다. 내 능력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밝힐 예정이었으니. 어차피 한동안 같이 파티를 짜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내용이었다.
숨기고 있다가 들킬 바엔 미리 말해두는 게 나을 터, 애초에 던전에서 이상 현상을 겪었을 때부터 그녀에게 상담할 생각이기도 했고.
혹시 아리엘은 뭔가 알고 있을까?
고대 유적을 발견했을 당시의 상황부터 시작해 자초지종을 털어놓자 아리엘이 손가락으로 뺨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응... 그러니까...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이란 말이지? 그 단도를 손에 넣고 나서부터 그랬고.”
“그래, 아직 자유자재로 발현하는 건 무리지만... 내 감정이 고조됐을 때 발동하는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 혹시 비슷한 현상 들어 본 적 있어?”
“글쎄... 혹시 그밖에 다른 건 없어? 이상한 느낌이 든다거나...”
“으음... 전혀 감이 안 잡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넌 사제니까 저주에 대해 잘 알잖아.”
“응... 그렇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잠깐! 설마...? 도란, 혹시 내가 직접 만져봐도 될까?”
“그건 좀... 아까도 들었겠지만, 나 이외의 사람이 건드리면...”
“괜찮아~ 괜찮아~!”
아리엘이 쾌활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가까이 붙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 내 경험상 이렇게 스위치가 들어간 아리엘은 아무도 못 말린다.
한숨을 내쉬며 단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살짝만, 살짝만 건드려야 한다? 혹시라도 이상하면 바로...”
“물론이지!!”
아리엘은 거리낌 없이 팔을 뻗더니ㅡ
파지지직...!
“꺄앗!!!”
“괘, 괜찮아...?!!”
황급히 팔을 뻗어 허리를 지탱했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한 스파크가 그녀를 덮쳤으니까.
아리엘이 손바닥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야야... 고마워, 난 괜찮아! 이거 엄청 따끔하네... 원래 이렇게 아파?”
“아니... 분명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부축해줄까?”
“응...? 아냐 괜찮아! 조금 얼얼한 게 전부니까! 혼자서도 걸을 수.... 앗...! 가, 갑자기 다리가...! 그럼 혹시 숙소까지 업어줄 수 있겠어?”
“...보니깐 멀쩡한 것 같네.”
넉살 좋게 엄살을 부리는 아리엘을 똑바로 일으켜주며 물었다.
“그래서... 뭐 좀 알아냈어?”
“응... 그게 말이지.... 사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이 단검이 굉장히 비범한 물건이란 건 확실한 것 같아. ...그럼 다음번에도 그 지네 볼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지네가 아니라 노래기...”
“뭐 어때, 둘이 비슷하잖아!”
“...완전 다르거든..”
아예 별개의 생물이다. 더듬이의 모양이나 다리 수는 물론이고 식성과 품고 있는 독의 종류까지 현저하게 다르다. 무엇보다도 지네는 바싹 구우면 그럭저럭 먹을 만하지만, 노래기는 식감이 끔찍할뿐더러 훨씬 역한 맛이 난다.
어떻게 아냐고?
그 망할 아버지가 내 입에 처넣었으니까. 둘이서 오지에 표류 되었을 당시 개미 수프나 지네 튀김 등 살아남기 위해 안 먹어본 괴식이 더 드물 정도다.
입안 가득 상기되는 떫은맛을 애써 무시하며 계속 걷자니 큰 대로 너머로 거대한 분수가 보였다. 그새 중앙 광장에 도착한 모양.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돼?”
“나만 따라오면 돼!”
주위를 둘러보며 멈춰서자 아리엘이 자신 있게 앞장섰다. 하지만 신이 나 앞서나가는 그녀를 뒤따르다 보니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한다. 그야 그럴 만도 한 게...
“잠깐...! 너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어디냐니, 숙소 알아보러 간다며?”
“그렇긴 한데... 이 가도는 북쪽 구역으로 이어져 있는 길이잖아.”
“응, 근데 그게 왜?”
“왜냐니...”
북쪽은 빈민촌이 모여있는 남쪽과는 정반대 구획, 즉 부자들이 사는 동네다.
나도 베라스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길을 잃고 잘못 흘러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는 옷차림도 너저분했던 시기라 얼마나 당황했던지... 온몸에 부티가 흐르는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와 도망쳐나오듯 구역을 벗어났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저기에 숙소가 있는 거야?”
“응!”
“....”
‘설마 하룻밤 숙박에 몇 골드씩이나 하는 여관을 소개해주는 건 아니겠지...’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계속 걸었다. 북쪽 거리에 접어들자 울퉁불퉁했던 노면은 곱게 다듬어진 석제 보도블록으로 변했고, 높게 솟아오른 건물들은 제작기 반들거리는 광택을 흘려댔다.
대체 돈을 어떻게 처발랐으면 저런 빛이 날까.
조금 주눅이 든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불현듯 아리엘이 가도를 벗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북쪽 지구에서도 외각 구역. 추운 날씨에 앙상하게 변해버린 잡목과 소복하게 쌓인 낙엽을 헤치며 걷자 큼지막한 정문이 나타났다. 견고한 철창 주변으로는 드높은 담벼락이 늘어져 있었다.
아리엘은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자그마한 은색 열쇠 꾸러미를 꺼내... 응...?
“자, 잠깐!! 네가 왜 열쇠를 가지고 있어?!!”
“응...? 그야... 우연?”
“우연은 무슨 개뿔...!! 너, 너 아까 전엔 자기 집 아니라고 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
“흥... 잠자코 따라와 도란.”
그녀는 가볍게 내 의문을 일축하고는 널찍한 부지 안쪽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 뒤를 쫓아 섬세하게 깔린 돌길 위를 거닐자 주위를 장식한 작달막한 관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상록수의 푸른 빛을 띤 정원은 언데드의 여파 속에서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마치 이곳만 세상과 동떨어진 별개의 공간인 것처럼.
석양을 반사해 반짝이는 황금빛 연못에 감탄하며 걷던 차 문뜩 고개를 드니 어느새 커다란 저택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두 층으로 이루어진 벽돌 건물은 제법 멋들어진 운치가 흘렀고, 고즈넉한 담쟁이 넝쿨로 외벽이 둘러싸여 있었다.
아리엘이 손바닥을 펼치며 태연하게 외쳤다.
“바로 여기야 도란! 어때, 괜찮지?!”
“너 인마... 도대체...”
욱신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기껏 데려온 장소가 이런 대저택이라니... 아무리 변두리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 규모면 한 달 임대료만 몇십 골드가 들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이런 저택을 평범한 모험가 따위에게 대여해줄 리도 없는 노릇. 저명 인사나 하이랭커 등 어느 정도 신분이 보장된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녀는 한 치의 걱정도 없는 밝은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미 주인이랑 얘기 다 해놨으니까! 이 저택은 원래 어떤 귀족이 별장으로 쓰던 곳인데 이번에 피난을 가면서 나한테 맡기고 갔어! 도란이 이곳을 써 준다면 주인도 기뻐할 거야!”
“...그래? 하지만 비용이...”
“어... 필요 없어!”
“....”
수상하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의혹을 애써 무시하며 안쪽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타다다닷!!! 텁!!!
“....뭐하냐.”
“아, 아니 그냥... 운동..?”
아리엘이 황급히 달려나가더니 등으로 대문 옆에 걸린 문패를 가로막았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히 아.리.엘.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비켜.”
“시, 싫어..!”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곳을 별장으로 쓴다는 귀족이 바로 너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이리 내!!”
“꺄, 꺄아읏?!!”
그녀가 황급히 문패를 잡아뜯더니 품에 감싸안았다. 내가 억지로 그 팔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아리엘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이상야릇한 신음을 흘리기에 하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금일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어쨌든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 된다는 거지?”
“그, 그래... 흐... 도란 힘 진짜 세네?”
“...들어간다.”
“아, 잠깐 열쇠 여기 있어.”
“....”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열쇠 꾸러미로 대문을 열자 내부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려하다기보단 고풍스러운 엔틱 가구로 장식된 실내. 하지만 뽐내는 기색 없이 배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주인의 탁월한 미적 감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발장 위에 희미한 먼지가 쌓여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인 마석등을 키며 말했다.
“도란이 올 줄 알았으면 청소라도 해 두는 건데...”
“괜찮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한걸. ...오히려 지나치게 과분해.”
“그래? 다행이네... 그럼 간단하게 집안을 안내해줄 테니 따라와! 일단 여기가 거실이고 저긴 응접실! 저 방은 내가... 아, 아니...! 집주인이 차를 마실 때 쓰던 공간이고... 윗층으로 올라가면 욕실이...”
“잠깐, 여기에 욕실이 있어?”
“응! 구경할래?”
“어, 그건 좀 궁금한데...”
재빨리 그녀가 건네준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이후 계단을 올라 여러 방이 늘어선 2층 복도를 지난 뒤 한 중문을 열어젖히자 널따란 욕실이 나타났다.
아리엘이 우다다다 달려가 욕실의 한쪽 면을 차지한 통유리창과 욕조를 가리키며 콧대를 으쓱거렸다.
“어때 도란?! 최고지!? 여기야말로 이 별장의 최고 자랑 중 하나라고!! 온욕을 즐기면서 유리창으로 안뜰을 내려다볼 수도 있어! 도란도 한번 해 보면 마음에 쏙 들...”
“야.”
“응? 어, 어 왜 도란...?”
“너 정체가 뭐야.”
“으응...? 정체라니? 난 그냥 평범하게 치료원에서 일하는 소시민...”
“그게 말이 되냐!!”
이 세계에서 유리 제품은 상당히 고가에 속한다. 하물며 이처럼 투명하고 불순물이 적은 유리를 구매하기 위해선 금화를 대체 몇 자루나 들이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게다가 이 대형 욕조는 통짜 대리석이 아니던가.
“너 솔직히 불어. 사실 알고 보니 귀족 태생이라던가...”
“에이...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어떻게...”
“그럼 치유사 월급으로 이런 저택에 사는 건 말이 되고?!”
“그, 그러니까 이 건물은 내 게 아니라...”
“대문에 떡하니 네 이름이 걸려있는데 퍽이나 아니겠다...! 솔직히 불면 봐줄게. 셋 센다. 하나... 둘...”
“그, 그러는 도란도...! 맨날 나한테만 얼굴 안 보여주면서! 치사하게 그러기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젠장.”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무겁게 옥죄여 드는 투구를 의식하며 시선을 피했다. 무심결에 세밀한 문양이 음각된 수도꼭지를 비틀자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어딘가에서 펌프로 끌어오기라도 하는 모양. 던전 마을에서 라디와 묵었던 호텔보다도 훨씬 고급진 설비다.
아리엘이 곧바로 설명해왔다.
“물은 근처 냇가랑 파이프로 이어져 있어. 정화 마법이 걸린 마석을 썼으니 수질도 문제없을 거야. 덕분에 매일 우물가에 다녀올 필요도 없다구!”
“...이 정도면 그냥 지구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곧바로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옆에 있는 벽난로를 사용하면 조금 번거롭긴 해도 충분히 물을 데울 수 있을 거다. 사실 불 마석을 이용하면 훨씬 간편하지만 그건 폭발물로 오용될 소지 탓에 민수용으로는 거래되지 않으니까.
...잠깐 불 마석? 그러고 보니 분명 유적에서 비슷한 걸...
“그럼 도란은 잠시 자리 좀 비워줄래? 나 빨리 씻고 나올게.”
“...뭐? 지금 여기서?”
“응!”
“갑자기?!”
“그야... 찝찝하잖아, 이거 봐.”
아리엘이 내게서 빌렸던 로브를 들추자 온통 시뻘겋게 물든 원피스가 드러났다. 비단결처럼 고았던 그녀의 은발 또한 붉게 얼룩져 있다. 피로 흥건한 로브를 뒤집어썼으니 당연하지...
그 모습을 보니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갈아입을 옷은 어쩌게. 뭐하면 내가 밖에서 사 올까?”
“아니 괜찮아, 옷방에 여분 옷이 있거든!”
“....그래, 그럼 난 정원이나 둘러보고 있을게.”
“아, 응!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발걸음을 돌려 욕실을 나서려던 찰나, 살짝 부끄러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내 발길을 붙들었다.
의아하게 그녀를 돌아보자...
“여기... 저 정원에서 살짝 비치거든...? 그러니까 엿보면 안 된다..?”
“....”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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