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60화 (160/375)

〈 160화 〉 베라스틴 #12

* * *

[160] 베라스틴 #12

일단은 시야가 암흑에 적응될 때까지 기다렸다.

불이 꺼진 뒤의 도서관은 레코딩이 끝난 녹음실처럼 고요했고, 엄숙한 장례식장에 비견될 정도로 묵직한 적막이 흘렀다.

옆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숨소리를 의식하며 무거운 침묵을 깼다.

“긴장했어...?”

“조, 조금...? 방금까지는 마냥 신났었는데 막상 흥분이 가시고 나니까...”

“...괜찮아.”

그녀의 은발 위로 덮어쓴 후드를 푹 눌러주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떨리는 건 나도 매한가지. 무단 침입을 거행하고 있다는 건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범법 행위가 어디 한두 개인가.

차가운 날숨에 긴장을 실어 흘려보내고 천천히 앞서나갔다.

­삐걱.. 삐걱...

“....”

아리엘은 살며시 내 허리춤을 붙잡은 채로 따라왔다. 그녀의 손길에선 평소의 쾌활함 대신 다분한 염려가 묻어나왔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아니다. 시꺼멓게 들이찬 거대한 책장들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으니까.

창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하며 청각을 곤두세우고 나아가다 보니 익숙한 철창이 나왔다.

미리 준비해둔 철사를 꺼내 능숙하게 자물쇠에 넣고 쑤시자 아리엘이 의아하게 쳐다봐왔다.

“도란...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런 걸로 열리는 거야...?”

“글쎄... 시도는 해 봐야지. 워낙 오랜만에 해 보는 거지만.”

“으음... 아무리 봐도 사무실에서 열쇠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기다려봐. 여길 이렇게 누르면서 이 철사를 돌리면...”

­딸칵!

“어때, 됐지?”

어둠 너머로 아리엘이 경악하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그녀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열쇠도 없는데...! 이런 건 처음 봤어!!”

“그냥 잔재주야.”

“설마... 도, 도란... 사실은 도둑질을 자주 해 봤다던가...”

“...그럴 리가 없잖아 얌마. 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저절로 익힌 거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한겨울 집 밖에 상습적으로 고립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터. 아버지의 기행에 워낙 시달리다 보니 이젠 철사 두 개면 있으면 구형 자물쇠부터 도어락까지 순식간에 따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물며 지구와 비교해 훨씬 구조가 단순한 이곳의 자물쇠는 내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그럼... 들어가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연 뒤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아무리 심야라지만 도서관 내부를 순찰하는 경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만약 현행범으로 걸렸다간 발뺌도 못 할 노릇이다.

바닥에 귀를 대고 다시금 우리 외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아리엘이 나직하게 주문을 읊었다. 나긋나긋한 음률을 끝마치니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불꽃이 어두컴컴한 서재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유유히 허공을 떠다니는 빛방울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그건..”

“후훗... 아무나 못 하는 거라구? 어때, 배울 마음이 좀 생겼어? 도란이라면 특별히 가르쳐줄 수 있는데...”

“그러니까 난 마나 쓸 줄 모른데도...”

불빛에 의존해 발걸음을 옮겼다. 칠흑같이 어두운 금서고에는 등골이 오싹해질 만치의 침묵이 흘렀다. 들쑥날쑥한 서적이 자아내는 음영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마치 유령이 가득 찬 방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그래서 우리 외에도 꼭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읏...! 도란...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에이 설마... 여기에 우리 말고 또 누가...”

­....!

“드, 들었지...?!”

“....빨리 볼일만 보고 나가자.”

서고에 꽂힌 금서가 알아선 안 될 비밀을 속삭이기라도 하는지, 귓가에 불쾌한 이명이 내려앉았다.

알음알음 발걸음을 내디뎌 책장을 메운 도서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묘한 감각에 목덜미가 따가워 온다.

“이건... 사람 피부로 만든 건가...?”

누리끼리한 가죽으로 마감된 책을 뽑아 들었다. 거슬거슬한 표지를 넘기자 붉은 잉크로 가득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온다. 종이 구석구석에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귀가 가득했고, 인간들이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그림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교도의 사악한 의식에 관련된 내용이야. 이런 건 보지 마 도란.”

“...그냥 잠깐 훑어본 거야.”

곧바로 되돌려 놓았다. 우리가 원하는 서적을 찾기까지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한번은 아리엘이 쇠사슬로 봉인된 장서를 향해 손을 뻗자 돌연 그 서적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밤의 금서고에 메아리치는 쇳소리에 식겁하기도 한참, 놈은 장장 십여 분을 발작하고 나서야 진정했다.

“으... 불길해.”

“나도... 최대한 서두르자.”

누군가가 주삿바늘로 팔뚝에 날파리 유충을 주입하는 듯한 기분. 미지근한 바람이 훅 불어올 때마다 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으며, 점성 있는 공기가 질척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에서는 불가사의한 인력이 발목을 낚아채 깊은 수렁으로 잡아끄는 듯하다.

‘왜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는지 알 것 같네...’

여기 있는 것들은 단순한 활자 쪼가리가 아닌, 사람을 홀리는 마도서(??書)라는 것을 깨달았다.

빼곡하게 늘어선 서적들을 살펴보며 한참을 방황하고 있자니 미약한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고, 비쩍비쩍 갈라지는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이야 아리엘...? 꽤 둘러본 것 같은데...”

“잠깐... 이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분명 베라스틴 역사서... 역사... 역사.... 아! 찾았다!! 이 책이 틀림없어!!”

“어디 봐봐.”

아리엘이 책장에서 낡은 서적 한 권을 꺼내들었다. 두꺼운 흑피로 마감된 책. 크기로 보나 두께로 보나 백과사전을 압도할 듯한 위용에 놀라며 조심스럽게 겉표지를 넘기자 생소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스마르크 어는 맞는 것 같은데...

“고어(古?)... 옛날에 쓰던 언어야. 베라스틴이 막 세워질 무렵은 모든 게 지금과 많이 달랐으니까.”

“...넌 읽을 수 있어?”

“응, 어렸을 때 배워놨거든!”

“....”

안 그래도 문맹률이 높은 세계인데 옛 언어까지 마스터했다고...?

마법에 이어 언어 능력까지. 비상한 그녀의 지적 수준에 경악했지만, 아리엘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글귀를 읽어내렸다.

“어디 보자... 베라스틴의 역사.. 베라스틴... 아, 나왔다. 그러니까 베라스틴은 사악한 이교도... 이교도들이 모여 살던 마을? 어..? 이게 뭐지...?”

“...전에 읽어서 알고 있던 내용 아니었어?”

“아니... 그때는 가볍게 훑어보기만 해서...”

“...계속 읽어봐.”

아리엘이 자세를 고쳐잡고 책장에 적힌 글귀를 명료하게 읊어나갔다.

“....사악한 이교도가 모여 살던 마을이다. 종족을 불문하고 수많은 인간을 납치해 인신 공양의 제물로 삼았고, 남은 껍데기는 카타콤에 안치했다...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 사람이나 희생자의 가족 또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이교도의 후손이 모여 현재의 베라스틴을 건설...”

그녀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마치 유명한 자선사업가가 사실은 악덕 포주였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린 것만 같은 느낌에 속이 쓰려온다. 기분 탓인지 우리를 감싸던 불빛의 밝기 또한 한층 가라앉았다.

동요로 옅게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타콤? 그게 뭔데.”

“...매장굴이란 뜻이야. 일정 규모를 갖춘 지하 무덤을 그렇게 불러. 전염병에 취약하고 마물이나 언데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오래전에 금지되었을 텐데...”

“...왜 역사서가 금서로 지정되었는지 이제 알겠네.”

자신이 인신 공양 피해자들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달가워할 사람은 없을 터, 심지어 그들 중 일부에겐 이교도의 혈통이 섞여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말은 즉...

‘베라스틴에서 작위를 얻은 귀족 중에도 이교도 출신이었던 가문이 꽤 있겠네...’

꽤 가능성 높은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왔던 세계를 기준으로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에도 지배층이 엘리트 계층으로 군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이 망할 역사서가 금서고로 옮겨지기 전에 아리엘이 존재를 깨달아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그 지하 무덤이 어딘지도 나와 있어? 그걸 알아야 사건을 해결하든가 할 텐데...”

“그러게, 어디 보자...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기다리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찾았다! ..카타콤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유사시에 대비해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를 여럿 건설했으며 이는 추후에 수로로 이용하는 계기가 되었...”

“수로...? 잠깐, 수로?! 거기 그렇게 적혀 있어!?!”

“으, 응... 여기 봐봐.”

“어쩐지...”

아리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짚은 곳에는 오밀조밀한 글씨체로 '지하수로'란 단어가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평범한 하수도치고는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이제서야 청소 의뢰를 할 때 목도했던 무수한 통로의 존재도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동쪽 숲에서 유독 현저하게 언데드가 출몰했던 이유는 그곳에 숨겨져 있던 출입구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열려 버린 게 아닐까?

어쩌면 누군가가 일부러 개방했을 수도 있고, 혹은 언데드가 너무 범람한 나머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슬슬 이번 사태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도란? 지하 묘지의 위치를 알았잖아.”

“...사건을 해결하러 가야지. 지하수로는 몇 번 가봤으니까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고 있어. 대신 준비할 게 많...”

그때였다.

­덜컹!!!

““....!!!!””

돌연 둔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음의 근원지는 우리가 지나쳐온 곳. 굵직한 쇠창살이 덜컹거리며 깊은 잠에 빠진 서고의 침묵을 깼다.

뒤이어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오홍홍~? 분명 문을 잠가놨는데... 열려있네에?”

“....!!”

아리엘이 황급히 손을 거둬 조명을 껐다. 불씨가 사라지자 한밤중 해안가에 몰아치는 파도처럼 시꺼먼 어둠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하지만 귀를 먹먹하게 메운 적막이 부질없게도 중년 여성은 느긋하게 말을 걸며 서고 안쪽으로 다가왔다.

“거기 누구 있나요~?”

““.....””

저렇게 듣기 싫은 목소리가 또 있을까.

오전엔 그나마 들어줄 만했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에선 알 수 없는 쇳소리가 묻어나왔다. 꼭 거친 마물의 날숨 같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팔을 더듬어 물러날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비좁은 공간 속 어디로 숨으란 말인가. 사방에 들이찬 책장은 지금 이 순간 거대한 장벽으로 돌변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런... 우리 에르고모프... 왜 이렇게 화가 난 거니? 혹시 누가 여기에 왔었니~?”

­콰르르륵..! 까각..!

거친 쇳소리가 극도로 민감해진 청각을 갉아내었다. 사슬에 묶인 짐승이 날뛰는 듯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리도 간간이 뒤섞여 들려온다.

쇠사슬에 묶여 발광하던 그 책이 틀림없다.

이윽고 나무 바닥이 삐걱대며 사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내 팔을 아플 정도로 움켜쥔 아리엘의 호흡도 가빠져왔다.

진퇴양난(???).

나는 빠르게 두뇌를 회전해 이 상황을 모면할 방도를 떠올렸고,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서 아리엘의 투명한 눈망울과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리엘, 나 믿어?”

“도, 도란...?”

“빨리 말해.”

“....”

­끄덕.

“...그래.”

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발에 검은 기운을 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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