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하렘 생존기-161화 (161/375)

〈 161화 〉 베라스틴 #13

* * *

[161] 베라스틴 #13

“으흠... 분명 여기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말이죠...”

“어디 갔을까요? 당돌한 장난꾸러기들이...”

“에르고모프, 어떻게 생각하니...?”

­쩔그덕! 철컥..! 촤라라락!!!

“흠... 잘못 들었나...? 아무래도 톰슨 그 노망난 영감이 또 취해서 문을 열어놓고 간 모양이네요. 이번엔 정말로 상부에 따져야겠어요. 그 망할 영감탱이...”

­삐걱.. 삐걱...

천천히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이윽고 육중한 철문이 닫히자 도서관에는 다시금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줄곧 내 아래 뉜 아리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

월광이 맺혀 어스름하게 빛나는 창밖에서 스며들어 온 격자무늬가 두 남녀를 비추었다.

나는 지금 그녀와 선반 위, 케케묵은 서적들이 자아내는 비좁은 공간 틈새에 엎드려 있었다. 지면으로부터 약 삼 미터가량 떨어진 이곳엔 나와 아리엘이 간신히 운신할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아래 들쭉날쭉 튀어나온 장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릴 수 있었다.

사서장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아리엘을 끌어안고 이곳으로 뛰어 올라온 지도 벌써 십여 분 남짓.

위기도 가셨겠다, 이제 다시 내려가도 될 터인데...

“.....”

나는 아리엘을 보았다. 청명한 여름날의 천공을 담아놓은 듯한 하늘빛 눈동자와 최고급 품종 누에의 갓 뽑아낸 명주실을 한 가닥 한 가닥 이어붙여 만든 듯한 은발도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들여다보는 게 얼마 만일까.

아니, 분명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투구만 없었더라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개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한편.

아리엘의 시선 또한 투구 속 내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예의 그 아름답게 빛나는 아쿠아마린 색 눈동자로 지긋이 날 올려다본다.

내 허리를 살며시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냥히 뺨을 짚으며.

오래된 서고의 퀴퀴함 따위는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몽근하고도 달짝지근한 그녀의 체취에 취기가 오른다.

선악과를 베어 문 듯한 입술, 백조의 깃털처럼 우아한 속눈썹과 고아한 턱선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현묘한 자태는 새벽에 온갖 재료를 넣고 끓인 수프처럼 내 오감을 뒤섞어 애간장을 들끓게 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여체는 맞닿은 살결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가 잔뜩 무르익었음을 설파했다.

은은한 한숨과 살짝 거칠어진 내 호흡이 뒤섞이자 머릿속에서 한 광경이 되살아났다.

살랑이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온 녹음이 강렬하게 망막에 내리쬐고, 잔인하게도 아름다운 산새의 지저귐이 귓바퀴에 내려앉던 여름날. 베라스틴의 숲 속.

흘러나온 피에 잠기고 나무둥치에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던 찰나, 내가 있던 공터에 유유히 발을 들여놓고 만 은발의 소녀.

그 순간 날 걱정스럽게 들여다보던 얼굴과 눈앞에 있는 동일 인물이 겹쳐지며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휘영하게 뇌내에 투영되면서도 일랑일랑 아른거리다 결국엔 덧없이 흩어지고 마는, 그녀와의 추억을 상기하고 있노라니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려워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미안합니다 아리엘 님.”

“도란...”

“시간이 늦었습니다.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

나는 아리엘을 도와 바닥으로 내려왔다.

*

다음 날.

나와 아리엘은 느즈막한 오후가 다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모험가 길드로 향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 파티원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론디니움에게 장비를 받기로 약속한 기간도 아직인 바, 마음만 같아선 지하수로로 달려가고 싶지만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된다.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니.

결국 오늘은 충분히 휴식도 할 겸 물자를 보충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건식은 이 정도만 사면 될까 도란?”

“음... 혹시 모르니 더 챙기자. 거기선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알았어! 근데 그럼 또 식수가 문제네... 물 마석이라도 사갈레?”

“너 그게 얼만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응! 한 20골드 정도 하려나? 저번에 매장에서 봤을 때가 그쯤이였으니까...”

“...그냥 정화 알약이나 챙겨. 거기도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하수도 말고도 드문드문 지하수가 흐르니까.”

다행히 아리엘은 어제의 일을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묵묵히 밤길을 걸어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와 그녀 사이에서 어색한 공기가 느껴졌지만, 오늘 아침이 되자 아리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쾌활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와 모험가 길드가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는 동쪽 거리를 거닐고 있자니 언데드의 여파에 되레 호황을 누리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목청껏 울려퍼졌다.

“여기 베그디아 신전의 하급 성수가 있습니다!! 단돈 8골드로 여러분의 생명을 지키십시오! 빼어난 활 솜씨를 지닌 궁사님들을 위한 백발백중 은 화살촉도 있습니다!! 10골드 어치를 넘게 사시는 분들께는 특별히! 1골드로 병장구에 은을 도금해 드립니다!! 자, 선착순!”

“자네들... 내 긴말 안 하지. 단 7골드에 이 성수를 사 가게나. 대자연을 수호하는 유스타니아 님의 성수일세. 목숨값치곤 싸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지코린의 발톱으로 만든 부적 사세요!!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겁니다!! 효과는... 보장 못하지만.. 아, 아무튼 싸게 팝니다 60실링!!!”

“....”

아리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런 걸 성수라고 속여 팔다니... 정말로 믿는 모험가가 있으면 어쩌려고...”

“...왜, 가짜야? 성수를 속여 파는 건 중죄 아니었어?”

“으음... 엄연하게 가짜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진짜 성수는 한 방울도 안 들어갔을걸? 최하급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정도야. 저런 건 기껏해야 10실링이면 충분해.”

“10실링이면 그것도 나름대로 비싼 가격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지...”

말끝을 흐리며 가늠하자니 아리엘이 단호하게 주장했다.

“도란도 만약 성수를 살 일이 있으면 정가를 지불하더라도 신전에서 직접 구매해. 아니, 차라리 나한테 와. 아가사 신전의 성수라면 내가 싸게 구해다 줄 수 있으니까.”

“...그래, 내가 성수를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번잡한 길거리를 가로지르며 상품을 둘러보았다. 수로 안에 머무르는 건 최소로 할 예정이지만 전장에선 종종 예기지 못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만일 실수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리고 말 터, 심지어 던전과는 달리 자급자족도 불가능하다.

배낭 한가득 상인들로부터 구매한 비상식량과 물자 따위를 출렁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노점 거리가 끝나고 인적이 뜸한 곳까지 다다랐다. 내일은 아침 일찍 론디니움 대장간을 방문해 장비를 찾고 수로에 들어갈 예정이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이만 숙소로 돌아가려는 차, 누군가가 내 발길을 붙잡았다.

“거기... 투구 쓴 모험가... 혹시 아카이아 길드의 도란 아니신가...?”

“네? 누구시죠...?”

원형 탈모가 심하게 온 중년 남자. 푸근한 인상이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살이 빠졌는지 얼굴이 핼쑥하다. 주름살 맺힌 눈가를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역시 자네가 맞았군!! 코볼트 킹을 쓰러뜨리고 소식이 없어 걱정했는데... 무탈해 보여서 다행일세!”

“아... 설마 토드 씨? 오랜만입니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코볼트란 단어를 듣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하수도 청소 의뢰를 맡았을 때 만난 지하수로 관리인. 란스를 비롯해 코볼트 킹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세 명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어지간히도 내가 반가운지 만면에 웃음을 피우며 대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나 같은 늙은이는 어디 가봤자 받아주는 곳도 없지 않겠는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일세. 그때 자네가 구해 준 목숨은 덕분에 잘 쓰고 있다네. ...옆의 어여쁜 아가씨는 아내인가?”

“아, 아내라니 그런...”

“...그냥 파티 동료예요. 토드 씨도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

헤실헤실 미소짓던 아리엘이 파티 동료라는 말을 듣자마자 돌연 얼어붙었다.

이내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아이처럼 뺨을 부풀리고 내 허리를 꽈악 쥐어뜯었지만, 나는 통증을 감내하며 대화에 열중했다.

토드보다 지하수로를 더 잘 아는 인물은 찾기 어려울 터, 이런 기막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마침 잘됐네요.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죄송하지만... 혹시 뭐 좀 여쭈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도란 자네의 일이라면 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뭐든지 물어보게!”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지하수로에서 기이한 징후를 목격한 적은 없나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던가... 언데... 코볼트가 또 출몰했다던가...”

“흠... 지하수로 말인가...? 미안하게 됐네. 도와주고는 싶지만...”

“네...? 토드 씨는 계속 관리 직책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게...”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수로에서 빠져나온 직후 난 곧바로 해고되었다네. 지금은 집에서 가족과 소일거리를 하며 사는 중이지. 그래서 요즘 지하수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막막하구먼...”

“설마 그때 사망자가 나온 것 때문에...”

토드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그건 아니니 자책하지 말게나! 나 말고 다른 관리인도 전부 쫓겨났으니 말일세. 수로가 영주성 관할인 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사건 이후로 기사들을 시켜 입구를 지키게 하더군. 참나... 막힌 오물을 제때제때 청소해주지 않으면 사달이 날 텐데...”

잠깐.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기사들이 지하수로를 지키고 있다고요? 그것도 그날 이후면.. 석 달이나 전부터?”

“그래, 코볼트가 출몰한 뒤 대대적으로 소탕 작업을 벌였던 걸 기억하는가? 그때부터였다네, 기사들이 수로를 통제하기 시작한 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묻나?”

“그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에게 우리가 알아낸 사실을 말해줘도 될지. 하지만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단순한 헤프닝 따위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아리엘과 시선을 교환한 뒤, 나는 토드에게 언데드가 지하수로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간략하게 요약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간 베라스틴을 황폐하게 망가뜨렸던 언데드가 지하수로 때문이었다니...!!”

“쉿...! 목소리 낮춰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심증이에요.”

“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네.. 그럼 그 무리는...”

“무리...? 혹시 짚이는 구석이 있나요?”

토드가 주위를 곁눈질하더니 자세를 낮추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지하수로가 봉쇄된 이후 아예 안 들어가 본 건 아닐세. 거기 두고 온 짐이 있었거든. 근데 안에서 어떤 일당과 마주치는 바람에 허겁지겁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네...!”

“...지하수로 안에서 사람을 만났다고요?”

“그럴세!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기괴한 가면을 쓴 무리와... 영주의 사병이었네! 그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자네의 얘기를 듣고 보니 뭔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영주의 사병...”

“그래, 그리고 어디 그뿐인가...! 자네가 중상을 입고 치료원으로 실려 간 다음 날, 내가 사람들을 불러 코볼트 킹의 소재를 가져다주었던 걸 기억하는가? 그때 사망한 모험가들의 유해도 같이 수습하려 했는데... 없었다네.”

“없었.. 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사망한 모험가들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었다네! 코볼트가 먹어치운 거라면 뼛조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피만 가득하더군. 게다가 내 착각이 아니라면 통로에 희미한 수레바퀴 자국이...”

“....젠장.”

불쾌함이 치밀었다.

마치 발가벗고 대로를 거니는 듯 수많은 눈동자 앞에서 능욕당한 기분이다.

어쩌면 이번 언데드 사태는 내가 코볼트 킹을 쓰러뜨리기 한참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악다물며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리엘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토드 씨... 라고 하셨나요?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 말씀하시게나.”

“...기사가 지키고 있는데 토드 씨는 어떻게 지하수로에 들어간 거예요?”

“.....”

그러고 보니... 수로 어귀를 기사들이 감시하고 있으면 몰래 침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토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이건 아무도 모르는 건데... 사실은 빈민가의 입구 말고도 수로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하나 더 있다네.”

“...그게 어디죠?”

그러자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며­

“...따라오게나, 안내하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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