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59화 (159/375)

〈 159화 〉 베라스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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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베라스틴 #11

“그러니까 여기가 바로 그 도서관이란 말이지...? 공동묘지에 대한 구절을 읽었던...”

“음... 아마도? 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베라스틴에 도서관이라고는 이곳밖에 없으니까!”

“조금 긴장되네...”

아리엘이 말했던 매장지. 나는 그곳에 이번 사태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언데드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몹시 드물다. 이렇게까지 놈들이 창궐한 데에는 응당 원인이 있을 터. 그 발단의 소인을 제거하면 이번 사태도 해결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장소는 언데드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옛 공동묘지가 틀림없고.

‘지금쯤 모두가 그 매장지를 찾고 있겠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잔디 깔린 부지를 가로질렀다. 멋들어지게 다듬어진 정원에는 고급스러운 튜닉을 입은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드문드문 엿보였다. 과연 상류층이 이용하는 시설답게 호화롭게 가꾸어진 모습.

“....”

거북하다.

이 세계에서의 도서관은 지구와 조금 다르다. 값비싼 서적들이 즐비한 장소일뿐더러, 중요 군사 자료를 보관하는 용도로도 쓰이곤 하니까. 특히 도시 인근의 지형이 상세하게 묘사된 지도 같은 건 고위 군 간부가 아니면 열람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샐러맨더의 소재로 된 레더 아머를 불안하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리엘, 나 지금 괜찮아...? 혹시 옷차림 때문에 쫓겨나거나 하는 건...”

“응... 아주 멋져! 꼭 이야기 속 백마 탄 기사님 같은데? 아, 투구만 벗으면 완벽할 텐...”

“아니, 네 개인적인 감상 말고 객관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정말인데? 그야 도란 키도 엄청 크잖아. 무슨 옷이든 잘 어울려.”

아리엘이 높게 발돋움하며 키를 재는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 입가에 걸린 총명한 미소를 보자 내심 위축된다. 진열창의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물방울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그녀와 달리 나는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아리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날 잡아끌었다.

활기찬 손길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사서장으로 보이는 풍만한 중년 여성이 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오홍홍~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저희 베라스틴 시립 도서관에 잘 오셨습니다. 자고로 사람은 마음의 양식을 쌓아야 성숙해지는 법이지요. 실례지만 두 신사 숙녀분들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

부드러운 어조지만 그와 상반되는 눈동자. 상대의 수준을 가늠해 보는 듯한 눈빛.

아리엘이 허리춤에서 은빛 플레이트를 꺼내자 나도 붉은 매 길드 패를 꺼내들었다. 혹여나 입장을 반려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사서장은 두둑한 살집이 박인 손으로 내 신분증을 매만져보더니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커다란 입술을 벌렸다.

“오호호~ 환영합니다. 이건 제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마음껏 즐기시다 가시면 됩니다. 이용료는 1실링이고 한 번 외부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지불해야 하니 이 점 유의하세요~?”

“....”

제길.

뼈아픈 지출을 감내한 뒤, 뒤통수에 들러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도서관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 물류 창고를 연상시키는 대형 책장에는 적어도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을 법한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엮어 만든 도서가 빼곡하게 들이차 있었다.

마치 책으로 이루어진 수림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듯한 정경.

조금 더 걸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어휴 화장이 무슨... 두꺼비 마물인 줄 알았네. 향수는 뭘 썼길래 그리 지독한지...”

“그러게... 솔직히 나도 조금 힘들었어..”

아리엘이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코를 부여잡았다. 피부가 워낙 투명하다 보니 쉽게 티가 난다.

전방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럼... 어쨌든 여기에 묘지의 위치가 적힌 책이 있다는 거지...? 혹시 어디였는지 기억나?”

“으음... 전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일일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래? 그럼 일단 흩어져서 뒤져볼까? 역사 관련 코너를 중점으로 둘러보면 될 것 같은데.”

“응! 난 저쪽부터 살펴보고 올게!”

아리엘이 신이 난 아이처럼 해맑게 대답하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져서 탐색을 개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 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이 방대한 서적들을 다 훑어보려면 꼬박 한나절을 투자해도 모자랄 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활자를 잘 읽지 못한다.

제법 그럴듯한 고서를 꺼내들었지만 당최 무슨 내용인지 알아먹을 수 없어 포기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대로라면 그냥 아리엘한테 맡기는 수밖에 없겠네...”

헛되게 시간을 낭비하며 골머리를 썩일 바엔 차라리 적당한 책이나 읽으며 기다리는 편이 났겠다.

사다리를 타고 책장을 정리하는 사서를 지나쳤다. 중후한 원목 선반에 가지런히 꽂힌 장서를 손으로 훑으며 거닐다 보니 이따금씩 재밌어 보이는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보자... 고양이 수인의 성감대를 파헤쳐보자.. 안디라 신의 흑마법.. 검은 비가 내리는 곳 마계 대륙에 대해서.. 세계 마물 백과 코볼트부터 드래곤까지 모든 몬스터의 생태계를 총망라...?”

온갖 흥미를 유발하는 타이틀이 범람했지만 그중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세상에 없던 쾌락~!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밤 기술 마스터...! 상대를 눅진눅진하게 녹여...”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발길이 가는 대로 오다 보니 어느새 구석진 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자...

“이, 이럴 수가...!”

횡재다.

이렇게 진귀한 보물이 이런 곳에 잠들어 있었을 줄이야. 그간 내가 갈구하던 모든 테크닉이 이 서적 안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지식의 보고 그 자체.

삽화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이 세계의 활자가 익숙지 않은 나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도중ㅡ

“도란, 뭐 봐? 혹시 찾았어?!”

“어, 어?! 저, 저리 가!!!”

등 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책장을 덮고 물러났으나 아리엘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속도로 내 손에서 서적을 낚아채갔다.

“뭐야 뭐야~? 왜 그렇게 당황해! 혹시 재밌는 책이라도 읽고 있었어?”

“그, 그건 안 돼!!”

“흐응~ 어디 보자... 세상에 없던 쾌락... 쾌, 쾌락? 녹진녹진...?!”

“....”

종이를 넘기는 아리엘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머리 위에서 김을 뿜어댈 기세로 외쳤다.

“이, 이건 음서잖아!!!”

“쉬, 쉿 목소리 낮춰...!! 그, 그러니까 내가 보지 말라고 했잖아!”

“...은화까지 지불하고 도서관에 들어왔는데... 그렇게나 야한 게 보고 싶었어?”

“아, 아니 오해야!! 잠깐...! 잠깐 뭐가 있나 구경만 좀 한 거야!!”

“그런 것치곤 꽤나 열중해서 보고 있던데... 내가 몇 번이나 뒤에서 불렀는데 대답도 안 했잖아.”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시선을 피하고 망연하게 서 있자니 아리엘이 빠르게 내용물을 살피고는 힐끗힐끗 내 얼굴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란도 이런 거에 관심 있어?”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야 당연히 있지. 라디한테 써먹어야 하니까.

“그, 그래...? 하긴... 도란도 남자애니까.....”

그러자 아리엘은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두 손으로 공손하게 책을 돌려주었다.

나는 곧바로 그 도서를 책장에 꽂아 넣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라도 찾았어?”

“아, 그게 말이지... 조금 곤란하게 됐어.”

“...왜?”

“으음... 잠깐 와볼래?”

그녀가 내 소매를 붙잡으려다가 멈칫했다.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기자 아리엘이 앞서나가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미로같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을 오 분쯤 가로지르니 그녀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멈춰섰다.

“아마도 저 안에 있는 것 같아..”

“젠장...”

아리엘이 가리킨 곳은 굵직한 철창으로 막힌 별개의 구역.

입구 위에 붉은 글씨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힌 철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해?”

“응... 아까 그 사서장한테도 물어봤는데... 꽤 오래전에 여기로 옮긴 것 같아. 다른 데도 다 둘러봤는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구...”

“큰일이네... 그 묘지에 단서가 있는 건 확실하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그렇다면.... 저기 잠시 뭐 좀 여쭐 수 있을까요?”

마침 한 직원이 수레에 책을 싣고 근처를 지나가는 중이었기에 정중히 불러세웠다.

직원이 멈춰서며 고개 숙여 응대하자 눈앞의 철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이 안쪽에 있는 도서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금서실 말인가요? 이 안에는 윤허를 받은 귀족만이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귀족 중에서도 특별히 영주님의 승낙을 받은 사람만이 열람할 수 있죠.”

“...영주의 승낙이요? 왜 그렇게까지...”

“이곳에는 이교도의 사악한 주술이 적힌 마도서를 비롯해 각종 귀중한 군사 자료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혹시 모를 상황으로부터 손님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제길...

“...그럼 영주의 허락을 구하기까지는 얼마 정도 걸릴까요?”

“음... 제가 봐왔던 분들을 예시로 들면... 빠르면 넉 달에서 길게는 한 해까지 걸리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불안정한 시기가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영주님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여있을 테니까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하아.”

사서가 떠나가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선 도저히 방법이 없다. 신분이야 둘째 치더라도 출입 허가를 받기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운이 좋아 넉 달 만에 승낙을 받더라도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을 거다. 무엇보다 반드시 허락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간신히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끊기는 건가...?

“어떻게 하지...”

아득한 심정으로 철창을 붙잡은 채 고민하고 있자니 아리엘이 내 소매를 툭툭 잡아당기며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뭐...?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응... 근데 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일단 들어는 보고.”

“그래...? 그럼 귀 좀 줘볼래?”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

“으... 괜찮을까...?”

“...네가 먼저 꺼낸 말 아니었어?”

“그, 그건 그렇지만... 막상 하려니 떨려서...”

“무서워? 그렇다면 이제라도...”

“아니, 엄청 두근거려!”

“그렇겠지...”

보름달이 뜬 심야.

휘황한 달빛이 떳떳하지 못한 두 남녀를 비추었다.

북쪽 거리의 대로변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등불로 가득했다. 언데드에 대한 소문으로 수군거리던 행인들은 저마다 내일에 대한 불안을 등에 이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환한 눈동자로 길가를 주시하는 올빼미와 담벼락 위를 활보하는 고양이가 사람들의 빈자리를 메꾸었다.

우리는 구름에 달이 가려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동을 개시했다.

“정말로 경비 병력이 얼마 없네...”

“그치? 여긴 시립 시설이니까 위병도 전부 영주성 소속이잖아.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에는 경비 대부분이 성곽 순찰에 할당되어 있을 테고! 어때, 나의 혜안...”

“쉿... 신난 건 알겠는데 목소리 좀 낮춰.”

“...응!”

아무리 삼엄해 보이는 시설이라도 빈틈은 있는 법.

은밀하게 담장을 기어올랐다. 담벼락 위에 날카로운 창살이 박혀 있었지만 방범창이 으레 그렇듯 모진 비바람에 녹이 슬어 무뎌져 있다. 나는 아리엘이 쉽게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 주었고, 위장을 위해 갈아입고 온 흑색 로브를 휘날리며 사뿐히 도서관 부지 안쪽에 착지했다.

혹여나 소리를 듣고 경비병이 달려오는 건 아닐까 나무 뒤에 기대며 숨죽였지만 다행히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

안전한 걸 확인하자 똑같이 검은 의복으로 갈아입은 아리엘과 수신호로 소통하고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관목 사이로 드문드문 빛을 발하는 갑주들을 지나쳐 건물에 도달한 뒤로는 앞서 걸쇠를 풀어두었던 창문으로 침입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었을 테지만 언데드의 여파로 경비가 분산된 지금이라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었다.

“휴... 어찌저찌 들어오는 데에는 성공했네..”

“그러게... 마지막에 발각되는 건 아닐까 엄청 조마조마했어.”

“...그래도 아직 긴장 풀지 마. 나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응, 물론이지!”

“.....”

그녀의 팔뚝을 다독이고 앞서나갔다.

이내 빼곡히 들이찬 검은 음영들을 올려다보며­

‘...이번 일을 마치면 어마어마한 보상이 기다린다는 거지...?’

난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 있다.

그런 생각을 뇌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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